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몽량(李夢亮) *24世
1499년(연산군 5)∼1564년(명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응명(應明).
진사 예신(禮臣)의 아들이고, 백사(白沙) 항복(恒福)의 아버지다.
↑정헌공(定獻公) 이몽량(李夢亮) 묘.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광촌
↑시녕부원군(始寧府院君) 이운복(李雲福) 묘 *25世
1531년(중종 26) 5월 2일 생으로 영평현령(永平縣令)을 지내고 증직으로 순충적덕 보조공신(純忠積德補
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연경연사 시녕부원군((領
經筵事始寧府院君)이다. 우참찬 몽량의 장남이다.
↑26世 이진남(李振男) 묘.
↑26世 이진남(李振男)묘표. /시녕부원군(始寧府院君) 이운복(李雲福)의 차남이다.
↑26世 오산군(鰲山君) 이탁남(李擢男) 묘.
이탁남(李擢男)
1572(선조 5)∼1645(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근숙(根叔). 시녕부원군 운복의 3남으로, 1600년(선조 33) 문음으로 등용되어 청단도찰방(靑丹道察訪)을 거쳐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역임하고, 충청도 덕산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1627년(인조 5)강원도 횡성현감으로 있을 때, 이인거(李仁居)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정사공신(靖社功臣)들이 나라를 그르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켜 관부(官府)에 돌입하여 군기(軍器)을 약탈하고 죄수를 풀어주는 등 난동을 피워 군대와 백성을 위협하였다.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감히 제압하는 자가 없었다.
그는 횡성을 빠져나와 원주로 가서 목사 홍보(洪寶)와 함께 싸워, 이인거와 그의 아들 성지(姓支) 일당을 생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 공으로 수충분의 결책소무 공신(輸忠奮義 決策昭武 功臣) 2등이 되어 오산군(鰲山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의정(毅靖)이다 1645年 5月 享年 74世에 졸(卒)하니 상(上) 께서 예장과 제사를 내리고 자헌대부 호조판서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추증 하였다. <끝>
↑충의사
↑오산군(鰲山君) 이탁남(李擢男) 에게 내린 교지
묘는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 광촌(너배기) 뒷산이다. 찬성공贊成公) 예신(禮臣)의 묘(墓) 우측 능선에 아버지
시녕부원군(始零府院君) 운복(雲福)의 묘(墓) 후우(後右)에 자리하고 있다.
<사진 : 이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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