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민지 선생 묘지명 병서(閔漬先生墓誌銘 幷序)

야촌(1) 2011. 2. 27. 14:15

유원 고려국 추성수정보리공신 삼중대광 판첨의부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여흥부원군 시문인 민공 묘지명 병서(有元 高麗國 推誠守正保理功臣 三重大匡 判僉議府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 驪興府院君 諡文仁 閔公 墓誌銘 幷序)

 

추성양절공신 대광 삼사사 예문관 상호군(推誠亮節功臣 大匡 三司使 藝文館 上護軍) 이제현(李齊賢) 지음

 

나라가 천자의 신하가 되는 데에는 예(禮)로써 하고, 빈객을 사귀는 데에는 문(文)으로써 하니, 반드시 나이든 학자를 택하여 사명(詞命)을 가다듬는다. 고종(高宗) 때에는 이문순공(李文順公 : 李奎報)과 같은 사람이 있었고, 원종(元宗) 때에는 김문정공(金文貞公 : 金坵)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

 

충렬왕(忠烈王)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곧 돌아가신 재상인 여흥부원군 민공(驪興府院君 閔公)이 실로 그 임무를 담당하였다. 공의 이름은 지(漬)이고, 자는 용연(龍延)이며, 황려군(黃驪郡) 사람이다. 아버지 휘(輝)는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판이부 어사대사 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 門下侍中 判吏部 御史臺事 太子太師)이다.

 

조부 명신(命莘)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이고, 증조 식(湜)은 태중대부 병부상서 보문각학사 지제고(太中大夫 兵部尙書 寶文閣學士 知制誥)이다. 고조 영모(令謨)는 금자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 특진 수태자태사 상주국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집현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이부사(金紫光祿大夫 開府儀同三司 特進 守太子太師 上柱國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集賢殿太學士 監修國史 判吏部事)로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어머니는 하원군대부인 이씨(河源郡大夫人 李氏)로 조의대부 사공경 우간의대부 보문각학사 지제고(朝議大夫 司空卿 右諫議大夫 寶文閣學士 知制誥) 세화(世華)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 총명하였으며 8세 때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다.

글을 읽다가 빠진 글자나 잘못된 글자가 있으면 곧 보태거나 덜어내고는 하였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선본(善本)을 가지고 살펴보면 과연 그와 같았으니, 모두들 놀래고 찬탄하면서 오래 묵은 습관과 같이 여겼다.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9세에 과거[春場]의 을과(乙科)에 1등으로 뽑혔다.

 

남경장서기(南京掌書記)가 되어 나갔는데, 낙헌 이시중(樂軒 李侍中 : 李藏用)이 유수(留守)로 있으면서 신진(新進)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통문원녹사(通文院錄事)에 제수되고 임금의 행차를 수행하여 원에 들어갔으며, 위위주부 겸 직한림(衛尉主簿 兼 直翰林)으로 옮겨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상소하니 원종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경인년(충렬왕 16, 1290)에 천자가 조서를 내려 왕세자가 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때에 도적을 피해 도읍을 옮기니 도로가 막혀서 어지러웠다. 공이 국자(國子) <결락> 로서 세자를 가르쳤는데, 밤낮으로 말을 달려 (원의) 조정에 이르니, 조정의 신하들이 바야흐로 군사를 쓸 일을 의논하였다.


 교지(交趾)에서 보내온 황제의 글[旨]이 있어 고려 세자의 스승인 학자를 불러 물으니, 공이 대답하여  “수고롭게 군사를 내어 토벌하는 것은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그 말이 황제의 뜻과 맞으므로 특별히 조열대부 한림직학사(朝列大夫 翰林直學士)에 임명되었다.


임진년(충렬왕 18, 1292)에 원(元) 조정이 왜(倭)를 정벌할 전함을 수리하도록 명하자 서울과 지방이 시끄러워졌다. 충렬왕이 공주와 함께 원에 들어가니 공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수행하였는데 추밀(樞密) 홍군상(洪君祥)을 만나서 “왜인들은 <결락> 바다에 있고 <결락> 백성들은 완고하니, 비록 얻더라도 중국을 살지게 하기에는 족하지 못합니다.


 한 번 이(利)를 잃으면 후회함이 어찌 미치겠습니까. <결락> 한(漢)은 주애(珠崖)를 얻었으며 <결락>”라고 하여 군상을 격앙시키니, 군상이 말하였다. “국왕의 말을 들었으니, 내가 (원에) 들어가면 천자에게 아뢰겠습니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으니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으나 공이 은밀히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군상이 돌아가 황제에게 아뢰니 드디어 그 논의가 그치게 되었다. 얼마가 지나 이듬해가 되자 마침 유고가 생겼으므로 드디어 파하여졌다. <결락>

 

임금이 돌아오자 동지공거(同知貢擧)에 임명되어 선발한 사람들이 모두 명사로 알려졌으며, 뒷날 장상(將相)이나 고위 관리가 된 사람이 많았다. 이부(吏部)에 있을 때에는 청렴하고 검소함을 스스로 지켰으며, 소나무 같은 수염과 학과 같은 기골로 멀리서 바라보면 참으로 산과 못에 사는 신선 같았다.


 일이 있으면 원의 조정에 알리는 것을 담당하였는데, 말로 하기 어려운 것은 모두 공이 문장으로 적어서 평탄하면서도 쉽게 밝혔다. 풍속을 급하게 고치는 일 같은 것도 우리 나라의 오래된 습관을 들면서 청하니, 원의 조정에서 모두 그 의견을 따른 것도 한두 번으로 헤아릴 일이 아니다.


공은 일찍이 예전의 자취는 임금이 마땅히 알아야 하지만 방대하여 두루 살피기 어렵다고 하여 하나의 그림으로 만들어 바쳤는데, 무릇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세대의 길고 짧음, 도읍을 정하고 연호를 세운 것, 합침과 분열을 기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누런 색과 붉은 색이 검은 색과 더불어 혹은 늘어서고 혹은 무리를 이루니, 마치 그물에 벼리가 있는 것과 같고 구슬이 꿰미에 꿰어진 것과 같아서 온 세상이 <결락> 탄복하였다. <결락> 신성대왕(神聖大王 : 太祖)의 세계(世系)가 (唐) 선종(宣宗)에서 나왔으니 여러 대에 걸친 잘못을 바로 잡았다.

 

태위왕(太尉王 : 忠宣王)이 그것을 보물처럼 중요하게 여겨서 상을 넉넉하고 넘치게 내려주었다. 태위왕이 서쪽으로(유배) 갔을 때에 반역배[逆豎]인 백안두사(伯顔豆思)가 독을 품고 (황제의) 위엄을 빌려서 화와 복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결락>

 

원의 서울에 가서 글[表]를 올려 (태위왕을) 불러 들여 귀국시켜 줄 것을 청하니, 비록 일은 중도에 그쳤지만 듣는 사람들은 의롭게 여겼다. 태정(泰定) 을축년(충숙왕 12, 1325)에 추성수정보리공신 삼중대광 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여흥군(推誠守正保理功臣 三重大匡 僉議政丞 右文館大提學 驪興君)에 제수되었고, 3년(1326)에 승진하여 판첨의부사 여흥부원군(判僉議府事 驪興府院君)에 봉해졌는데, 대개 그 충성에 따른 것이다.


12월 임신일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시니, 나이가 79세이다. 부음을 듣고 왕이 매우 슬퍼하여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장례일을 돕게 하고, 시호를 문인공(文仁公)이라 하였다. 공의 어머니가 꿈에 별과 용이 감응하여 잉태한 지 11개월 만에 공을 낳았다.


 공이 당후관(堂后官)이 되어 명령을 내리는 문서를 가지고 밤에 밀직사(密直使) 김광원(金光遠)의 집으로 갔을 때, 김광원이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한 늙은이가 그의 베개를 밀면서 말하였다. “문 앞에 큰 손님이 와 있는데 어찌 잠을 잘 수 있단 말이오.” 이에 놀라 깨어 의관을 바로 하고 나가 보니, 바로 공이었다.

 

공은 어려서 병을 많이 앓아 몸에 옷을 걸치지 못할 정도 약하였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서로 공의 학문이 깊어질 것을 기대하기는 하였으나, 능히 장수할지는 알지 못하였다. 마침내 지위가 인신(人臣)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고 나이도 팔순에 이르렀으니, 작위도 누렸고 장수하였다고 할 것이다.

 

명성이 일찍부터 알려졌지만 절조를 지키면서도 모가 나지 않았고 기(氣)가 부족하지 하였으니, 천도(天道)로서 복과 선을 받은 것은 알려지지 않은 바탕[陰相]이 그렇게 한 바이다. 광정대부 첨의찬성사(匡靖大夫 僉議贊成事) 신사전(申思佺)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상정(祥正)으로 중정대부 밀직지신사 사헌집의 진현관제학 지제고 지선부사(中正大夫 密直知申事 司憲執義 進賢館提學 知制誥 知選部事)이고, 막내아들은 상백(祥伯)으로 통직랑 언부직랑(通直郞 讞部直郞)이다.

 

장녀는 관군만호 광정대부 첨의평리 상호군(管軍萬戶 匡正大夫 僉議評理 上護軍) 나익희(羅益禧)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중대광 삼사사 예문관대제학 상호군(重大匡 三司使 藝文館大提學 上護軍) 김원상(金元祥)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내시(內侍)로 들어간 보승별장(保勝別將) 박윤류(朴允鏐)에게 시집갔다.명(銘)하여 이른다.

 

여강(驪江) 물은 맑게 일렁이는데<결락> 포부를 품도다.곤륜산(崑崙山)의 한 조각 옥이고 계수나무 한 가지이니높은 벼슬에 오르고 뛰어난 문장가가 되어 빛나고 밝은 노래를 짓도다.구름 덮인 궁궐 문을 열고 검은 주머니[皂囊]를 차니옥같은 목소리로 의젓하게 봉황새는 조양(朝陽)에서 울었네.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토론하며 세자[元良]를 보좌하고조정 가운데로 높이 날며 문한(文翰)을 휘둘렀네.

황제의 조정에서 바다 건너 오랑캐[海夷, 倭]를 정벌할 것을 의논하니한 마디 말[片言]로 두루 백성의 고통을 치료해 주었고,충성으로 대항하며 임금을 구하는 일은 늙은 나이에도 사양하지 않고기세로 흉악한 무리들을 꺾으니 여우와 너구리 같은 소인배들이었네.

 

용(龍)에 올라 타 천제가 사는 백운향(白雲鄕)으로 돌아가니사림(士林)이 천 년 동안 그 명성과 위광을 부러워하리로다.

푸른 빛 옥[翠琰]을 갈고 다듬어 무덤에 명(銘)을 새기며소나무와 잣나무를 자르지 않으니 팥배나무[甘棠]와 같으리.


태정(泰定) 3년 병인년(1326년 충숙왕 13) 12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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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元高麗國推誠守正保理功臣三重大匡判僉議府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驪興府院君 贈謚文仁閔公墓誌銘幷序


推誠亮節功臣大匡三司使藝文館上護軍李齊賢撰


國家臣天子以禮, 交賓客以文, 必選耆儒, 潤色詞命. 在高王時, 有若李文順公, 在元王時, 有若金文貞公, 而自忠烈王時至今代, 則故相驪興府院君閔公, 實專其任. 公諱漬, 字龍延, 黃驪郡人也. 考諱輝皇, 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判吏部御史臺事太子太師, 祖諱命莘皇, 尙書左僕射, 曾祖諱湜皇, 太中大夫兵部尙書寶文閣學士知制誥, 高祖諱令謨皇, 金紫光祿大夫開府議同三司特進守太子太師上柱國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判吏部事, 謚文景公. 妣皇, 河源郡大夫人李氏皇, 朝議大夫司空卿右諫議大夫寶文閣直學士知制誥世華之女也. 公幼聰明, 八歲能屬文. 讀書有脫誤, 輒以意增損. 觀者咸取善本考之, 果是. 皆驚歎, 以爲宿習. 十七中司馬試, 十九擢春場乙科第一. 出掌南京書記, 樂軒李侍中爲留守, 不以新進待. 拜通文院錄事, 扈駕朝元, 遷衛尉主簿兼直翰林, 上䟽論時政得失, 元王嘉納焉. 歲庚寅, 天子詔王世子入朝, 時因避寇遷都, 道路梗艱. 公以國子…傅世子, 晨夜兼馳以達朝廷, 廷臣方議用兵. 交趾有旨, 高麗世子師儒者其召問之, 公對以爲, “勞師致討, 不如遣使招降.” 言稱旨, 特拜朝列大夫翰林直學士. 歲壬辰, 朝廷勅修征倭戰艦, 中外騷然. 忠烈王與公主入朝, 公以右副承旨從, 見樞密洪君祥曰, “倭民…在海…民頑, 雖得之, 不足以肥中國. 一失利, 悔之何及. …漢得珠崖….” 以激君祥, 君祥曰, “得聞國王言, 吾當入白天子.” 王問諸大臣, 無敢出口, 公密啓于王, 歸語君祥奏, 寢其議. 以須明年, 適有事, 故遂罷. …駕還, 命同知貢擧, 所選皆知名士, 後多爲將相達官. 其處吏部, 淸約自持, 松髥鶴骨, 望之眞山澤仙也. 事有當奏朝廷而言所難悉者, 公述之以文, 坦然易曉. 如風俗驅良, 請因土舊, 朝廷皆從之者, 難一二數也. 公嘗以爲, 前世之跡, 人主所宜知, 而浩汗難以遍閱, 製爲一圖上之, 凡王覊理亂 世代修短 定都立號 混竝分裂, 靡所不載. 黃朱與黑, 或列或圈, 若網在綱, 若珠在貫, 一世服. 其…神聖系出宣宗, 矯累世之謬. 太尉王寶重之, 賞賚優渥. 太尉王之西也, 逆竪伯顔豆思懷毒假威, 禍福由口. …詣上都, 表請召還歸國, 事雖中格, 聞者義之. 泰定乙丑, 授推誠守正保理功臣三重大匡僉議丞政右文館大提學驪興君, 三年加封判僉議府事驪興府院君, 蓋服其忠也. 越十二月壬申, 病薨于私第, 年七十九. 訃聞, 王震悼, 命有司, 庀葬事, 謚曰文仁公. 公大夫人夢感星龍, 孕十一月而生公. 其爲堂后官, 持命牒, 夜詣密直使金光遠宅. 金方寢, 有老叟推其枕曰, “門有巨賓, 胡睡爲.” 乃驚悟, 衣冠而出, 則公也. 公少多疾, 身若不勝衣. 故人雖以遠到相期, 莫知其能壽也. 卒乃位極人臣, 年至八旬, 旣爵而齒. 令聞經始, 非操守有方, 不餒其氣, 將天道福善, 所以陰相之然耶. 娶匡靖大夫僉議贊成事申佺之女, 生二男三女. 長曰祥正, 中正大夫密直知申事司憲執義進賢館提學知制敎知選部事, 季曰祥伯, 爲通直郎讞部直郎. 女一適管軍萬戶匡靖大夫僉議評理上護軍羅益禧, 一適重大匡三司使藝文館大提學上護軍金元祥, 一適入內侍保勝別將朴允鏐. 云銘曰.


驪江之水淸淪, …襟期. 崑山片玉桂一枝, 高官巨筆歌緝熙. 披雲閶闔持皂囊, 鏘鏘威鳳鳴朝陽. 討論王覇補元良, 翺翔中朝翰墨場. 帝臣廷議征海夷, 片言徧藥民瘡痍. 抗忠救主老不辭, 氣挫凶竪同狐狸. 騎龍歸來白雲鄕, 士林千載歆聲光. 磨礱翠琰銘幽堂, 勿剪松伯如甘棠.


泰定三年丙寅十二月 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