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재사당 이원선생 묘.

야촌(1) 2011. 3. 27. 10:38

↑소재지 : 경기도 양주시 덕계동 산64번지 도락산(道樂山)에 배위 합폄(配位合附)이다.  

 

 

 

 

 

 

 

 

 

 

 

 

 

 

 

 

 

 

 

 

 

 

 

 

 

 

 

 

 

 

 

 사진출처: http://cafe.daum.net/bradleeㅣ해모수(相旭.龜) /촬영일자 : 2011년 3월 중순.

 

재사당 이원선생 묘(再思堂 李黿先生墓) 

 

李黿[生年未詳(1471년 추정)~1504年(燕山君 10]은 朝鮮 前期의 文臣으로 本貫은 慶州. 字는 낭옹(浪翁), 號는 再思堂이다. 高麗 때 門下侍中(1357)과 領藝文館事를 지낸 林府院君 文忠公 益齋 李齊賢의 7代孫으로, 高祖는 濟州道按撫使를 지낸 李伸이며, 曾祖는 參判과 樂安軍事를 지낸 李繼蕃이며, 祖父는 平安道觀察使를 歷任한 李尹仁이고, 아버지는 昌平縣令을 지낸 李公麟이며, 어머니는 順天朴氏로 集賢殿學士이며 死六臣의 한사람인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의 둘째 딸이다.

 

夫人은  開城崔氏로 參判에 追贈된 崔鐵孫의 딸이며, 禮曹參判을 지낸 송석 최명창(松石 崔命昌은 그의 妻男이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文人이다.) 1480年(成宗 11)에 進士가 되고, 1489年(成宗 20) 式年文科에 丙科로 及第, 괴원(槐院)을 거쳐 檢閱이 되었으며, 1495年(燕山君 元年)에 賜暇讀書하였다. 그 뒤 戶曹佐郞을 거쳐 奉常寺에 在職하면서 金宗直에게 文忠의 諡號를 줄 것을 提案하였다.

 

1498年(燕山君 4) 戊午士禍 때 이로 인하여 郭山에 杖流되었다가 4年 만에 다시 羅州로 移配되었는데, 1504年(燕山君 10) 甲子士禍로 다시 서울로 불려와(조선왕조실록 참조) 斬刑을 당하였다.

 

公이 甲子士禍를 당했을 때 夫人의 동생인 承文院 正字 松石 崔命昌이 벼슬을 버리고, 시신(屍身)을 수습하여 모셔다가 이곳 자기네 선산에 매형(妹兄)을 返葬하였다. 당시 재사당 사가에는 부모 형제 모두가 죄를쓰고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귀양가 있어서 장례를 처리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文章에 能하고 특히 行義로 推仰받았다. 羅州의 榮江祠, 郭山의 月浦祠에 祭享 되었으며, 1506年(中宗 1) 中宗反正으로 신원(伸寃)되어 都承旨에 추서(追敍)되었다. 李黿의 墓域은 京畿道 楊州市 德溪洞 山 64番地 道樂山에 位置해 있다. 

 

墓域 아래에는 지대석(址臺石)과 長方形의 碑座에 碑身을 올리고, 팔작지붕 形態의 옥개석(屋蓋石)을 갖춘 墓碣이 세워져 있다. 墓碣에는 『再思堂李先生墓銘』이라는 篆額이 새겨져 있고, 淸陰 金尙憲이 撰한 墓碣銘이 새겨져 있다. 墓碣 右側에는 비좌이수(碑座螭首) 形態의 墓碣이 세워져 있다.

 

2002年 11月 後孫들이 새로 세운 墓碣에는 舊 墓碣의 碑文의 原文을 그대로 옮겨 새겼고, 解釋文도 새겨 넣었다. 墓所에는 配位 開城崔氏와 單墳 合葬墓로 構成되어 있고, 圓形의 封墳에는 호석(護石)을 둘렀다. 封墳 앞에는 비좌관석(碑座冠石) 形態의 墓表가 세워져 있다.

 

墓表 右側에는  비좌이수(碑座螭首) 形態의 墓碑가 세워져 있다. 2003年 10月 後孫들이 새로 세운 墓碑 前面에는「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再思堂慶州李公諱黿之墓 配淑夫人開城崔氏酉坐合兆」라 記錄되어 있고, 後面에는 미수 허목(眉叟許穆)이 撰述한 墓誌文이 새겨져 있다. 

 

封墳 앞에는 魂遊石, 長臺石, 床石, 고석(鼓石), 香爐石, 준석(樽石) 等이 配置되어 있고, 左右에는 望柱石과 文人石이 세워져 있다. 또 中央에는 火窓이 4個인 長明燈이 建立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