[역장에 대하여]
역장(逆葬)이란?
직계(直系) 혈족(血族)이나 형제(兄弟) 사이에서 손아랫사람을 손윗사람의 무덤보다 주산(윗쪽)에 더 가까운 자리에 장사(葬事) 한것을 말한다.
역장은 사람이 생전이나 사후를 막론하고 웃 어른에 대하여 예절과 법도를 지키는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윤리 거역이란 생각일수도 있고, 또는 비합리적인 명분으로 조상묘의 위에도 곁에도 안 된다는 논란을 하는 것은 자연의 진리나 학문적 원칙으로 판단할 때 합당한 이론이 아님으로, 역장(逆葬)이든 계장(繼葬-조상의 무덤 아래에 잇대어 자손의 묘를 씀)이든 순장(順葬)이든 간에 자연의 진리 조건에 합당 하다면 구태여 역장을 피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의 의식처럼 분별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자연의 진리를 현상적으로 나타낼 뿐임으로 이러한 진리를 바로 알고 따르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자연의 진리를 인간의 단순한 인식 속으로 끌어 들이려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뭍은 역장은 조선 전기 까지만 해도 역장자체를 금기시 하지 않았으므로, 풍수학적으로 특수한 상황일 경우엔 역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풍수에서 역장을 금기시하기 시작한 것은 유교적 질서가 완성되는 17세기 이후 부터 인데, 선산에 한 가족의 묘를 쓰게 되면서 당시 유교적 관념에 따라 아들이나 손자가 아버지, 할아버지의 머리 위에 묘를 쓰는 것이 불경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역장을 금기시 하는 것은 풍수학적인 이론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조선후기 풍속[유교사상=효친사상]에 따른 결과라고 본다.다음 역장이 이루어진 몇분의 산소를 소개한다.
● 율곡 이이 묘(栗谷 李珥 墓)
덕수이씨(德水李氏)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년(중종 31)~1584년(선조 17)』의 묘역은 래용(來龍)의 맨 위쪽은 율곡(栗谷)선생의 배위(配位) 곡산노씨(谷山盧氏)의 묘이고, 약 1m 앞쪽에 이이(李珥)선생의 묘가 있어 이는 합장(合葬)도 쌍분도 아닌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경기읍지》의 파주군 조의 열려편에 의하면 이는 율곡 선생이 48세의 나이로 죽은 8년뒤에 임진왜란을 맞게 되자 부인 노씨가 남편의 묘를 지키기 위해 몸종 여인 한사람과 함께 이곳에 왔다가 왜병들을 만나 놈들이 겁탈하려 하자 몸종과 함께 자결 하였는데, 전쟁이 끝나고 후손들이 이곳을 둘러보니 두 여인의 시신이 선생의 봉분 곁에 뼈만 남아 있어 어느 것이 부인 노씨의 유골인지 구분할 길이 없었다 한다.
후손들이 어쩔 수 없이 두 유골을 모아 율곡 선생과 합장도 쌍분도 아닌 형태로 봉분을 따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참 기구한 사연이 아닐수 없다. 율곡선생은 22세의 나이에 성주에 세거하는 곡산노씨에게 장가 들었는데, 생전에 후사가 없자 재취 김씨를 맞이해 2남 1녀를 두었으나 훗날 이들도 후사가 없어 양자로 대를 이었다.
그리고 율곡(栗谷)선생 묘 아래는 맏형인 이선(李璿)과 곽씨의 합장묘, 그 아래는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년(연산군 10) - 1551년(명종 6)』 의 합장묘, 맨 아래는 이이(李珥)의 맏 아들인 경림(景臨-庶子)의 묘가 위치하여 이곳은 역장(逆葬)이다.
●김장생(金長生)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년(명종 3) - 1631년(인조 9)』은 성리학자로 유학(禮學) 의 거두(巨頭)라 불리며, 대사헌(大司憲-從二品)을 지낸 김계휘『金繼輝, 1526년(중종 21) - 1582년(선조 15)』의 아들이다. 일찍이 송익필(宋翼弼)의 문하(門下)에서 예학(禮學)을 공부하더니, 나이 30에 뛰어난 학행(學行)으로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조 정랑으로 명나라 군대의 식량 조달에 힘썼으며, 그 후로 남양부사 안성군수를 거쳐 종친부의 종계변무(宗系辨誣)가 되었다. 그러나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고초를 격고, 집의(執義)와 공조 참의를 지내다가 落鄕하였다. 말년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는 오직 교육에만 전념하다 세상을 떠났다.
예학에 밝아 당시 얘(禮)에 대해 의문이 있으면 모두 그에게 질문하고, 이러한 학문은 아들 김집(金集)에게로 이어져 예학파(禮學派)의 주류를 이루었다. 또 문하(門下)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 유학자가 배출되어 서인(西人)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원(文元)이다.
래용(來龍)의 맨 위쪽은 김장생『金長生, 1548년(명종 3) - 1631 (인조 9)』과 부인 창녕조씨(昌寧曺氏-曺大乾의 女)의 합장묘이다. 그 아래는 광산 김씨의 중흥을 이룬 김장생 선생의 7대조부 김문(金問)의 배위(配位) 양천허씨의 묘『許應의 女, 1377(우왕 3)∼1455(단종 3)』가 있고, 왼쪽 맨 위쪽에 『金謙光, 1419 (세종 1) - 1490 (성종 21)』 의 묘,
그 아래에 김겸광의 부모인 김철산(金鐵山)과 부인 묘, 그 이래에 김장생의 삼촌인 김공휘(金公輝)의 묘, 맨 아래에 김선생(金善生)의 묘가 위치하여 역장(逆葬)이다. 묘의 소재지는 충남 논산군 연산면(連山面) 고정리(高井里) 산7-4이고, 충남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되 있다.
●이정구(李廷龜),
이정구『李廷龜, 1564년(명종 19) - 1635년(인조 13)』는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인 이석형『李石亨, 1415년(태종 15) - 1477년(성종 8)』의 현손(玄孫)으로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文章家)로 일컬어진다. 159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경서(經書)를 강의하여 학자(學者)로서 존경『을 받았다.
광해군 때에 병조(兵曹)와 예조(禮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명(明)나라의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이괄(李适)의 난(亂)과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임금을 호종하고, 1628년 우의정(右議政)에 오르고 이어서 좌의정(左議政)을 지냈다. 한문학의 대가(大家)로 글씨가 특히 뛰어났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래용(來龍)의 맨 위쪽은 이정구(李廷龜)의 장자(長子)며 인조 때에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이명한(李明漢)의 묘이고, 그 아래는 이정구(李廷龜)의 장손(長孫)이며 효종 때에 예조판서·대제학을 지낸 이일상(李一相)의 묘이고, 그 이래가 이정구(李廷龜)와 부인 권씨(權氏)의 합장묘이다. 이곳의 묘터는 선대의 순서대로 계장을 쓰면 역적이 나올 묘자리라 하여 역장(逆葬)으로 썼다고 전해오고 있다.
●성혼(成渾)
성혼『成渾, 1535년(중종 30) ~ 1598년(선조 31)』은 성수침『成守琛, 1493년(성종 24) ~ 1564년(명종 19)』의 아들로 태어나 학문의 깊이는 물론 후학(後學)을 육성함으로써 조선 성리학 발전에 공헌하여 파상학파(坡山學派)를 이룩하였다. 생원· 진사에는 합격했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34세에 전성서 참봉(典牲署 參奉)에 임명되고, 이듬 해에 장원현감(掌苑·縣監) 등에 제수됐으나 모두 사양하고 조헌(趙憲)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육에만 힘썼다. 또 39세에는 이이(李珥)의 천거로 과거 출신이 아니고서는 벼슬살이를 할 수 없는 사헌부 지평(持平)에 제수됐으나 사임하였다.
사후에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고,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래용(來龍)의 맨 위쪽은 성혼(成渾)과 부인의 합장묘이고, 아래는 부모인 성수침(成守琛)과 부인 윤씨(尹氏)의 쌍분이다. 아버지 성수침(成守琛)은 현감을 지냈으며 호는 청송(聽松), 죽우당(竹雨堂)· 파산청은(坡山淸隱)· 우계한민(牛溪閒民)이다. 이곳은 여장(逆葬)이다.
●윤보선(尹潽善)
한편 적덕과 공덕이 어우러진 명당이란 일화가 있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선산은 또 어떠한가? 맨 위 윤보선대통령과 영부인 공덕귀 여사의 합장묘, 그 아래에 윤대통령의 집안을 일으킨 고조부 윤득실과 정부인 남양홍씨의 합장묘, 그 아래에 증조부 윤교동, 그리고 맨 아래에 부친 윤치소의 묘가 있다.
세간의 풍수잣대로 보면 역장(逆葬)이다. 맨 아래 쪽에 있어야 할 윤보선의 묘가 대통령이라고 해서 할아버지 묘보다 위에 가 있다. 조부 윤영렬의 합장묘는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마을 뒤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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