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석성현감 마곡 이숙지 묘표-익재공후 밀직공파

야촌(1) 2011. 2. 9. 11:20

  석현현감 마곡 이공 숙지 묘표 / 21世

(石城縣監 麻谷 李公 俶祉 墓表)

 

양주(楊州) 조병덕 찬(趙秉悳 撰)

조병덕 생졸년 : 1800년(정조 24) ~ 1870년(고종 7)

 

국조(國朝-조선을 말함)에 있어서 절조와 의리가 단종(端宗)과 세조(世祖) 때에 제일 성했다. 자기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루지 않으면, 모두 세상을 숨어서 스스로 조촐하게 지냈다.

 

곧 세상에서 이르는 바 생육신(生六臣)과 사육신(死六臣)이 그러한 분들이다. 비록 그 당한 환경이 같지 않아서 혹은 죽고 혹은 살았지만 결국은 삼인[三仁 : 3명의 어진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즉 은(殷)나라 말에 세 충신이니,

 

곧 미자(微子)는 주(紂)의 서형(庶兄)으로서 그의 폭정(暴政)을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숨어 버렸고, 숙부(叔父) 기자(箕子)는 간하다가 갇히어서 종이 되었고 숙부(叔父) 비간(比干)은 간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의 행동이 같지 않지만 다 같이 인(仁)에 귀착한 거와 같지 않겠는가.

 

그 나머지 산이나 숲속에 자취를 감춘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중에는 몇 백년을 지난 뒤에 나타난 이도 있으니 예를 들면, 문정공(文正公) 도암(陶庵) 이선생 재(李先生 縡)가 감찰(監察) 류공자미(柳公 自湄)의 묘갈에서 명(銘)을 써서 나타낸 것이라던지 우리선생님 문원공(文元公 노주(老洲) 오선생 희상(吳先生 熙常)이 고은 이공 지활(孤隱 李公 知活)의 묘에 묘표를 써서 나타낸 것이다.

 

숨겨져 있는 것을 알리고, 묻혀 있는 것을 천양(闡揚-드러내어 밝혀서 널리 퍼지게 함)하는 것이다. 내가 들은 바로는 고(故) 석성(石城) 이공(李公)이 의리를 다하여 선왕(先王-승하한 왕으로 단종을 말함)의 혼령을 위로하여, 김동봉[金東峰 : 김시습(金時習)의 호(號) 또는 매월당(梅月堂)]등 제공과 마음과 자취를 같이 하였으나, 침체한 제가 여러 수백년 되어서 아무도 칭송하는 사람이 없었다. 슬픈 일이다.

 

공의 이름은 숙지(俶祉)요. 성(姓)은 이씨로, 경주(慶州)에사 나왔다.

 

시조 알평(謁平)이 신라 시조를 도와서 큰 벼슬을 하였다. 그 뒤에 문중공(文忠公) 제현(齊賢)이 익재(益齋)라고 하였는데, 고려말의 명신이다. 공(公)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曾祖) 창로(彰路)는 봉익대부(奉翊大夫-고려때의 종二품품계) 개성윤(開城尹-개성시장)을 지냈고, 조부 곤경(袞慶)은 선점록사(仙店錄事)를 지냈다. 부친의 이름은 종신(種信)이다. 공이 음직(蔭職)으로, 벼슬하여 경태(景泰 : 명나라 경종의 연호) 갑술(甲戌-1454)에 석성현감(石城縣監)을 지냈다.

 

이듬해인 을해년[乙亥-1455(세조 1)] 가을에 벼슬을 팽개치고, 홍산현(鴻山縣-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옥산면·구룡면·내산면·남면·외산면 일대)의 남부에 우거하였으니, 곧 세조(世祖)가 수선(受禪-왕위를 양도 받음)하던 첫 해였다.

 

단종(端宗)이 승하하자 감히 복[服-상복(喪服)]은 입을수 없으서 그 고을의 북쪽 마전곡(麻田谷)에 들어가서 여막을 짓고, 살았다. 마(麻-삼베는 상복에 사용되기 때문에)의 뜻을 취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일평생 그 동네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세(下世-세상을 하직함)하매 동네뒤 자좌(子坐)의 자리에 안장하였다. 이는 유훈에 따른 것이다.

 

공의배위(配位)는 족보(族譜)에 기재되어 있지 않음으로 궐(闕-빠떠림)하였다. 손자 구령(龜齡)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연산조(燕山朝)의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덕(德)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증손(曾孫) 전(筌)은 중종(中宗) 기묘년(己卯年-1519)에 사마(司馬-小科)에 급제 하였으나, 조정암선생(趙靜菴先生)이 화(禍)를 입는것을 보고, 드디어 과거(科擧-大科)를 단념 하였다.

 

남포(藍浦)에 종적을 감추고 문을 닫고, 스스로 몸을 닦았으니, 그의 현명함은 가히 알수 있으며, 공(公)의 손자 되기 부끄러울 것이없다. 벼슬이 여러 대 동안 끊어져서 궁벽한 시골에 침체하고 있었으니 이것이 곧 공(公)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함이 아니겠는가.

 

아! 공은 일개 조그만 고을의 현감(縣監)으로, 의리를 지켜서 스스로 폐하여 죽는날 까지 후회하지 않았으니 어찌 열렬하지 않은가. 우암 송선생(尤庵 宋先生)이 영월군 육신사 寧越郡 六臣祠)의 기문(記文)에「우리전하(殿下-숙종을 말함)께서 절조와 의리를 세우는 뜻이 여러 왕 보다 두드러지게 뛰어났으니, 이 또한 공자가 의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한탄하여 춘추(春秋-의리를 중심으로 엮은 책이름)를 지은 뜻과 같은것인가」고 하였다.

 

단종(端宗)이 복위하게 되자. 먼저 말한 생육신이 다 증직을 받고 , 제사를 내려서 서원에서 제향을 받들게 되어서 가리워 졌던 덕(德)과 미미한 행동 마저도 이에 이르러 크게 나타났다.

 

공의 큰 절조로서 그와 같이 위로 왕에게 까지 들리어 존중하고 표장하는 은전을 받지 못하고, 또 선현들의 천양(闡揚)하는 바도 되지 못하여 지금까지 이름없이 내려 왔으니, 물론 공에 있어서는 군신의 의리를 다했을 뿐이요.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한것이다.

 

그러니 후인으로서 통탄스럽고 아까운 것이 이만 저만 하겠는가. 공의 십사대손(十四代孫) 정영(鼎榮)이 이 용렬한 나와 늦게 교분이 두터웠다. 나에게 비문을 청하기에 그럴 사람이 못 된다고 사양하였으나 그 뜻이 심히 간곡하므로 끝끝내 사양할 수도 없어서 삼가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의 사론(史論)을 숭상하는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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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石城縣監 麻谷 李公 俶祉 墓表

 

숙재 조병덕(肅齋 趙秉悳) 찬(撰)

 

國朝節義。惟莊光之際爲盛。非殺身成仁。則擧遯世自靖。卽世所稱生六臣死六臣者。是已。雖以所値之不同。或死或生。豈非三仁之行不同。而幷歸於仁者歟。其餘晦跡山林者。又不知其幾。而乃或歷數百年而始彰。有如文正公陶菴李先生縡。銘監察柳公自湄之碣。我先師文元公老洲吳先生煕常。表孤隱李公智活之墓。無不有以發潛闡幽焉。以余所聞。故石城李公。畢義靖獻。與金東峯諸公。同其心迹。而沈淪幾百年。人無得以稱焉。悲夫。公諱俶祉。李氏。出慶州。始祖謁平。佐羅祖。致大官。其後文忠公齊賢號益齋。爲麗季名臣。公之高祖也。曾祖彰路。奉翊大夫開城尹。祖衮。慶仙店錄事。考種信。從蔭仕。景泰甲戌出監石城縣。翌年乙亥秋。投紱寓鴻山縣。卽光廟受禪之初也。及端宗昇遐。以未敢持服。乃入縣北麻田谷廬焉。取麻子之意也。仍終身不復出焉。沒而葬于宅後子坐原。遵遺訓也。公之配譜不錄。生一男孫秀。察訪早世。孫龜齡。中生員試。値燕山朝戊午士禍。隱德不仕。曾孫荃。中宗己卯。年二十。中司馬。以高才邃學。爲先輩所推重。而見靜菴趙先生被禍。遂謝擧業。遯跡于藍浦之內洞。杜門自修。與世相忘。無所憫焉。其賢可知。而無愧爲公之後也。以三世獨身。有二子。堯年,舜年參奉。曰珽秉節校尉,瑭,璘,璞。長房出。曰琚奉事,瑜,琛。次房出。其後蕃衍。不可勝記。而冠冕累絶。沈滯窮鄕。此乃公之名所以不顯于世歟。嗚呼。公是一外邑之宰耳。未嘗有荷顧遇受寄託於上者。而能守義自廢。沒世而不悔。豈不烈乎哉。尤菴宋先生記寧越郡六臣祠曰。我殿下培植節義之意。逈出百王。豈亦孔子衰世之意耶。及莊陵復位。而向所稱生六臣者。亦皆贈職賜侑而俎豆之。其潛德微行。至是始大顯。夫以公之大節。旣不能如彼之上徹宸旈而蒙崇褒之典。又不得爲宋先生及陶菴,老洲諸先賢所闡敭。以至于今泯泯也。在公則固已盡君臣之義。無所爲而爲之者。而其爲後人之歎惜。則豈淺淺也哉。學士大夫。有能公誦於聖朝。使公所秉之大義屢百年閼而不章者。有以顯而不晦。則其有補於風化。顧不大歟。公十四代孫鼎榮。與其族弟晉榮。請公墓刻。余居同一鄕。知其必不至誣先。故謹書此。以俟後尙論者云。崇禎紀元後四己未殷秋上澣。楊州趙秉悳。撰

 

肅齋集卷之二十三(숙재 조병덕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