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최해 묘지명(崔瀣 墓誌銘)

야촌(1) 2010. 12. 25. 22:21

『가정집 제11권 / 묘지명(墓誌銘) 』 『동문선(東文選 卷124)』

 

■ 최해 묘지명(崔瀣 墓誌銘)   

     1340년(충혜왕 복위 1년)       

 

   이곡 (李穀) 찬(撰)

 

  대원 고장사랑 요양로개주판관 고려국 정순대부 검교성균관대사성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최군묘지

(大元 故將仕郞  遼陽路蓋州判官 高麗國 正順大夫 檢校成均館大司成 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 崔君墓誌)

 

황조(皇朝)의 진사(進士) 출신으로 동방에 유명한 이가 있으니, 그는 바로 계림(雞林)의 최수옹(崔壽翁)이다. 

처음에 개주 판관에 제수되었는데, 그 지역이 외지고 직무가 번잡스럽자 다섯 달 동안 있다가 병을 핑계로 동쪽으로 돌아와서는 황조에 복귀하지 않았다.

 

그리고 본국에서도 벼슬하기는 하였지만 재질이 기이하고 지조가 고상해서 시대에 용납되지 못하다가, 나이 54세인 지원(至元) 6년 경진년(1340, 충혜왕 복위 1) 6월 10일 임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지낼 날짜가 잡혔을 적에, 그의 아우인 감찰규정(監察糾正) 지(潪)가 자기가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묘지명을 청하며 말하기를 “우리 형님의 재질은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는데, 우리 형님의 뜻은 세상에 행해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끝내는 벼슬도 높이 오르지 못하고 수명도 오래 누리지 못한 채, 남에게 은택을 끼치지도 못하였으며 뒤를 이을 자식도 두지 못하였다. 그런데 또 유당(幽堂)에 명문(銘文)을 새겨서 그 행적을 기록하지도 않는다면, 이는 내가 형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 형님을 아는 이로는 그대만 한 자가 없으니, 그대가 명을 짓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내가 의리상 사양할 수 없기에, 그의 세계(世系)를 차례로 적고 그의 행실을 서술하게 되었다.

 

군의 휘는 해(瀣)요, 일자(一字)는 언명보(彦明父)이다. 원조(遠祖) 윤순(允順)은 신라에 벼슬하여 관직이 태수에 이르렀다. 

그 뒤로 대대로 계림부(雞林府)에서 살았다. 증조 휘 모(某)는 경주 사병(慶州司兵)으로 군부 판서(軍簿判書)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모는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백륜(伯倫)은 장원급제하여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으며, 고려 왕경(王京)의 유학 교수(儒學敎授)를 제수 받았다. 그 뒤로 누차 승진하여 본국의 민부 의랑(民部議郞)에 이르렀으며 품계는 중현대부(中顯大夫)이다. 

 

모친 임씨(任氏)는 진양군부인(晉陽郡夫人)에 봉해졌는데, 대호군(大護軍)으로 치사한 휘 모의 따님이다.

군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9세의 나이에 이미 시를 잘 지었으며, 장성해서는 학문이 날로 발전하여 선배들이 크게 탄복하였다.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에 두 번 사부(詞賦)로 유사(有司)의 시험에 응시하였는데, 응시할 때마다 번번이 합격하였다.

처음에 성균 학유(成均學諭)로 있다가 파직당하고 다시 예문춘추관 검열(藝文春秋館檢閱)에 뽑혔는데 뒤이어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폄직(貶職)되었다.

 

얼마 뒤에 또다시 예문춘추관 주부(藝文春秋館注簿)에 선발되었고, 주부에서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승(成均館丞), 예문 응교(藝文應敎), 전교 부령(典校副令), 전의 부령(典儀副令), 검교 대사성(檢校大司成)을 역임하였다. 군의 이력은 이와 같다.

 

군은 글을 읽고 문사를 지음에 사우(師友)와 강습하는 도움을 받지 않았으되, 초연히 의리의 귀추를 자득하여 이단에 현혹되지 않고 속습에 빠지는 일이 없이 고인(古人)의 경지와 합치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동이(同異)를 논할 적에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알면 당시에 존경을 받는 노사숙유(老師宿儒)라고 할지라도 힐난하고 절복(折伏)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확고히 견지하고 바꾸지 않았다. 군의 학문은 이와 같다.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 연간에 과거(科擧) 설행(設行)의 조서가 내렸다는 말을 듣고는, 배운 것을 시험해 보겠다고 하더니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신유년(1321, 충숙왕 8)의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송 좨주(宋祭酒)가 그의 재주를 칭찬하며 누차 시로 표현하였으므로 이로부터 더욱 이름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자기와 다른 자는 더욱 좋아하지 않고 더욱 배척하였다.

 

군은 또 높은 사람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인사드리는 일을 잘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과감하게 발언을 하였으며 남의 선악을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임용될 때마다 번번이 쫓겨나고 끝내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단정한 사람을 벗으로 취하였고, 천명을 알아 걱정이 없었으며, 벼슬하고 안 하는 것으로 희로의 감정을 보이지 않고서, 오직 시와 술로 혼자 즐길 따름이었다.

 

군은 일찍이 본국의 명현(名賢)이 지은 글들을 뽑아서 그 제목을 《동인지문(東人之文)》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25권으로 되어 있다. 군은 평생토록 집안의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고 졸옹(拙翁)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그리고 뒤에는 도성 남쪽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면서 취족(取足)이라는 농원을 마련하고는 마침내 예산 농은(猊山農隱)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죽어서도 그 산의 동쪽에 묻혔는데, 집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군을 아는 자들이 다투어 부의를 보낸 뒤에야 겨우 장례를 치를 수가 있었다. 군은 두 번 장가들었다. 전처는 검교 평리(檢校評理) 반영원(潘永源)의 딸로 1녀를 낳았는데 사인(士人) 지섭(池燮)에게 출가하였다. 후처는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 채흥(蔡興)의 딸로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아들은 없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최군이여 / 嗚呼崔君
매인 곳 없이 홀로 고상하였나니 / 不羈不群

 

그 학문은 옛사람을 사숙하고 / 私淑其學
그 문장은 옛사람을 좋아하여 / 好古而文

 

분연히 세속에 이끌리지 않았고 / 奮不牽俗
미친 척하며 과감하게 말했다네. / 陽狂敢言

 

오래 살지는 못했어도 / 雖無其年
이름을 전할 수가 있고 / 名有可傳

 

아들은 비록 없다 해도 / 雖無其子
믿을 수 있는 아우가 있다네. / 弟有可倚

 

저들은 지위요 자신은 덕이니 / 彼位我德
어느 것이 과연 득이요 실이겠나. / 孰失孰得

 

군 스스로 의심하지 않았으니 / 君自不疑
또 무엇을 서운해 하리오 / 其又奚悲

 

사자산(獅子山)의 동쪽 / 猊山之東
봉긋한 이 묘소가 / 馬鬣之封

 

멀리 천년 뒤에까지 / 千載之下
졸옹의 존재를 알려 주리라 / 知有拙翁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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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大元 故將仕郞 遼陽路蓋州判官 高麗國 正順大夫 檢校成均館大司成 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 崔君墓誌

 

李穀   撰

 

皇朝進士有名東方者。曰雞林崔壽翁。始除盖州判官。地僻職冗。居五月。移病東歸。不復于朝。雖仕本國。才奇志高。不容於時。年五十四。至元六年庚辰六月十日壬辰。以病卒。葬有日。其弟監察糾正潪。以所爲行狀來乞墓銘曰。吾兄之才不愧于古。而吾兄之志不行于世。卒至官不達齒不高。無澤以及物。無子以爲後。其又不克銘諸幽堂以列其行。則吾負吾兄矣。知吾兄莫如子。宜爲銘。糓義不可辭。廼次其世系而叙其行實焉。君諱瀣。一字彥明父。遠祖允順。仕新羅官至太守。世家雞林府。曾祖諱某。慶州司兵。贈軍簿判書。祖諱某。檢校軍器監。贈版圖判書。考諱伯倫。狀元及第。名聞于朝。授高麗王京儒學敎授。累遷本國民部議郞。階中顯大夫。妣任氏。封晉陽郡夫人。大護軍致仕諱某之女也。君幼穎悟。九歲能詩。旣長。學日進。大爲先輩所服。未及冠。再以詞賦試有司。試輒中之。初罷成均學諭。選藝文,春秋館檢閱。尋以事貶。監長沙務。旣又復選注簿藝文春秋館。由注簿拜長興庫使。遷成均館丞。藝文應敎。典校,典儀二副令。檢校大司成。君之所歷如是。君讀書爲文辭。不資師友講習。超然自得於義理之歸。不惑異端。不溺俗習。而務合於古人。至論同異。苟知其正。雖老師宿儒爲時所宗者。且詰且折。確持不變。君之所學如是。延祐科興聞詔。乃曰可試所學。旣而果中辛酉科狀元。宋祭酒稱其才。屢形於詩。自是名益著。異己者益不喜而益排之。君又不善伺候。放蕩敢言。而喜說人善惡。故輒擧輒斥。卒不大用。然取友必端。知命無憂。不以仕已喜慍。惟以詩酒自娛。常選本國名賢所著。題其目東人之文。凡二十五卷。平生不理家人生產。自號拙翁。後居城南獅子山下。開園曰取足。遂稱猊山農隱。卒葬其山之東。家甚貧。凡知君者爭致賻。乃克葬。君再取。先取檢校評理潘永源之女。生一女。適士人池爕。後取通禮門祗候蔡興之女。生二女。皆幼。無子。銘曰。

嗚呼崔君。不覊不羣。私淑其學。好古而文。奮不牽俗。陽狂敢言。雖無其年。名有可傳。雖無其子。弟有可倚。彼位我德。孰失孰得。君自不疑。其又奚悲。猊山之東。馬鬣之封。千載之下。知有拙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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