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고경명(高敬命)

야촌(1) 2011. 5. 31. 23:32

■ 고경명(高敬命)

 

   [생몰년] 1533년(중종 28)∼1592년(선조 25).

   [문과] 명종(明宗) 13년(15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합격연령 26歲

   [생원진사시] 명종(明宗) 7년(155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18위

   [생원진사시] 명종(明宗) 7년(155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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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의병장이다.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 태헌(苔軒). 그는 전라도 광주(光州) 압보촌(鴨保村)출생으로. 아버지는 대사간(大司諫-正三品)맹영(孟英)이다. 

 

1. 관직생활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제1위로 합격, 진사(進佳士)가 되고, 1558년(명종 13) 왕이 직접 성균관(成均館)에 나와 실시한 시험에서 수석 하여, 곧 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같은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正六品)에 임명되고, 이어서 공조좌랑((工曹佐郞-正六品)이 되었다. 그뒤 형조좌랑(刑曹佐郞-正六品)·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正六品)등을 거쳐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1년(명종 16)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正五品)이 된 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正五品), 홍문관(弘文館)의 부수찬(副修撰-從六品)· 부교리(副校理-從五品)를 거쳐 1563년(명종 18) 교리(校理-正. 從五品)가 되었다. 

 

이때 인순왕후(仁順王后-명종의 비 沈氏)의 외숙인 이조판서(吏曹判書) 이량(李樑-효령대군의 5대손)의 전횡을 논하는데 참여하고 그 경위를 이량에게 몰래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蔚山郡守-從四品)로 좌천된 뒤, 곧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고전을 탐독하거나 자연과 벗 삼아 산수를 유람하면서 《유서석록(遊瑞石錄)》을 저술하였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靈巖郡守-從四品)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 김계휘(金繼輝-광산인)의 서장관(書狀官-임시직으로 사행의 기록관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서산군수(瑞山郡守-從四品)로 전임되었는데, 명사원접사(明使遠接使) 율곡 이이(李珥)의 천거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이어서 종부시(宗簿寺) 첨정(僉正-從四品)에 임명되었다.

 

1583년(선조 16)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從四品)· 한산군수(韓山郡守-從四品)를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正五品)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正三品)이 된 뒤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正四品)를 거쳐 순창군수(淳昌郡守-從四品)로 재직 중 1588년(선조 21) 파직되었다.

 

1590년(선조 23) 승문원판교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동래부사(東萊府使-從三品)가 되었으나 곧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2. 임진왜란 당시의 활동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고 왕이 의주로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각처에서 도망쳐온 관군을 모았다. 두 아들 종후(從厚)·인후(仁厚)로 하여금 이들을 인솔, 수원에서 왜적과 항전하고 있던 광주목사(光州牧使) 정윤우(丁允佑)에게 인계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전 나주부사羅州牧使) 김천일(金千鎰-의병장, 彦陽金氏), 전 정언(正言-正六品) 박광옥(朴光玉=陰城人)과 의논하여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6,000여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하였다.

 

여기에서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된 그는 종사관에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 양대박(楊大樸), 모량유사(募糧有司)에 최상중(崔尙重)· 양사형(楊士衡)· 양희적(楊希迪)을 각각 임명하는 한편, 전라도 의병군의 결성과 왜적을 격퇴하겠다는 출사표를 양산숙(梁山璹)· 곽현(郭玄)으로 하여금 서해를 경유하여 조정에 전달하도록 하고, 6월 1일 담양을 출발하여 북상을 개시하였다.

 

의병군이 태인에 이르렀을 때, 정윤우에게 관군을 인계하고 돌아온 종후를 만나 그에게 다시 격문을 휴대하고 김구(金溝)·임피(臨陂) 등지에서 병기와 군량을 수집하도록 하였고, 또 제주목사(濟州牧使) 양대수(楊大樹)에게 전마(戰馬)를 보내주도록 요청하였다.

 

6월 13일 전주에 도착하여 인후에게 수백명을 인솔하고 무주·진안 등의 요로에 복병을 배치하여,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막도록 하였다. 22일 전주에서 여산으로 진을 옮겨 이곳에서 종후·인후와 합류하고, 다시 호서·경기·해서 지방에 창의구국(倡義救國)의 격문을 발송하였다.

 

27일 은진에 도달하여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중, 황간·영동 등지에 있는 왜적이 금산을 점령하고 장차 전주를 경유,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곡창인 호남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당초의 북상계획을 변경, 7월 1일 연산(連山)으로 회군하였다.

 

이곳에서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白川趙氏)에게 서신을 보내어 10일 형강(荊江)을 건너 합세하여 금산의 왜적을 공격할 것을 제의한 뒤, 9일 진산을 경유하여 금산에 도착, 방어사(防禦使-從二品) 곽영(郭嶸)의 관군과 좌· 우익으로 진을 편성하였다. 

 

이날 의병 중에서 정예 수백명을 거느리고 적의 본진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굳센 저항과 관군의 소극적 태도로 퇴각하고 말았다.10일 곽영(郭嶸)과 합세하여 왜적과 대회전을 시도하기로 하고 800여명의 정예로 선제공격을 하였는데, 왜적은 먼저 약한 관군을 일제히 공격하자,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패주하였으며,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고 말았다.

 

그는 후퇴하여 다시 전세를 가다듬어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위의 종용을 뿌리치고 “패전 장으로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며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因厚=承文院正字-正九品)와 유팽로· 안영 등과 더불어 순절하였다. 

 

왜적이 퇴각하기를 기다렸다가 유체를 수렴하여 금산 산중에 매장하였으며, 10월 화순의 흑토평(黑土坪)에 장사지냈고, 그뒤 장성의 오동촌(梧桐村)에 이장하였다. 

 

3. 인품과 저작

 

어려서부터 행동이 남달리 어른스러워, 백인걸(白仁傑)이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있을 때 그를 보고 장차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뒤에 의정부좌찬성(議政府 左贊成-從一品) 에 추증,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 글씨·그림에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속집(續集)· 유집(遺集), 무등산기행문인《서석록 瑞石錄》,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正氣錄)》이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