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두곡 이발 묘갈명 병서(杜谷 李渤 墓碣銘 幷序 )/25世

야촌(1) 2011. 4. 23. 18:45

■두곡 이발 묘갈명 병서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두곡 경주이공 묘갈명 병서

(贈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 參贊官 杜谷 慶州李公 墓碣銘 幷序)

 

부모의 장례를 후하게 지내고자 함은 자식의 정이요.장례를 지내고서 며지를 묻고 묘비를 세움은 예절이다. 그런데 공의 장례를 모신지 440년, 해를 지냄이 아득히 멀어 몇 번이나 세상이 변하고, 바뀌였어도 지금까지 묘지도 없고, 묘비도 없으며, 그 위에 잔듸는 사그러 들고, 봉분은 허물어저 선대가 남기신 자취들이 먼 옛일이라 알지 못하게 될까 두렵고, 후손들에게 욕됨을 넘겨줄 것이 걱정이 되어 생각할 때마다 부끄럽고 두려움에 번민함이 오래였다.

 

아아! 반가워라. 종회장 상억씨와 총무 완희씨와 임원인 동우씨 억희씨등 여러분이 여러해 동안 애써 종전을 다스리고, 잘 불려서 여러 자손들과 협의하여 봉분을 다시 쌓고, 잔듸를 새로 입혔으며, 비석을 세워 산소를 밝히고자 하니, 이 위에 더할나위가 없다.

 

이에 상엽씨로 하여금 재능없는 나에게 비문을 부탁해 왔으나 후세에 태어나 배운것도 없음을 돌이켜볼 때 어찌 감히 이 일을 받들 수 있으리오. 굳이 사양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홀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상을 생각하여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장한 큰 일에 자손으로서 방관만 하고, 있음도 또한 예의가 아니므로 감히 영을 받들어 보첩과 가승에 의거하고 문중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참고하여, 비문을 마치었다.

 

삼가 살피건데 공의 휘(이름)는 발(渤)이요.성(姓)은 이씨로, 본은 경주이다. 공의 자는 전하지 않으니 아마도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세상을 피해 사는 집안의 화난(禍難) 중이라 관례를 치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궁벽한 깊은산 골짜기에서 두문 불출하니 사람들이 두곡(杜谷)이라 부른것이 그대로 호(號)가 되었다. 시조(始祖)의 휘는 알평(謁平)이니 신라개국좌명공신(新羅開國佐命功臣)이다.

 

고려 말엽에 휘(諱=이름)를 제현(齊賢)이라 한분이 있었으니, 호는 익재(益齋)요. 시호(諡號)는 문충공으로 덕업과 문장이 세상에 크게 나타났다. 四代를 내려와서 조선 초엽에 휘(諱)를 계번(繼蕃)이라 한분이 있어 낙안군수(樂安郡守)를 지냈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 되었으니 공(公)의 고조부(高祖父)이다.

 

증조부(曾祖父)의 휘는 윤인(尹仁)이니 평안감사(平安監司)요. 조부의 휘는 공린(公麟)이니 창평현령(昌平縣令)을 지냈다. 혼인때 전안(奠雁=혼례 때 신랑이 신부집에 기러기를 가지고 가서 상위에 놓고 절하는 예(禮) 드리던 날 밤에, 자라 여덟마리에 관한 이상한 꿈이 있은 뒤에 8형제를 두었기로, 세상에서는 팔별(八鼈)집이라 부른다.

 

생가(生家) 아버지의 휘는 원(黿)이요.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니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중형(仲兄)인 사미정(四美亭) 휘 구(龜)의 생년으로 미루어 보아 26세(歲)나 27세때 연산군(燕山君) 무오년(戊午年=1498년)의 사화(士禍)에 연좌(緣坐)되어 33세(歲) 때인 갑자년(甲子年=1504년)의 사화(士禍)에 화(禍)를 입었다.생가 어머니는 개성최씨((開城崔氏)니 병조참판(兵曹參判) 철손(崔鐵孫)의 따님이다.

 

아버지의 휘는 타(鼉)요. 성균생원(成均生員)이니, 바로 작은 아버지다. 중형(仲兄)인 재사당공(再思堂公)이 화(禍)를 입자 여러형제들이 과거 볼 뜻을 버리고, 모두 멀리 떨어져 흩어져서 숨고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니 이때 아우인 장육당(藏六堂) 휘 별(鼈)과 같이 제천(堤川) 땅으로 피해와서 종신(終身)토록 은거((隱居)하였다.

 

이로 부터 제천 땅에서 살기시작하였고, 장육당공(藏六堂公)은 다시 평산(平山)의 옥계(玉溪)로 옮겨 은거 하였다.어머니는 의흥박씨(義興朴氏)로 호군((護軍-正四品) 지홍(之鴻)의 따님이니, 자녀를 두지 못하였고, 공(公)으로서 뒤를 이었으며, 공(公) 또한 그대로 제천 땅에서 살았다.

 

옛날의 제천은 서울서 아득히 멀리 떨어저 있는 잡목이 우거저 길을 덮은 만첩산중(萬疊山中)의 깊고 험한 산골이었다. 집안의 화난으로 남들이 이름을 알까 저어하며, 깊은 산골짜기에서 나무하고 소치는 백정들 틈에 세상을 피해 살았다.

 

세상에 나설 뜻을 버리고, 스스로 절개를 깨끗이 지키며 타고난 덕을 딲아 선대의 어짊에 누를 끼침이 없도록 마음썼고 가난을 안고서 때를 못만나 집속에 쭈구리고 들어 앉아 여기서 평생을 마치었다. 세속적인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고 손수 적어둔 기록도 남기지 않았으므로 공(公)의 생년월일 조차 전하지 않는다.

 

공은 나면서부터 영특하고 준수했고, 도량이 넓고 커서 사람들이 모두가 큰 인물이 될것이라 기대 했었는데, 불운하여 세상을 잘못 만나서 세상을 다스릴 재능을 감추고 뜻이 크며,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를 지니고서도 적막한 깊은 산골짜기에서 집안에 쭈구리고 들어박혀 살았으니 운수가 비색하여 고생함이 어찌 이에 이르렀단 말인가.

 

어찌 하고 싶은 말이 없었을 것이며 어찌 원망하여 탓할 것이 없었으리요. 세상을 피해 살며, 말이 없었고, 이름 나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하나의 필적도 남김이 없었으니 가히 그 지조를 알만하다. 그 위에 기개와 절개가 있어 이름이 났으니 가히 그 삶이 어떠하였는지 엿볼 만 하다.

 

증손자 시발(時發=碧梧公)이 귀하게 됨으로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 參贊官)에 추증(追贈)되었다. 명종(明宗 15 ) 경신년(庚申=1560) 음력 10월 초(初) 五일에 궂기셨다. 재사당공(再思堂公)이 귀양 간 연산군(燕山君) 무오년(戊午年) 서기 1498년(연산 4)을 미루어 볼때 회갑(回甲)·은 지났음이 틀림없다. 제원군 송학면 송한리(堤原郡 松鶴面 松寒里) 계좌(癸坐) 언덕에 장례를 모시었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광주이씨((廣州李氏)로, 굉필(宏弼)의 따님이요. 문과에 급제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여산礪山) 송침(宋枕)의 외손녀다. 생년과 졸년은 전하지 않는다. 묘(墓)눈 합장(合葬)하여, 왼쪽에 모시었다.

 

二男 四女를 낳아 길렀으니 장남은 세번째로 태어난 경윤(憬胤)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 증(追贈)되었고, 차남은 여섯 번째로 태어난 신윤(愼胤)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장녀는 첫번째로, 태어나 이인검(李仁儉)에게 출가했고, 二녀는 두 번 째로 태어나 이형(李衡)에게 출가했고, 三녀는 네번째로 태어나 박계장(朴繼樟)에게 출가하여, 군수(郡守)요. 四녀는 다섯번째로 태어나 오사문(吳士文)에게 출가 하였으니,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이다.

 

손자(孫子)로는 경윤(憬胤)이 六男 一女를 두었으니 대수(大遂)가 군수(郡守)요. 대건(大建)이 진사로 좌찬성(左賛成)에 추증((追贈) 되었으며, 대적(大迪)이 생원이요. 대일(大逸)이 진사로 부사과(副司果)요. 대괄(大适)이 도승지(都丞旨)에 추증되었고, 대린(大遴)이 사용(司勇)이요. 여(女)는 박인걸(朴仁傑)에게 출가했다.

 

신윤(愼胤)은 二男을 두었으니 대정(大頲)은 참봉(參奉)이요. 대진(大進)은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증손(曾孫)으로는 대수(大遂)가 四男二女를 두었으니 시진(時振)은 통덕랑(通德郞)이요. 시정(時挺)은 부사용(副司勇-從九品)이요. 시원(時援)은 찰방(察訪)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다음은 시강(時扛)이다.

 

여(女)는 김시양(金時讓)이 판서(判書)요. 권이직(權以稷)이 현령(縣令)이다. 대건(大建)은 二男을 두었으니 시발(時發)은 판서(判書)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충익공(忠翼公)이요. 시득(時得)은 도호부사(都護府使-從三品)다. 대적(大迪)은 六男을 두었으니 시중(時中)과 홍적(弘績)에게 출계한 시행(時行)과 시창(時昌)과 시흥(時興)과 시광(時光)과 대일(大逸)에게 출가한 시망(時望)이다.

 

대일(時望)은 四女를 두었으니 계자(系子) 시망(時望)과 여(女)는 권해(權楷)와 김만중(金萬重)과 홍달형(洪達亨)과 이지영(李之英)이다. 대괄(大适)은 二男을 두었으니 시원(時元)과 시걸(時杰)이다. 대린(大遴)은 四男二女를 두었으니 시남(時南)은 도정(都正)이요. 시준(時浚)은 현감(縣監)이요. 시하(時夏)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正三品)인 시봉(時鳳)이요.

 

여(女)는 원엄(元嚴)과 신취선(申取善)이다. 대정(大頲)은 시보(時保)를 두었으니 부호군(副護軍-從四品)이요. 대진(大進)은 시정(時正)을 두었다. 현손(玄孫=5대손) 이하는 너무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아! 슬프다.

세상을 피해 속세의 번거로움을 잊고 살아 기록해둔 필적마저 남기지 않아서 공의 한평생을 자세히 알 수가 없고, 다만 문중에 전해오는 이야기 뿐이라 이를 슬퍼하고 이를 한탄하며, 공의 삶을 기리어 적는다.

 

송학(松鶴)땅 송한리(松寒里)의 계좌(癸坐)에 앉은 무덤은 공(公)의 유택(幽宅)이요.

청룡(靑龍) 학봉(鶴峰) 월악(月岳) 용두산(龍頭山)들!

 

산이 아름답고, 물이 맑은 궁벽(窮僻-외로 히 따로 떨어져 구석지고 몹시 으슥함)하여

사람의 왕래가 드문 그윽하고 조용한 곳이어라.

 

서울서 아득히 먼 초목이 우거저 햇빛이 잘 보이지 않는 궁벽한 산골인데,

서울을 버리고, 멀리 찾아와서 작은 아버지의 뒤를 이었네.

 

집안이 화난(禍難)을 당한 나므지 세상에 나설 뜻을 버렸고,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고 세상을 피해 자취를 감추고 살았도다.

 

타고난 덕을 닦고, 스스로 깨끗이 절개를 지키니 사람마다 우러러 보며,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였네.

 

두곡(杜谷)이라 불러 그대로 공(公)의 호(號)가 되었으니,

깊고 험한 골짜기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함을 영유한 칭호였도다.

 

푸른 솔에 학(鶴)이 앉은 모습은 공(公)의 모습이요.

솔은 추울수록 더욱 푸르름은 공(公)의 지조일레라!

 

세상을 피해살며, 말없이 지냈으되 어찌 답답하고 억울함이 없었으랴.

소쩍새가 그 아픔 어루만지며, 위로하여 밤새워 울어대네.

 

번거로운 세상사 잊고, 관계하지 않았기로 상자속엔 필적하나 남김이 없어

자(字)도 생신(生辰)도 전하지 않으니 알 길이 없어라.

 

공(公)의 삶은 비록 불운했건만 음덕(蔭德)은 실로 후하게 일어나서

재주가 뛰어난 자손들이 연속하고 있음을 먼 후손이 울며, 기리도다.

 

서기 1992년 4월

후손 오촌공후(梧村公後) 문희(文熙)가 글을 짓고,

후손 남계공후(南溪公候) 상묵(相默)이 글을 쓰다.

 

옮긴이 :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