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행장.시장(謚狀)

영의정 오윤겸 선생 행장[領議政 吳允謙 先生 行狀]

야촌(1) 2009. 11. 8. 18:36

영의정 오공 윤겸(允謙)의 행장[領議政吳公允謙의行狀]

 

백호 윤휴 찬[白湖 尹鑴 撰]

 

공의 휘(諱)는 윤겸(允謙)이요 자는 여익(汝益)이며 호는 추탄(楸灘)인데 혹은 토당(土塘)이라고도 한다.

세계(世系)는 해주오씨(海州吳氏)에서 나왔다. 상세(上世)의 인유(仁裕)라는 분이 고려 때의 군기감(軍器監)으로서 시조가 되었다.

 

그 후 몇 대에 걸쳐 관작이 이어져오다가 계선(繼善)이라는 분이 북평관 제검(北評館提檢)을 지냈는데 이분이 바로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옥정(玉貞)은 사섬시 주부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 휘 경민(景閔)은 사헌부 감찰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고 휘 희문(希文)은 선공감역으로 의정에 추증되었으니, 삼대(三代)가 추은(推恩)받은 것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된 때문이었다.


의정공은 문행(文行)이 있어 과업(科業)을 닦았는데 공의 두각이 뛰어남을 보고는, 집안에 위인(偉人)이 있어 장차 가문을 창대하게 만들 것이라 여기어 마침내 과업을 포기하고 반궁(泮宮)과 가까운 마을로 옮겨가 살면서 오직 시ㆍ예(詩禮)에만 열중하였고 가까이 지내던 손들 중에는 한때의 명성 있는 사람이 많았다.

 

의정공은 음관(蔭官)에 제수되었으나 그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므로 버리고 출사하지 않았다.비(妣) 정경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의 후손으로 문천군수(文川郡守) 정수(廷秀)의 딸이며 성종 대왕(成宗大王)의 아들인 익양군(益陽君) 이회(李懷)의 외손녀이다.

 

나면서부터 현숙한 덕이 있는데다 여사(女事)를 배우고 서사(書史)에 통하여 아름답고 슬기로운 행실이 실로 여성 가운데 스승이 될 만하였다. 가정(嘉靖) 기미년 10월 12일(무진)에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외가댁에서 공을 낳았다.

 

과거에 군수공이 문천의 임지에 있을 때 의정공이 마침 그 군아(郡衙)에 우거하였는데, 정경부인이 막 임신하여 삼태성(三台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고 한 달 남짓 뒤에는 또 용(龍)과 교감하는 꿈의 상서가 있었다.

 

그래서 의정공이 공의 자(字)를 성룡(星龍)이라 하고 이르기를, “아이가 태어날 때 특이한 상서가 있었으니, 아마도 틀림없이 재상 자리에 오를 것이다.” 하였다. 공은 나면서부터 단정하고 준수하여 함부로 즐겁게 노닐지 않았고, 조용하고 한아하고 묵중하여 노성(老成)한 사람의 태도가 있었다.

 

공이 8세 때에 모부인의 병환이 위독하여 향연(香櫞)을 먹고 싶어 하자, 공이 어느 집에 그것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몸소 그 집에 가서 두 번 절하고 얻어가지고 돌아와 모부인에게 올리니, 사람들이 공이 성실하고 효성스런 성품을 지니게 된 것을 기특하게 여기었다.

 

토정(土亭)이지함(李之菡)이 어떤 사람 집에서 공을 만나서 한참 동안 눈여겨보고는 주인에게 이르기를, “어디서 이렇게 뛰어난 아이가 왔습니까? 후일에 반드시 세상에 명망 높은 순유(醇儒)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약관 시절에 성균관에서 유학하였는데 성균관 안에 윤시(輪試)로 급획(給畫)하는 규정이 있었던바, 공이 합격권에 들자 이이첨(李爾瞻)이란 자가 동문으로서 획(畫)을 탐하여 공을 약간 시기하고 미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공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 붓을 던져버리고 글을 짓지 않으니, 당시의 동료들이 모두 공에게 감복하였다.


공은 일찍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의 문하에 유학하였는데, 선생이 공을 가장 중히 여겨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모(吳某)는 말이 묵중하고 행실이 단정하여 난방(亂邦)에서도 처신할 만하다.” 하였다.

 

이로부터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실천을 더욱 독실히 하면서 《논어》와 주자(朱子)의 글에 특히 힘을 많이 썼다.

어버이의 뜻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여 임오년에 국학(國學)에 오르니, 많은 선비들이 공을 추중하였다.

 

이때 마침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자고 청하는 상소문이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문장을 잘 아는 의정 이산해(李山海)가 그 상소문을 보고는 대단히 기이하게 여기면서 그 장래가 한량할 수 없음을 감탄하였다.


기축년에는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관한 옥사가 일어났는데, 사대부 사이에 연루된 자가 많아서 선조(宣祖)가 대단히 진노하니, 중외(中外)가 모두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 이때 삼사(三司)가 교대로 소장을 올려 사련인(辭連人)들을 치죄할 것을 청하였고, 태학에서도 상소를 올리자는 의논이 있어 이춘영(李春英)ㆍ양천경(梁千頃) 등이 그 의논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국옥(鞫獄)의 사체에 대해서는 따로 조정이 알아서 할 일이요 유생들이 알 바가 아니다. 제군(諸君)들이 꼭 상소를 올리고 싶으면 의당 교화를 닦아 밝혀서 난신적자(亂臣賊子)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게 하도록 조정에 권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태학에서 모두 그렇게 여기어 사련인들을 척거(斥擧)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억울하게 죄에 걸린 사람들이 화를 면한 자가 많았다고 한다. 이 해의 전강(殿講)에서 공이 장원을 하였는데, 당시 전장(銓長) 이산해(李山海)가 공의 강석(講席)에 임하여 시험을 보이고 물러나와 감탄하기를, “지금 세상에 다시 진유(眞儒)를 보았다.” 하고는, 즉시 공을 천거하여 영릉 참봉(英陵參奉)으로 삼으니, 공이 거기에 부응했다가 오래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신묘년에는 또 봉선전 참봉(奉先殿參奉)에 제수되었는데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 왜적들이 기내(畿內)에 가득하자, 공이 진상(眞像) 및 제기(祭器)들을 땅에 묻고 그곳을 왕래하면서 살펴 보호하다가 경기 감사에게 보고하여 받들어 옮긴 사실을 계문(啓聞)한 다음에야 벼슬을 버리고 적을 피해 내포(內浦)로 들어갔다.

 

그러자 의정 정철(鄭澈)이 도체찰사로 호서(湖西)에 주재하면서 공을 불러 백의종사(白衣從事)로 삼으니, 공이 의리상 난리를 사피할 수 없다 하여 군문(軍門)에 나가 군막에 머물러 있었다.


계사년에는 전설사 별검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을미년에는 익위사 시직에 제배되었다가 이윽고 부솔ㆍ위솔에 승진되었다. 당시는 국가가 막 난리를 겪은 터라 자목(字牧)을 더욱 중히 여겨 수령직을 감당할 만한 인재를 간선한 결과, 공과 당시의 명류인 한백겸(韓伯謙)ㆍ윤영현(尹英賢) 등 몇 사람이 차례를 밟지 않고 발탁 임용되는 대열에 끼게 되었다.

 

공은 평강 현감(平康縣監)에 제배되어 산골 백성들을 크게 교화시키고, 봉소(封疏)를 올려 폐단을 제거하고 성심으로 공무를 수행하여 방백의 포문(褒聞)을 받았다. 정유년 봄에 별시(別試)가 있었는데, 공은 과업(科業)을 그만둔 지 이미 오래였으나, 의정공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여 병과(丙科) 제일명(第一名)으로 뽑혔다.

 

난리 뒤에는 조정에서 각도의 순찰사로 하여금 종사관을 직접 뽑아 쓰게 하였으므로 본도의 방백이 계청(啓請)하여 공을 종사관으로 삼았는데, 수령으로 종사관을 겸한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이윽고 한강(寒岡)정구(鄭逑)가 본도의 방백이 되어 잡다한 관청 사무로 인해서 간혹 불평스러운 뜻이 있었는데, 하루는 공을 만나보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모(吳某)는 옥과 같이 온화하여 참다운 군자였는데 내가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고는 공을 매우 예우하고 공경하였고, 매양 공과 함께 학문을 논할 적마다 탄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경자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니, 평강의 백성들이 철비(鐵碑)를 세워 떠나간 공을 사모하였다. 얼마 뒤 시강원 문학에 제배되었다. 신축년에는 홍문관 부수찬에 제배되었는데, 상국 이덕형(李德馨)이 도체찰사가 되어 남쪽으로 내려가서 공을 종사관으로 불렀다.

 

그리하여 공이 하직인사를 올리던 날에 선조(宣祖)가 특별히 한 통의 봉서(封書)를 내려 암행어사의 일까지 겸찰(兼察)해서 주사(舟師)를 순검(巡檢)하도록 하였다. 그 후 시강원 사서에 옮겨 제배되었다. 조정에 돌아와서는 또 수찬에 제배되었다가 이내 이조 좌랑에 제배되었다.

 

이때 전형을 주관하는 자가 자기 아들을 대사성에 의망하려 하였으나 공이 붓을 잡고서 거기에 응하지 않아 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어 성균관 전적에 체배(遞拜)되고, 다시 수찬에 제배되어 지제교로 뽑히었다가 이윽고 홍문관 부교리에 승진되었는데, 이때 조사(詔使) 고천준(顧天峻)이 옴으로 인해 문례관(問禮官)에 충원되어 관서(關西)로 갔다.


임인년 3월에 복명하였다. 선조가 그때 막 《주역》을 강하고 있었는데, 공이 경연에 들어가니 자못 강신(講臣)의 풍도가 있었다. 당시 우계 선생(牛溪先生)이 남의 무함을 입어 조정의 의논이 요동하므로, 공은 스스로 선생의 문인이라는 이유로써 상소를 올리고 스스로 해면하여 성균관 직강에 체배되었다.

 

그 후 공과 당시의 동료들이 많이 배척되고, 공 또한 동지사(冬至使)서장관(書狀官)에 차임되어 장차 연경(燕京)으로 가려고 하는데, 미처 떠나기 전에 특명으로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옮겨 제수되었다. 경성부는 북관(北關)의 군영이 있는 곳으로 병사(兵使)의 위압을 받아 재정이 고갈되고 백성이 곤궁하였었다.

 

공이 그곳에 부임하여 쇠잔한 것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제거하니, 정사가 진흥되고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계림군(雞林君) 이수일(李守一)이 당시 병사로 있었는데, 전 통판(通判)이 문사(文士)로서 스스로 교만하고 귀한 체하고 절도사를 추속한 사람으로 멸시하였기 때문에 이공이 그를 매우 싫어했었다.

 

그런데 공이 통판으로 가서는 겸손하게 몸을 굽히고 절도사를 깍듯이 섬기니, 이공이 크게 탄복하여 성심으로 대우하고 관하의 편비(褊裨)들을 더욱 단속하여 감히 폐해를 끼치지 않게 함으로써 본부가 화평하게 잘 다스려졌다.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은 불법적인 일을 많이 자행하여 포학함이 백성들에게 미치었다. 한번은 궁노(宮奴)가 부(府)의 경내에 들어와서 과녀(寡女)를 때려 상해를 입히자, 공이 그 궁노를 체포해다가 형장을 쳐서 죽이니, 읍민들은 통쾌하다고 일컬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매우 위태롭게 여기었다.

 

그런데 암행어사ㆍ재상어사ㆍ관찰사ㆍ순안어사가 모두 공의 치적을 제일로 쳐서 계문하니,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승서(陞叙)하라는 명이 있었다. 갑진년 10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체직되어 돌아오니, 백성들이 또 동비(銅碑)를 세워 공을 사모하였다.

 

을사년에 선부인(先夫人)을 광주(廣州)에 장사지내고는 묘 밑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치는 동안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몸이 야위어서 거의 일어나지 못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정미년 2월에 복을 마치고, 전적을 거쳐 사예에 올랐다가 대신의 천거로 인하여 안주 목사(安州牧使)에 보임되었다.


본주(本州)에 그때 마침 성(城)을 수축하다가 갑자기 중지하자는 의논이 있자, 공이 관찰사에게 편지를 보내 반드시 수축해야 한다고 논하니, 관찰사가 공에게 감동(監董)을 맡기었다. 공이 역사(役使)하는 데에 요령이 있게 하여 백성들이 수고로움도 모르는 가운데 몇 개월 만에 공사를 완료하니, 선조(宣祖)가 가상히 여겨 특별히 표리를 하사하였고, 순안어사 또한 공의 치적을 제일로 쳐서 계문하였다.


무신년에는 선조가 승하하고 세자가 즉위하여 교서(敎書)가 본주에 도착하자, 공은 교서를 먼저 봉심한 다음에야 총총걸음으로 뜨락에 내려가 숙례(肅禮)를 거행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당시의 국사가 불안한데다 조정과 거리가 워낙 멀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요동(遼東)의 차관(差官)이 조문차 나왔는데, 연로(沿路)의 다른 수령들은 모두 길복(吉服)으로 그를 맞이했으나 본주에 이르자 공이 최복(衰服) 차림으로 나가 맞이하니, 차관이 그것을 보고는 크게 노하여 다연(茶燕)도 받지 않고 예단(禮單)을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이민(吏民)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공에게 최복을 벗기를 권유하니, 공이 말하기를, “상복은 빼앗을 수 없다.

차관은 조사(詔使)와는 다르거니와, 더구나 조정의 지시도 없는 터이니, 일시적인 차관의 노여움 때문에 스스로 예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수 없다.” 하고, 끝내 고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연로의 수령들은 공과 같이 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었고, 조정에서는 그 사실을 듣고 열읍(列邑)에 공문을 보내서 안주 목사를 법받도록 지시하였으며, 차관 또한 떠날 때에 공에게 사과하였다.

 

7월에는 어버이 나이가 70이 되었다는 이유로 사체(辭遞)하여 돌아가니, 그곳 백성들이 또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공을 사모하였다. 이때 북도 지방의 공사천(公私賤)들이 불법으로 이리저리 옮겨 다녀 열읍이 텅 비게 되고 보장(保障)이 허술하게 되자,

 

상국 이항복(李恒福)이 남의 말을 기피하지 않는 공정한 사람을 가려 보내서 순안어사로 삼아야 한다고 건의하였는데, 마침 북도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공평하고 청렴하고 바르기가 오모(吳某)만한 사람이 없다고 일컬었으므로, 비국에서 공을 천거하여 어사로 삼았다.

 

이미 명을 받고 나서는 가내(家內)에 있는 북노(北奴) 몇 사람을 쫓아보내서 그 지역으로 돌려보낸 다음에야 비로소 출발하였다. 공은 열읍을 순찰하면서 판적(版籍)을 조사하고 부오(部伍)를 편성하며, 군기(軍器)를 점고하고 관리의 근만(勤慢)을 살피며, 폐막(弊瘼)을 물어 제거해서 순안(巡按)의 일을 말끔하게 다스리었다.

 

공이 경성(鏡城)에 이르렀을 적에는 어린아이로부터 백발의 노인들까지 공의 옛 덕을 사모하여 경상(境上)까지 나와서 맞이한 자가 줄을 이었고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기유년 봄에 일을 마치고 조정에 돌아와서는 사도시 정에 제배되었다가 통례원 좌통례에 옮겨 제배되었다.

 

이때 왜인(倭人)에게서 위언(違言)이 있어 조정에서 그것을 매우 걱정하였는데,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실로 남쪽의 일을 관장하는바, 그 적임자를 얻기가 어려웠다. 전조(銓曹)에서 어떤 사람을 천주(薦注)하자, 광해군이 그 의망을 되돌려 보내면서 이르기를, “동래는 국가의 문호이므로 적임자를 얻지 않아서는 안 되니, 나의 뜻은 좌통례 오모(吳某)를 그곳에 보내고 싶다.” 하고, 인하여 특명으로 공을 동래 부사로 뛰어올려 제배하였다.

 

공은 그곳에 부임하여 민이(民夷)를 어루만져 접대하여 은혜와 신의가 크게 행해졌고 도내(道內)에서 왜인에게 공납하는 잡물(雜物) 절반을 견감하여 쓰는 데에 또한 여유가 있어 이것을 모조리 행상(行商)의 지세(地稅)에 부쳤으며, 변장(邊將)에게는 오로지 주사(舟師)만을 다스리도록 하니, 온 부민(府民)이 공을 사랑하고 떠받들어 칭송의 소리가 영외(嶺外)에 비등하였고, 관(館)에 온 왜인 또한 공을 마치 신명처럼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경술년에는 의정공의 나이가 더욱 연로해지매 공이 상소하여 귀양(歸養)할 것을 간절히 요청하였는데, 해조에서 변방의 수령은 이동시킬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하였으나, 광해군은 공의 진정표(陳情表) 내용이 몹시 처절함에 감동하여 즉시 체직을 허락하였다. 그러자 부민들이 비석을 세워 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12월에는 호조 참의 겸 지제교에 제배되었다. 당시 조정의 의논이 공에게 삼사(三司)의 장관을 시켜야 한다고 하여 누차 대사간과 부제학에 의망하였으니, 이때 이이첨 등이 막 권력을 쥐고 용사를 하였으나, 공론은 속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신해년에는 승정원동부승지에 제배되었다. 공이 선사(先師) 성우계가 방금 죄적(罪籍)에 있는 것 때문에 상소를 올려 사직하여 말하기를, “사우(師友)는 취상(趣尙)이 서로 관계되는 바입니다. 그런데 신은 선사 성모(成某)에 대하여 애모하고 존경하는 정성과 원통하고 절박한 심정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으니, 신의 추향을 대강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죄적에 든 사람의 문인으로서 어찌 근밀한 자리에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듣지 않고 우부승지에 승진시켰다가, 같은 날 정사에서 광해군이 특명으로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하였다. 그러자 대신 이덕형이 공을 외직에 보임시켜서는 안 된다 하여 먼저의 직임으로 환원시킬 것을 계청함으로써 이윽고 좌부승지에 승진되었다.

 

이에 앞서 처사(處士)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제(門弟)가 회재(晦齋)ㆍ퇴계(退溪)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의논에 반대해 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남명의 문인인 정인홍(鄭仁弘)이 차자를 올려 회재ㆍ퇴계를 배척하면서 대단히 막된 말로 욕설을 가하였으므로, 태학생들이 상소하여 변론하고 인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해버렸다.

 

그러자 광해군이 대노하여 그 일을 처음 제기한 유생을 적출해내서 그를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여 금고(禁錮)시키니, 태학생들이 일제히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렸다. 그러자 광해군은 또 하교하여 성균관의 관원으로 하여금 성묘(聖廟)를 지키게 하였다.

 

이때 공은 승정원에 있으면서 전교를 봉환(封還)하면 광해군이 비답을 내리곤 한 것이 두세 차례에 이르렀다. 공이 또 우부승지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진계(陳啓)하여 정인홍이 선유를 헐뜯어 욕한 죄를 논하고, 또 광해군의 호오(好惡)를 밝게 분변하지 못한 과실을 말하니, 광해군이 답하기를, “사람마다 각각 소견이 다르므로 이를 강제로 몰아쳐서 소견을 같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그 차자가 아직 내려가기도 전에 정원에서 아뢰는 것은 너무 이르지 않은가.”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즉시 사체되고 호군에 부쳐져서 선혜청 제조를 겸임하였는데, 부정(賦政)을 균평하게 다스림으로 인하여 경기 백성들이 이에 힘입었다. 10월에는 특지로 강원도 관찰사에 제배되었다.


임자년 봄에는 영동ㆍ영서 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공이 이 지방을 순선(巡宣)하면서 진구하니 백성들이 소생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하고 공안(貢案)을 정하였으며, 노산군(魯山君)의 묘를 수개(修改)하고 제식(祭式)을 정하였으며, 유생(儒生)들을 예우하고 무사(武事)를 다스리고 탐학한 관리를 쫓아내니, 일로(一路)가 말끔하여졌다. 순찰차 삼척(三陟)에 이르러서는 소공대(召公臺)에 올라 시를 읊었다. 그 시(詩)에,

 

경치는 때에 따라 좋거니와 / 景物隨時好

민생은 가는 곳마다 슬프기만 한데 / 民生到處哀

남국에 성왕의 교화 펴지도 못하고 / 未宣南國化

부질없이 소공대에 올랐네그려 / 空上召公臺

라고 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이 공에게 백성을 다스릴 뜻이 있음을 알았다.

12월에 체직되어 첨지중추부사에 부쳐졌다.


계축년에는 강도 박응서(朴應犀)라는 자가 이이첨 등의 사주를 받아 옥중(獄中)에서 상변(上變)하여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을 무고함으로써 당시의 제우(儕友)와 명류(名流)들이 대부분 사련인(辭連人)으로 체포되었으나 공만 유독 거기에 끼이지 않았으니, 그것은 대체로 공이 난세에 처신하는 데 방도가 있어 남들이 지적하여 말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2월에는 광주 목사(廣州牧使)에 제배되었으니, 어버이 봉양하기에 편리함을 취한 것이다.

이해 12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면서 예를 극진히 하였다.


병진년 2월에는 삼년상을 마치고 군직(軍職)에 부쳐졌다. 6월에는 분승지(分承旨)에 제배되었는데, 이때는 광해군이 모후(母后)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킨 지 벌써 3년째였다. 공이 분원(分院)에 들어가보니,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으며, 문의 안팎에는 분예(糞穢)가 쌓여 있었다.

 

공이 그것을 보고 가슴 아프게 여겨 즉시 입직하는 군사들을 시켜 깨끗이 소제하게 하니, 그 사실을 듣는 이들이 공을 훌륭하게 여겼다. 정사년 정월에는 일본(日本)에 가는 회답상사(回答上使)에 차임되었다.

 

5월에 조정을 하직하고 7월에 바다를 건넜는데, 경유하는 곳마다 왜인들이 모두 공에게 공경을 다하였다.

관백(關白)은 심지어 맨발에 칼을 풀어서 성례(誠禮)를 보이기까지 하였고, 국서(國書)의 내용도 더욱 경건하였다.

 

공은 그곳에서 임진ㆍ정묘년에 포로가 된 사람들을 찾아서 15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공이 돌아올 적에는 관공(館供)의 남은 저축만 표하여 두고, 기타 폐백으로 준 금은 보화들은 모조리 대마도(對馬島)에 맡겨버렸다. 12월에 복명하니, 노고를 치하하는 뜻으로 가선(嘉善)의 품계를 제수하였다.


그 이듬해에 대마도주(對馬島主)가 공이 맡겨둔 금은 보화를 동래(東萊)로 보내와서 사신(使臣)에게 전하기를 청하여, 동래 부사가 이 사실을 계문하니, 광해군이 명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궁궐의 역사에 쓰도록 하였다.

 

역관(譯官)이 그것을 취하러 가면서 공에게 와서 그들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겠느냐고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다만 사신이 받는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그 후에 왜차(倭差)가 부산(釜山)에 이르러 선위사(宣慰使)에게 묻기를, “조선에는 오모와 같은 현대부(賢大夫)가 몇이나 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오모 같은 사람이 매우 많다.” 고 하니, 왜차가 웃으며 말하기를, “조선에 인재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오모 같은 사람은 반드시 한 사람뿐일 것이다.” 하였다.


이때 폐모론(廢母論)이 나오게 되자, 공은 환조(還朝)한 이후로 인사(人事)를 사피하고 조청(朝請)을 단절하였다. 하루는 광해군이 폐모하기를 요청한 자의 상소를 정부에 내리면서 회계(回啓)하도록 하니,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맨먼저 차자를 올려 불가함을 논하고, 백관을 모아 조당(朝堂)에 나가서 정의(廷議)를 수합하였는데, 공은 병 때문에 그 자리에 나가지 못했다.

 

이 일로 고상(故相) 이항복(李恒福) 및 이신의(李愼儀)ㆍ정홍익(鄭弘翼)ㆍ김덕함(金德諴) 등은 이론(異論)을 세운다는 이유로 변방에 찬축되었고, 대사간 윤인(尹訒) 등은 폐모론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장차 의논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대죄(大罪)를 가하려는 기세였기에 온 조정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되겠느냐고 공에게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자식이 어머니를 원수로 대할 의리는 없는 것이요,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는 것이니, 이 이치는 매우 분명하여 알기가 어렵지 않다. 우리들이 평소에 글을 읽은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한 것이었다.” 하였다.

 

이때 유생 김창(金昶)이 상소하여 공과 김상용(金尙容)ㆍ이정귀(李廷龜)ㆍ김권(金權)이 헌의(獻議)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의당 주찬(誅竄)의 형벌을 가해야 한다고 논하니, 광해군이 병으로 조당(朝堂)에 나가지 못한 자들은 집에서 헌의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헌의하기를, “오늘날의 변고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는 그 도리를 다한 다음에야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옛 성인이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다했던 것을 취하여 법으로 삼아서 성효(聖孝)가 더욱 성대하고 성덕(聖德)이 더욱 융성해지도록 하소서.” 하였다.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廷請)을 하였는데, 공이 또 여기에 나가지 않자, 대간이 공을 멀리 유찬시킬 것으로 논하니, 광해군이 비답하기를, “수의(收議)하는 데서 이론을 세운 사람들을 정청에 불참한 반열로 강등시켜 논하였으니, 혹 기리(奇李)의 화액이 편중되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지금의 대간은 권도가 있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태롭게 여기었다. 그런데 마침 척리인(戚里人)도 아울러 그 논계한 가운데 들었으므로, 광해군이 그를 죄주지 않으려고 하여 매양 서서히 발락(發落)할 것이라고 비답하였다. 그래서 공은 성문 밖에서 몇 개월 동안 명을 기다렸으나 죄는 입지 않게 되었다.


공은 이로부터 광주(廣州)의 토당리(土塘里)로 내려가서 여러 자제들과 함께 살면서 즐거워하였고, 《주역》을 즐겨 읽으면서 아무런 기미도 안색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신유년에 경상 감사가 왜정(倭情)이 전과 달라져서 사변이 일어날까 염려하는 뜻으로 보고해오자,

 

광해군이 명하여 문무신 가운데 장수에 가합한 자를 가리게 하니, 비변사가 아뢰기를, “오모는 일찍이 동래 부사를 역임하였고, 또 사명을 받들고 일본을 왕래하면서 매우 왜인들의 심복을 받았으니, 만일 이 사람을 쓴다면 수만의 갑병(甲兵)보다 나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계(啓)가 들어가자, 궁중에 머물러두고 내리지 않았으니, 그것은 대체로 공이 수의할 적에 이론을 세웠던 것을 원망스럽게 여긴 때문이었다.

 

임술년에는 등극진하사(登極進賀使)에 충원되었다. 이때 신종황제(神宗皇帝)와 장종황제(章宗皇帝)가 연이어 붕어하고 광종황제(光宗皇帝)가 즉위하였으므로, 본조(本朝)에서는 의당 진하(進賀)를 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요동(遼東) 길은 이미 막혀버려서, 사신가는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산동성(山東省)으로 가다가 연이어 배가 침몰하는 변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명을 받은 자는 심지어 궁중을 통해서 사명을 면하려고 꾀하기까지 함으로써 오래도록 사신을 파견하지 못하다가 3월에야 이 명이 있었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오모에 대하여 정론(停論)할 일로 대간에 말하라.” 하였다.

 

이어 양사가 정론하자, 공을 군직(軍職)에 부쳐 환조(還朝)하도록 하였다. 공은 명을 듣고 행장을 꾸려서 그날로 부명(赴命)하면서 신공 응구(申公應榘)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군부(君父)의 명이면 끓는 물이나 불 속에라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험난한 바다를 건너는 일 정도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내 나이 70이 가까워서 세상 사는 것도 이미 지루한 실정이니, 집에서 그냥 죽기보다는 차라리 나라의 일에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하였다. 신공은 그 편지를 보고 탄식하며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이 늙은이의 충의(忠義)는 신명께 질정할 만하다.” 하였다.


공은 의정(議政)의 관함을 가지고 길을 출발하였다.

4월에 배를 탔는데, 그때에 지은 시에,

곧바로는 교룡의 굴 위를 떠가면서 / 直泛蛟龍窟

곁으로는 시호의 놀이터를 보노라 / 旁看豺虎場

탄탄한 평지처럼 향해 가노니 / 坦然平地去

이제야 심장이 좋은 걸 믿겠네 / 方信好心腸
라 하였다.

 

5월에 바다를 다 건너 경사(京師)에 도달했는데, 이때는 공사(貢使)가 오랫동안 두절된 터였기에 연로의 아문(衙門)에서 공이 오는 것을 보고는 성대한 예와 풍요한 잔치로 공을 접대하였으며 결채(結綵)를 해놓고 공을 맞이하는 데도 있었다.

 

황도(皇都)에 이르자 관례대로 광록시(光祿寺)의 잔치를 내리니, 공은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하기를,

“천하가 간위(艱危)함에 따라 소방(小邦)은 몹시 걱정하면서,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의리상 죽어야 하기에 감히 평상시의 성전(盛典)을 향유할 수 없다.” 하여 사양하였다.


공이 노역(勞役) 끝에 병이 나서 거의 나을 수 없을 지경이 되자, 태의(太醫)가 계속해서 약을 보내오고 병랑(兵郞)이 누차 왔으며, 예부에서는 특별히 아뢰어 해랑(該郞)을 시켜 관소(館所)로 칙서(勅書)를 주고 표리(表裏) 네 벌을 하사하여 포장하였으니, 이는 모두 전에 없던 일이었다.

 

중국 사람이 공의 의표(儀表)가 남다름을 보고는 역관에게 묻기를, “이 사람이 바로 너희 나라의 당로(當路)한 재상인가?” 하므로, 그렇다고 대답하자, 중국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전야에 폐해졌다가 기용된 사람인 것 같다.

 

어찌 오늘날 너희 나라의 요직을 담당하여 집권한 재상이겠는가.” 하였으니, 대체로 중국 조정에서 이미 우리나라 조정이 혼탁하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8월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석성도(石城島)에 이르러 큰 바람을 만나 배의 키가 부러지고 돛이 찢기자 공은 조용하게 공복(公服)을 갖춰 입고 황제의 칙서를 품속에 넣고서 단정히 앉아 붓을 가져다가 선창(船窓)에 글을 썼으니, “한번의 죽음은 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니, 여기에 이르러 무엇을 의심하리오.”라는 말이었다.

 

이윽고 바람이 진정되어 아무 일도 없었다. 10월에 선사포(宣沙浦)에 회박(回泊)하여 칙서를 받들고 환도(還都)하였는데, 연서역(延曙驛)에 이르러 날짜가 불길한 까닭으로 칙서의 반포가 몇 개월 지연되었다. 광해군은 특별히 공을 의정부우참찬에 제배하였다.

 

이때 이공 현영(李公顯英)이 절사(節使)로 연경을 가면서 즉시 출발하게 되었는데, 광해군이 하교하기를, “이 사람 또한 평탄하고 험난함을 기피하지 않으니, 이 한 가지 절조는 오모(吳某)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으니, 남들로부터 흠모를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그 후 광해군의 정사는 더욱 어지러워져서 모후(母后)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계해년 봄에 상(上)이 의병을 일으켜 반정(反正)하고는 제일 먼저 공을 사헌부대사헌으로 삼으니, 공이 명을 받들고 대궐에 나아갔다.

 

이때는 개기(改紀)의 초기여서 광해군 때의 정신(廷臣)들 가운데 죄가 있는 자들에 대한 처벌을 대대적으로 논의하였는데, 공은 의논을 가짐이 화평하여 힘써 용서해주는 쪽을 따랐으므로, 비록 죄를 입은 자라도 공에게 복종하였다.

 

이때 의병을 일으킨 공신(功臣)들이 공로를 믿고 교만 방자하였는데, 이이첨의 아들 대엽(大燁)은 바로 공신인 신경진(申景禛)의 매부(妹夫)였으므로, 막 의병을 일으킬 적에 신경진 및 그의 아우 경인(景䄄)이 여러 대장들과 함께 대엽을 감사(減死)로 처리해주자고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이미 이첨에게 정형(正刑 사형)을 내린 터라 대엽에게도 사형으로 논하게 되었다.

 

그러자 신경인이 분노하여 빈청으로 들어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 대장들에게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로 질책하면서 음성과 기색이 매우 패려궂었다. 이때 제공들은 서로 말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공이 얼굴에 노기를 띠고 말하기를, “오늘의 공회(公會)는 막중한 죄명을 결단하는 자리인데, 신경인이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는, 마당에 있는 군족을 호령하여 그를 끌어내도록 하니, 상하가 숙연해졌었다.

 

3월에는 동지춘추관사ㆍ상의원 제조를 겸하였다. 4월에는 병으로 휴가를 내서 집에 있었는데, 이때 조정에서 박동량(朴東亮)의 일을 논하였다. 이에 앞서 연흥부원군이 죄를 얻음으로 인하여 박동량 또한 체포되자 그가 유릉(裕陵 선조비(宣祖妃) 의인왕후의 능)에 대한 저주사건을 발설하여 스스로 변명함으로써 당시 용사하는 자가 연흥부원군의 죄안(罪案)을 더욱 얽을 수 있게끔 만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상이 그의 행위에 노하여 그를 법으로 처단하려고 하자, 조정의 의논이 그를 구하려는 쪽이 많았고, 헌부에서도 그의 죄를 가벼운 쪽으로 논하니, 상이 조정의 신하들이 박동량을 편드는가 의심하여 지평 조정호(趙廷虎) 등을 특별히 체직하고 이어 엄지(嚴旨)가 있었다.

 

그러자 공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고, 또 말하기를, “신이 박동량에 대해서 비호하는 데에 마음을 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친구라서 그의 본심을 알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분개하고 미워했던 마음이 점점 풀려서 죄를 용서하자는 논의가 마침내 우세해진 것입니다.” 하고, 마침내 죄를 결단하는 데에 경중을 잃었다는 것으로 자신의 허물을 탄핵하였다.

 

이렇게 세 번이나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받지 못했고, 출사(出仕)한 다음 피혐하여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는 것도 윤허받지 못하다가, 이윽고 인혐(引嫌)을 처치함에 따라 체직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정사에서 상이 특별히 다시 공을 대사헌으로 임명하였다.


이 달에 공이 정승에 의망되었으니, 이에 앞서 상국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에 돌아와 입대해서 공과 신공 흠(申公欽)을 천거하여 상에게 국정을 그들에게 위임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조정의 의논이 공을 주의한 때문이었다.

 

얼마 후 동지경연ㆍ활인서 제조를 겸하였다. 이때 원자(元子)가 12세였으므로, 상이 명하여 원자 보양관을 선발하였는데, 공과 이공 정귀(李公廷龜)ㆍ정공 엽(鄭公曄)ㆍ정공 경세(鄭公經世)ㆍ김공 장생(金公長生)이 여기에 함께 참여하였다.

 

5월에는 폐세자(廢世子)가 울 밖으로 뛰쳐나간 사실이 보고되자, 자전(慈殿)이 묘당에 봉서(封書)를 내림으로써 대신이 이로 인해 대의(大義)로 결단하기를 청하였고, 공 또한 헌부의 관원으로서 그 일을 논하였다.

 

그런데 마침 정공 온(鄭公蘊)이 대사간으로 서울에 들어와서 아뢰기를, “신이 처음에는 질(祬 광해군의 아들 즉 폐세자의 이름)을 죄주어야 한다고 여겼으나, 이윽고 크게 회오하였사오니, 신은 감히 자신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지 못하겠습니다.…… ”

 

하였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크게 경악하였다. 그런데 공만이 유독 인피하여 말하기를, “신이 어제 아뢴 말씀은 하마터면 성덕을 그르칠 뻔하였습니다. 신이 만일 미혹됨을 고집한다면 이는 바로 정온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하니, 듣는 이가 몹시 두렵게 여기었다. 이때 여러 훈신(勳臣)들이 의논하기를, “오모가 헌부에 있는 사람이고 보면, 이 의논을 할 수가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지평 심기원(沈器遠) 등이 양사를 아울러 체직할 것을 발론함으로써 공이 이로 인해 우참찬 겸 지의금부사에 체배되었다. 공은 매양 경석(經席)을 출입하면서 임금을 성의껏 계도하는 데에 전심하여 항상, “학문에 힘을 다하여 본원(本原)을 잘 닦아야 한다.”는 것으로 말하였는데, 상은 언제나 마음을 비우고 그런 말을 경청하면서 공을 은총으로 대우하는 것이 더욱 융숭하였다.


8월에는 이조 판서에 제배되어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공은 인사권을 잡은 이후로 당시 지명 있는 선비들을 선발하여 모두 조정에 들어서게 하니, 사람들이 인재를 얻었다고 칭도하였다. 10월에는 역적을 국문한 공로로 정헌(正憲)의 품계가 더해졌다.


갑자년 정월에는 이괄(李适)이 모반하여 군대를 일으켜 경도에 핍박해오자 2월에 상이 남쪽으로 몽진하게 되어 공이 상을 호종하였다. 적이 평정되자 3월에 어가를 호종하고 환도하여 숭정(崇政)의 품계가 더해졌다.

 

이때 상이 호종했던 여러 신하들에게 녹훈(錄勳)을 하려고 하자, 공이 논하기를, “공주(公州)는 멀지 않은 지역으로서 신자(臣子)들의 열흘 내지 한 달 정도의 노고에 불과할 뿐인데, 무슨 녹훈할 만한 공이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신의 생각에는 관방(官方)이 이로 인해서 효란해질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처음 대가가 도성을 떠난 뒤에 전우(殿宇)가 불타버렸으므로, 상이 환도한 후에는 경덕궁(慶德宮)으로 옮겨 거처하였는데, 경덕궁은 바로 광해군이 건축한 것이었다. 공이 입시하여 말하기를, “이 궁전은 너무 호화스러우니 흥왕(興王)으로서 할 바가 아닙니다. 바라건대 상께서는 이곳을 편안하게 여기지 마시고 항상 동우(棟宇)를 쳐다보면서 감계(鑑戒)의 터전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이 달에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가 사체되었다.


7월에는 세 차례나 이조 판서의 사직을 고하고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1월에는 병으로 휴가를 청하였고, 을축년 정월에 사체되어 지돈녕부사 겸 우빈객에 제배되었다가 이윽고 형조 판서에 제배되었다. 왕세자가 관례(冠禮)를 행하자 공이 보양관으로서 숭록(崇祿)의 품계가 더해졌다. 4월에는 형조 판서를 사체하고 서반직으로 보내졌다.


5월에는 예조 판서에 제배되었다. 6월에 조사(詔使) 왕민정(汪敏政)ㆍ호량보(胡良輔)가 봉책(封策)을 올릴 일로 왔다. 그런데 이때는 혼조(昏朝)를 이어 전장(典章)이 괴란된 때였는데 공이 종백(宗伯)의 직임을 맡아 구의(舊儀)를 수습하여 직무를 말끔히 다스리고, 정공 경세(鄭公經世)와 함께 좌우의 찬례(贊禮)가 되어 성궁(聖躬)을 보도하여 실례가 없도록 하였다.


7월에는 이조 판서에 제배되었다. 공은 이미 두 차례나 전형(銓衡)을 맡았었으므로,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현재 훌륭한 인재를 수용하지 못하고 용렬한 사람을 물리치지 못하며 청탁을 떨쳐버리지 못하여 국사가 날로 그르쳐지고 있습니다.

 

이에 신은 속으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고 밖으로는 남들의 비난이 쌓이는 형편이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는 것은 사리가 매우 분명합니다. 시험해보기 전이라면 혹 시험해볼 수도 있겠거니와, 이미 시험해보아서 이미 일을 그르쳤는데 어찌하여 재차 일을 그르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에서 진술한 세 가지 폐단은 경이 실로 잘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니, 속히 나와서 공무를 집행하라.” 하였다.

 

마침 도목대정(都目大政)을 당하여 공은 개연히 사로(仕路)를 맑히고 청탁을 두절시키고자 하여 좌우의 요관들에게 의논하기를, “모든 직사가 잘 다스려지고 수령들도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오로지 초사자(初仕者)를 잘 선택하는 데에 있으니, 의당 각각 명망 있는 사람을 천거하여 등용해야 한다.”하고, 이에 공좌(公坐)에 모여 각각 당시의 명망 있는 선비들을 천거하게 해서 그 명단을 기록해 두고는 정사 때마다 살펴 의망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낙점을 받고 나면 다시 그 나머지 의망자는 다른 데에 또 의망하여 자리가 비는 대로 의망해서 모조리 다 등용하고야 마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으므로, 승전(承傳)에 의한 용관(冗官)이나 잡류(雜類)들은 대부분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승전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엄한 비답을 내려, 당상은 추고하고 낭관은 잡아다 추문하라는 명이 있었다. 그러자 공이 마침내 세 차례나 사직소를 올려서 서추(西樞)에 체배되고 겸직은 전과 같았다.

 

이 뒤로 참찬, 병조ㆍ예조의 판서에 계속 의망되었으나 낙점을 받지 않았고, 병으로 두 차례나 차자를 올려 경연ㆍ빈객 등의 겸직을 체직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병인년 8월에는 선묘(先墓)에 가토(加土)할 일로 말미를 받아 광주(廣州)로 내려가 있다가 동지춘추관사에 제배되자,

 

연이어 소장을 올려 체직을 요청한 결과 경연관만 체직되었다. 공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이가 일흔이 가까워서 근력이 쇠해지면 벼슬을 그만두는 것이 바로 옛사람의 일이다.”

하고, 이 기회에 그대로 노년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10월에 의정부 우의정에 제배되자, 공이 상소하여 사양하니,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서 타이르기를,

“경의 학식과 재덕은 뭇사람이 함께 추중하는 바이고, 재상을 선발하는 과정에서도 남보다 선두에 있었으니, 이 어려운 시기를 구제하려면 경을 놔두고 누구를 쓰겠는가. 지금 이 직임을 제수하는 것은 실로 여망(輿望)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그 후 두 번 세 번 차자를 올렸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고 계속 사관을 보내 타이르므로, 공이 지우(知遇)에 감동하여 조정에 들어와서 또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해에 왕자(王子) 공(珙)의 모친 병세가 위독하므로, 상이 그를 측은하게 여겨 공을 석방할 뜻을 가지고 의논을 내렸다. 이때 국론이 한창 치열하였는데, 공이 의논드리기를,

“성교(聖敎)가 지성스럽고 간측하시니 그 누가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공이 귀양살이한 지가 지금 벌써 2년이 되어 국법이 거행되고 공론이 펴졌으니, 이 기회에 그를 석방해서 그 모자(母子)로 하여금 생전에 서로 만나보도록 하신다면 공의(公義)와 사은(私恩)이 둘 다 온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정묘년 정월에는 오랑캐가 의주(義州)를 함락시켜 서로(西路)가 대단히 경동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강도(江都)로 들어가 보호하기로 계획을 정하고, 상이 공에게 명하여 자전과 중전을 모시고 먼저 가도록 하였다.

 

그 후 상이 도중(島中)에 들어가자 적(賊)이 승승장구하여 평산(平山)까지 와서 사신을 보내 강화(講和)를 요청하고, 또 아군의 항복한 장수 강홍립(姜弘立)ㆍ박난영(朴蘭英) 등을 보내 우리에게 천조(天朝)를 거절하고 천조의 연호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을 강요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자, 강홍립 등이 연호를 버리지 않으면 강화를 이룰 수 없다면서, 국서(國書)를 게첩(揭帖)의 규정에 의거해서 연호를 쓰지 말자고 요청하였다. 상이 이 일을 대신에게 물으니, 공이 입대하여 그 불가함을 극력 진술하기를,

“만일 조정에서 이 오랑캐를 비천하게 취급해서 게첩으로 대한다면 괜찮겠지만, 지금 강화의 일을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해서 구차하게 그들의 요청을 따른다면 이는 심술(心術)에 관계됩니다.

 

더구나 적이 제 소굴로 돌아가서는 반드시 이것을 천하에 과시하면서, ‘이것은 조선의 국서인데 천계 연호를 삭제해버렸다.’고 말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장차 어떻게 우리 입장을 변명하겠습니까.”

하고, 굳이 쟁론하여 그 의논이 행해지지 못했다.

 

호차(胡差)는 또 상에게 적과 함께 삽혈(歃血)하여 맹약하기를 요청하였는데, 이에 대해 조정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상이 뭇 신하들을 불러 이르기를,  “이러한 인심과 이러한 병력(兵力)과 이러한 군율(軍律)로 이 적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이미 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그들과 화호(和好)하기로 하늘에 맹세한 이 마당에 유독 삽혈만 하지 않는다고 하면 되겠는가.

 

비록 지금 세상이 그 일을 그르게 여기고 후세에 그 일을 비난할지라도 나는 삽혈의 맹약을 해야겠다.”

하니, 공이 즉시 상의 앞으로 나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극력 간하기를, “적은 견양(犬羊)과 같은데 상께서 어찌 그들과 함께 앉아 삽혈을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종사와 백성을 위해서 우선 기미책(羈糜策)은 허용하더라도 이것만은 결코 따를 수가 없습니다.”

하므로, 상이 이에 따랐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서문(誓文)을 읽게 하고, 정부에서는 문무의 중신들을 명하여 서교(西郊)에서 회맹(會盟)하도록 하였는데, 상이 특별히 공에게 명하여 가서 참여하게 하였다. 그러자 혹자가 공에게 말하기를,

“공이 처음에는 동맹(同盟)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진술하고서 끝내는 명을 받고 가서 참여하기에 이르렀으니, 부끄럽지 않은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상께서 동맹을 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데, 내가 가서 참여하는 것쯤이야 또 무어 논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조정에서 이미 강화를 하고 나서는 장차 천조에 그 사실을 주문(奏聞)하려 하는데, 그 주본(奏本)이 사실과 다른 것이 많으므로, 공이 비국에 말하기를,  “천조와는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는데, 비록 부득이해서 오늘날 이렇게 화를 늦추는 계책을 쓰기는 했을지라도 어떻게 사실대로 아뢰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니, 뭇 의논이 공의 말을 옳게 여기어 마침내 주문(奏文)을 고쳐 지었다.

 

그 후 유언비어가 중조(中朝)에 흘러들어갔으나, 당초의 주본이 사실에 의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천조에서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4월에는 어가를 호종하여 환도하였다. 5월에는 재차 자전과 중전을 모시고 환도하였다.

 

6월에는 지평 신달도(申達道)의 말이 묘당에 침범되었으므로, 공이 두 차례나 사직하는 차자를 올렸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서 타일렀다. 9월에는 좌의정ㆍ세자부에 승진되었고, 10월에는 병으로 두 차례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

 

12월에 광적(狂賊) 이인거(李仁居)가 난을 일으키자, 공이 사변(事變)이므로 출사하여 옥사를 다스렸다.

조정에서 노적(奴賊)이 재차 침범할까 걱정하여 장차 강도에 행궁(行宮)의 해우(廨宇)를 건립하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런 어려운 때를 당해서는 토목공사를 일으켜선 안 됩니다. 인경궁(仁慶宮)이 대단히 호사스러워서 후세 사람들이 보도록 남겨두어서는 안 되니, 바라건대 그 재목과 기와를 철거해다가 강도로 옮겨서 행궁의 해우를 건립하여 민폐를 더소서.”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이때 서로(西路) 지방이 병란에 시달리어 백성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리므로, 공이 건의하여 위로 공경에서부터 아래로 처음 벼슬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각자 유의(襦衣)와 상(裳)을 갹출하여 구제하였다.


무진년 정월에 유효립(柳孝立)이 모역하여 죽산(竹山)의 적과 함께 모의했다가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공이 대신으로서 옥사를 안험하여 역모의 정상을 모조리 알아냄으로써 모두 50여 명이 복주되었다.

 

그리고 무고를 입은 사람에 대해서는 그 억울한 정상을 아뢰어 모두 용서해주니, 큰 옥사가 마침내 평정되고 인심이 다 기뻐하였다. 상이 추관(推官)에게 녹훈할 것을 명하자, 공이 그 불가함을 극력 말하고 두 차례나 차자를 올려 간쟁하니, 상이 비로소 윤허하고 안마(鞍馬)를 하사하라는 명이 있었다.


4월에는 세 차례 차자를 올려 병으로 사직하고, 또 상소하여 체직을 요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에는 13차례나 사직을 고하고 판돈녕부사에 체배되었다. 11월에는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ㆍ춘추관ㆍ예문관ㆍ관상감사, 세자사, 훈련도감ㆍ군기시 도제조에 진배(進拜)되었다. 공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전일에 경의 뜻에 애써 부응한 것은 대개 부득이함에서 나온 것이요,

 

그 직임에 맞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경의 덕망은 실로 재상의 직임에 합당하니, 어서 속히 출사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도와서 처리하라.” 하였다. 기사년에는 좌의정 김류(金瑬)가 탑전에서 나만갑(羅萬甲) 등 경박한 연소배들이 언론을 제멋대로 하기 좋아하는 일을 말하니, 상이 진노하여 나만갑을 멀리 유찬시키고 김육(金堉)을 잡아다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공이 아뢰기를, “연소배들의 말의 과실에 대해서는 오직 진정하고 억제해서 서로 공경하고 화협하는 방도로 삼아야 합니다. 신이 감히 사적으로 한두 소관(小官)을 비호하여 스스로 임금을 속이는 죄에 빠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명하여 공을 인견하였다.

 

공이 또 탑전에서 그 사실을 진술하니, 상의 노여움이 약간 풀리어 나만갑은 중도에 유배하고 김육은 문외출송(門外黜送)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대제학 장유(張維)가 상소하여 나만갑 등을 구하니, 상이 노하여 특명으로 장유를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강등시켜 보임하므로, 공이 또 차자를 올려 머물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경오년에는 가도(椴島)의 수장(守將) 유흥치(劉興治)가 난을 일으켜 부총(副總) 진계성(陳繼盛)을 죽였으므로 조정에서 군대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고자 하였는데, 군대가 출동하자 유흥치는 다른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버렸다. 그러자 뭇 의논이 모두,

 

“유흥치가 도망가서 비록 가도에는 있지 않지만, 이때를 이용해서 군대를 옮겨 공격한다면 이로부터 한인(漢人)들의 침요(侵擾)를 제거할 수 있겠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오늘날 서쪽으로 토벌을 하는 것은 오로지 유흥치 때문인데, 지금 공도(空島)를 공격할 경우 그 섬에 사는 백성들 또한 천조(天朝)의 백성이니, 하루아침에 그들을 토살(討殺)하는 것은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하였다.

 

이때 이서(李曙)ㆍ정충신(鄭忠信) 등이 가도를 토벌하러 나가 서로 오래도록 버티고 있음으로 인해 사졸(士卒)들이 사상자가 많아지자, 공이 우상 이정귀와 함께 차자를 올려 파병(罷兵)하기를 요청하니, 상이 따랐다. 얼마 뒤 유흥치가 진계성의 직임을 대신 받아가지고 왔다.


동지 이명준(李命俊)이 상소하여 궁금(宮禁)에 여자를 바치는 일과 시폐(時弊)를 논하자,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회계(回啓)하게 하였는데, 공이 동료 재상과 함께 회계한 가운데 “매진(媒進)한 사람의 죄는 죽여도 부족함이 있다.”는 등의 말이 나왔다. 이에 상이 크게 노하여 누차 엄한 비답을 내리니, 공이 동료 재상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대죄하였다.


3월에는 태학(太學)에 권강(勸講)한 일로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성인의 학문이 《대학》 속에 다 갖추어 있으니, 제왕의 수신(修身)ㆍ치국(治國)하는 도리는 여기 말고 다른 데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하고, 상께 성학(聖學)을 담당하여 거기에 성심으로 종사(從事)해서 힘써 실효를 보도록 권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8월에는 선묘(先墓)에 비석을 세울 일로 말미를 받아 가니, 상이 명하여 요전상(澆奠床)ㆍ미곡(米穀)ㆍ역군(役軍)을 하사하였다.


11월에는 목릉(穆陵)을 옮기었다. 이때 우제(虞祭) 때에 배제(陪祭)할 백관의 변복(變服)에 관한 일을 논의하였는데, 어떤 이는 조종조의 고사에 따라서 의당 흑단령(黑團領)을 써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여 조종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상이 그 의논을 대신에게 내리니, 공이 의논드리기를,  “장례 때의 우제의 복색(服色)에 대해서는 《대명집례(大明集禮)》 및 《두씨통전(杜氏通典)》ㆍ《가례의절(家禮儀節)》 등의 책에 모두 시복(緦服)을 입고 제사를 지내고 제사가 끝나면 최복을 벗고 소복(素服)을 입는다고 되어 있어, 그 조문이 매우 분명하니, 이것이 근거할 만한 예입니다.

 

선왕조의 선정릉(宣靖陵) 개장 때에는 백관 및 제관(祭官)이 오사모(烏紗帽)ㆍ흑단령(黑團領)ㆍ오각대(烏角帶)를 썼다고 하니, 장사가 막 끝나 우제를 아직 치르지도 않았는데 문득 길복(吉服)을 쓰는 것은 미안할 듯합니다.”하니, 상이 명하여 그 의논대로 따르도록 하였다.이때 추숭(追崇)에 관한 의논이 일어났다.

 

12월에 공이 상차하여 말하기를,

“창업(創業)한 임금은 맨처음 스스로 종묘를 세우기 때문에 선대를 추숭하는 데 대해 압굴(壓屈)될 것이 없고 방애될 것도 없어 진실로 사리에 합당하고 또 근거할 만한 전례(典禮)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하의 중흥하신 공렬은 비록 창업과 다를 것이 없다 해도, 소종(小宗)으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어서 선왕의 종묘를 받드는 처지이니, 그 사체가 맨처음 종묘를 세우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대원군(大院君)은 위로 조종(祖宗)의 명을 받든 것이 없고 아래로 신민(臣民)을 다스린 일도 없는데,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 대위(大位)를 추숭하여 태묘(太廟)에 올려 모신다면 신의 생각에 종통(宗統)에는 압굴되는 것이 있고 공의(公義)에는 방애되는 것이 있을 듯합니다.

 

더구나 지금 이 추숭하여 태묘에 모시는 일은 재위(在位)했던 임금들이 자연스럽게 서로 계승하는 순서가 아니므로, 한 위(位)를 승부(陞祔)하고 한 위를 조천(祧遷)하는 데 있어 전하의 어버이 높이는 정리와 선왕을 추모하는 효심이 기필코 둘 다 온전하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성상의 지극하신 정리를 그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국가의 막대한 일을 함에 있어 명백하게 근거할 만한 전대의 명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 보는 곳이 같지 않거나 혹 미처 보지 못하였거나 혹 말이 적중하지 못하고 비유가 타당하지 못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국가를 위하고 군부를 위하는 이외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정리에 벗어난 말씀으로 뭇 신하들을 너무 심하게 의심하시므로, 근일에는 조정 사람들의 낯빛이 변개되어 기상이 좋지 못하니, 이것은 자못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심기를 화평하게 가지시어 마음에 거슬리는 것을 도가 아니라고 여기지 마시고, 사사로운 은혜로 공론을 가리우지 마시어, 일을 어렵게 여기고 신중하게 처리하여 대중지정한 예를 잃지 않도록 힘쓰소서. 신은 배우지 못한 무식배로 재상의 자리에 무릅쓰고 앉아서 국가의 큰 논의를 귀일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 신의 죄입니다.

 

바라건대 조속히 신을 척출하시고, 인망이 두텁고 예에 통달한 어진이로 바꾸어 뽑으신다면 논의가 정해지고 조정이 존엄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 차자가 올라가자,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그 후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이귀(李貴)의 배척을 입어 정고하여 사직하고, 또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다.


신미년 4월에는 상이 대신들을 명초(命招)하여 추숭에 관한 일을 물으면서 각각 가부를 진술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이 등대(登對)하여 추숭하는 것은 예가 아니요, 주문(奏聞)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뜻을 극력 진술하였다.

 

그런데 상이 양사에서 천조(天朝)에 주문하지 말기를 청한 것을 인하여 “대신 가운데 이귀와 불화하는 자가 있으면 나 혼자서 의당 그를 배척할 것이다.”라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공이 우상과 함께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어제의 하교는 경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라고 답하였다.

 

옥당이 또 차자를 올려 양사의 무기력함을 논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응교 이행원(李行遠) 등 5명을 잡아다 추문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공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전하께서 신을 형편없게 여기지 않고 대신의 반열에 두신 것은 신의 한 몸을 영광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실상은 신에게서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추숭하는 전례를 당하여 국가의 막대한 의논을 하는 데 있어 신이 감히 생각한 바를 숨기지 않고 반복하여 그 불가함을 진술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신의 말을 체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승전(承傳)을 받들어 천조에 주문하도록 하시니, 이는 대신의 말이 그럴싸하지 못하여 전하께서 대신으로 대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 장차 무슨 면목으로 조당(朝堂)에 뻔뻔스레 있겠습니까.”하고, 또 좌상 김류는 예를 논의하는 사이에 사혐을 품은 것이 아니요, 이행원 등이 한 말이 귀에 거슬린다 하여 그들을 죄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논하였는데, 언사가 아주 적절하였으므로 상이 이 때문에 이행원 등을 잡아다 추문하라는 명을 거두었다.


공은 또 우상과 함께 빈청에 나아가 전례를 극력 논하여 말하기를,  “자식은 아버지에게 작위(爵位)를 주는 의리가 없고, 공자(公子)는 감히 제후(諸侯)를 조(祖)로 삼지 못하며, 소종(小宗)은 대종(大宗)과 합할 수 없고,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면 그 사당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본디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졌고 또한 문헌(文獻)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사(卿士)들과 국사를 꾀하지 않고 나라 사람의 말을 돌아보지도 않고서 자신의 뜻대로 그대로 행해서 천조에 주청할 경우, 천조에서는 외번(外藩)의 일이라 해서 굳이 세밀하게 헤아리지 않고 이것을 천하에 전파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그 안목을 갖춘 사람이 어떻다고 말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완성군(完城君)최명길(崔鳴吉)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 꺼림직한 말이 있음을 인하여 차자를 올려 대죄하고, 또 비망기(備忘記)에,  “대신 가운데 세상의 추중을 받는 자가, 김장생(金長生)이 숙(叔)이라 칭한 말을 가지고 조짐을 막은 것이라고 했다.” 는 하교가 있자, 또 차자를 올려 대죄하였다.


5월에는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추숭하는 전례(典禮)를 강정(講定)하게 하므로, 공이 대신과 모여 의논하기를 청하고, 또 예관(禮官)ㆍ대각(臺閣)과도 회동하기를 청하고, 또 당시의 예학에 밝은 선비들을 불러 널리 상고하고 익히 강론하여 힘써 중정한 도리를 구해서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좋아하지 않다가 3일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는 비답을 내렸다.


7월에는 차자를 올려 사면하였다. 연평부원군 이귀(李貴)가 또 추숭에 관한 차자를 올리자, 이를 예조에 계하(啓下)하니 예조가 복계(覆啓)하였다. 상이 이를 다시 정부로 하여금 회계하게 하므로, 공이 동료 재상과 함께 회계하고 인하여 이귀와 박지계(朴知誡)의 논의가 그릇됨을 진술하고, 또 “추숭하는 것은 예가 아니며, 조(祖)를 예(禰)로 삼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다.”는 것을 강력히 말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병으로 정고(呈告)했다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고 이어 내의를 보내서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 9월에는 영돈녕부사에 체배되었다. 임신년에 성종 대왕(成宗大王)을 세실(世室)로 모시자는 의논이 있어 상이 그 의논을 내렸다.

 

공이 의논드리기를,  “성묘(成廟)가 비록 4대(四代) 가운데 들어있는 천현지친(天顯之親)이지만 왕통으로는 의당 5대조(五代祖)가 되니, 축사(祝辭)는 마땅히 세실의 열성례(列聖例)에 의거해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또 성묘께서 태평성대를 이룩하신 것과 깊으신 인(仁)과 후하신 은택에 대해서는 먼 후세에까지 잊을 수 없는 일이니, 세실로 모시자는 의논에 대해서 참으로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신이 일찍이 듣건대, 주자(朱子)는 위하는 바가 없는 것[無所爲]과 위하는 바가 있는 것[有所爲]의 구분을 매우 엄격하게 논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4대 동안 미처 거행하지 못한 예를 마침 오늘날에 거행한다면 장차 위하는 바가 있어서 하는 것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 선조를 높이는 지극한 정성에 미진한 바가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5월에는 말미를 받아 광주(廣州)의 토당리(土塘里)로 돌아갔다. 공은 길을 떠나기에 앞서 차자를 올려 주 문공(朱文公)의 행궁편전논학주차(行宮便殿論學奏箚) 및 우리나라 이퇴도(李退陶)의 돈성학봉사(敦聖學封事)를 써서 올려 이 학문에 진실하게 힘쓸 것을 정성스럽게 말하고, 또 말하기를,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사무(事務)를 총찰(聰察)하는 것을 유능함으로 삼지 말고, 한 세대만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여기지 말아서, 오직 성왕(聖王)들의 전해온 심법(心法)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 그 말한 바의 이치를 다 궁구하고 그 행한 바의 도리를 그대로 준행하여, 고식적이고 구차한 가운데서 벗어나 정대 광명한 경지로 뛰어 오르소서.

 

옛날 송 신종(宋神宗)이 정명도(程明道)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요순의 일인데 내가 어찌 감히 담당하겠는가.’ 하니, 명도가 근심스러운 기색으로 대답하기를, ‘폐하의 이 말씀은 종사와 생민의 복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전하께서는 반드시 요순이 마음 전한 것을 학문으로 삼고 반드시 요순이 백성 다스린 것을 정사로 삼아서, 심기 일전하여 책임을 져서 끝까지 한 마음을 가지소서.” 지극한 언론을 올려서 내 마음속에 주입해 주니, 경의 충간(忠懇)에 감동이 된다.”하였다.

 

이미 물러와서는 계속 차자를 올려 직명을 해면해주기를 요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누차 사관을 보내서 돈후한 말로 타일렀다. 6월에는 자전(慈殿)께 병환이 있어 공이 마침내 환조하였다. 이어 국상(國喪)을 당하여 졸곡(卒哭)을 지나서는 또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고, 11월에 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계유년에는 공이 조정에서 물러날 뜻을 더욱 굳히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공이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시사(時事) 또한 어려운 이때에 까닭없이 물러난다면 군신의 의리에 혹 흠이 되지 않겠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노신(老臣)이 10년 동안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은 상의 마음이 학문에 힘쓰기를 바라서였는데, 지금 상께서는 이미 사공(事功)에만 마음을 기울이고 본원(本原)의 지경에는 뜻을 두지 않으시니, 나 같은 사람은 조정에 있어도 보탬이 될 것이 없다.

 

보탬이 될 것이 없는데도 임금의 녹을 먹는 것은 옛사람이 부끄럽게 여긴 바이거니와, 더구나 치사(致仕)할 나이도 지났음에야 물러나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7월에 온천에 목욕할 일로 말미를 받아서 그대로 사사로이 물러날 계획을 하고 성(城)을 나갔다. 그러자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이 상에게 말하기를, “오모의 이번 목욕하러 가는 길은 실로 영원히 물러날 계획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오모는 많은 나이와 덕망으로 중외(中外)의 인망이 매인 사람이니, 그가 만일 영원히 물러난다면 이는 자못 맑은 조정의 흠사(欠事)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 달에 인정전(仁政殿)에 뇌진(雷震)이 있었다. 공이 정전(正殿)에 진재(震災)가 있었는데도 문안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차자를 올려 대죄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 큰 재변을 만나 몹시 위태롭고 두려워서 조석을 보존할 수 없는 지경이다.

 

경은 선왕조의 구신(舊臣)으로서 나의 조정에 같이 있은 지도 또한 오래 되었으니, 이렇게 위난한 즈음에 나를 버리고 떠나서는 안 될 듯하다.” 하였다. 그 후 세 번이나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고, 누차 사관을 보내 타이르고 내의를 보내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 9월에는 좌의정에 제배되었다. 공이 또 차자와 상소를 세 차례나 올림에, 상이 사관을 보내고 승지를 보내어 전후의 소명(召命)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자 공이, “상께서 재변을 만나 몸을 삼가고 마음을 가다듬으시니, 이를 인하여 개도(開導)할 만하다.”고 여기고, 10월에 환조하여 숙사(肅謝)하자, 상이 기뻐하는 말이 있었다. 갑술년에는 이괄(李适)의 모반 당시에 어떤 일로 죽은 장수 이중로(李重老)의 아들 문웅(文雄)이 자기 부친을 위해 복수를 하여 이수백(李守白)을 도중(都中)에서 찍어 죽였다.

 

유사(有司)가 이를 법률에 비추어 죄를 의논할 적에 상이 그 의논을 내리자, 공이 “한때의 후일을 염려하는 계책으로 만고 강상(萬古綱常)의 의리를 손상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의논하여, 문웅이 죽음을 면하고 중도에 유배되었다.


7월에는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때 부묘(祔廟)의 일에 대한 예조의 회계에 답한 가운데 엄지(嚴旨)가 있었다. 그러자 공이 즉시 차자를 올려, 원종 대왕(元宗大王)을 태묘에 들이는 일은 불가하다는 것과 성종 대왕(成宗大王)을 조천(祧遷)하는 일은 더욱 불가하다는 것을 논하고, 또 말하기를,  “처음에 최명길의 별묘(別廟)에 관한 의논에 대해서는 신도 그렇게 여기면서 다만 한 나라에 두 사당이 있게 되는 것을 의심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두 사당이 있는 것이 비록 혐의스럽기는 하나 입묘(入廟)나 조묘(祧廟)의 미안함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을까 합니다. 더구나 전하께서 존현(尊顯)의 지성으로 종통(宗統)에 압굴되어 감히 태묘에 들이지 않고 이에 별묘의 제도를 세우신다면 참으로 전하의 성덕과 대효에 대해서 천하 후세에 그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면서 계서(繼序)의 상변(常變)에 대한 의리를 깊이 생각하시고 또한 종통에 압굴되는 의리도 생각하시어, 태묘에 들이는 거조를 중지하시고 그대로 별묘의 제도를 두소서.” 하였다. 그런데 이 차자를 궁중에 3일 동안이나 머물러둔 다음에야 ‘차자를 자세히 보았다.’는 것으로 답하였으므로, 공은 즉시 사직소를 올렸다.

 

양사에서도 태묘에 들인다는 성명(成命)을 도로 중지하기를 청하자, 상이 크게 노하여 대사헌 강석기(姜碩期), 대사간 조정호(趙廷虎) 등 8명을 삭출하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양사와 똑같이 죄 입기를 청하고 계속해서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에 또 차자를 올려 입묘(入廟)와 조묘(祧廟)의 불가함을 논하고, 재차 차자를 올려 그 일을 극력 논하고 또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 후 30차례에 걸쳐 정고(呈告)하니 재차 승지를 보내서 온후한 말로 타일렀고, 두 차례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에는 동궁에게 글을 올려 학문에 힘쓸 것을 권하였다. 공이 가을부터 겨울까지 휴가를 청하거나 차자를 올려 기필코 물러나려고 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고 나오도록 재촉하는 분부만 날마다 이르렀다. 공은 자신이 장차 꼭 물러나려는 뜻에서 한 번 상을 뵙고 소회를 진술하려고 하였는데, 인하여 새해를 맞아서 문안을 드리고 다시 출사하게 되었다.


을해년에는 원종 대왕 부묘 도제조(元宗大王祔廟都提調)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어떤 이가 공에게 묻기를, “지금 이 부묘의 거조에 대해서 공의 견해는 시종이 같지 않은데, 지금 부묘도감에서 공무를 집행하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하니, 공이 답하기를, “추숭하는 것은 고례가 아니요 종통이 가장 중한 것이니, 당초에 극력 간쟁했던 것은 대신의 책임이었고, 이제는 봉전(封典)이 이미 내리어 조정에서 이미 예를 정하였으니 명을 받들어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신자의 의리인 것이다.

 

더구나 이 일이 설령 예에는 맞지 않더라도 이는 곧 군상께서 어버이를 위해 정의를 다하는 일이니, 신자의 도리로서는 의당 어버이를 위하는 데 대하여 휘하는 것[爲親者諱]이거니와, 이미 이루어진 일이고 보면 또 의당 지난 일을 책잡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하고, 이후로는 남들과 이야기할 적에도 원종을 추숭하여 태묘에 들인 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3월에는 목릉(穆陵)의 재랑(齋郞)이 “밤중에 천둥치고 비가 내려 목(穆)ㆍ혜(惠) 두 능이 무너졌다.”고 예조에 보고해오자, 예조가 이 사실을 보고하니, 듣는 이들이 벼락의 변고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러자 공이 동료 재상과 대궐에 나아가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죄주기를 청하고 또 스스로 책망하였다.

 

이윽고 상이 공에게 명하여 능을 봉심하게 하자, 공이 예조 판서 홍서봉(洪瑞鳳), 선공감 제조 신경진(申景禛)과 함께 능에 가서 봉심하고 돌아와서는 수환(水患)의 소치였음을 아뢰고, 재차 아뢰어 “처음에 능관(陵官)의 보고를 듣고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성심(聖心)을 놀라게 하고 군정(群情)을 경동시켰다.” 는 것으로 자신을 책망하였다.

 

이에 양사에서 재랑을 파직하기를 청하였는데, 형조 참의 나만갑이 상소하여 척언(斥言)하기를, “상하가 서로 덮어 가려 재이를 기휘하고, 재랑을 파직하기를 논하는 것으로 하늘의 꾸지람에 색책을 하였습니다.” 하니, 양사가 인피하였다.

 

옥당이 마침내 양사를 모두 체직하게 하니, 상이 옥당의 처치는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상대하여 논의할 것을 명하였다. 이로부터 논의가 분분해지자, 공이 즉시 휴가를 청하여 인책하고 들어가서는 문을 굳게 닫고 빈객을 사절하였고, 또한 회의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상이 대신을 동요시켰다는 이유로 나만갑을 책망하여 파직시키자, 공이 즉시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나만갑의 언사(言事)에 대해서는 죄줄 것이 없거니와, 또 언로(言路)를 막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나만갑의 범행은 매우 중하나 다만 언로를 위해서 처벌을 가볍게 한 것이다.” 하였다.

 

그 다음날 조강(朝講)에서 상이 《시경(詩經)》을 수업하였으므로, 공이 학문하는 방법 및 《시경》을 읽는 법과 집안을 바르게 하는 일을 극력 진술하고, 나아가 진언하기를, “상께서 마음공부를 하시지 않기 때문에 혈기(血氣)의 부림을 받아 희로(喜怒)가 바름을 잃고 언사(言辭)가 중도에 지나치게 되어 근일에는 신료들을 몹시 꾸짖으면서 노기를 띤 어조의 하교가 있게까지 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학력(學力)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임을 안다. 다만 나에게 병통이 있어 나는 몹시 당(黨)을 싫어한다. 심중이 이렇다 보니 겉으로 나오는 것이 부득불 그렇게 된다.” 하므로, 공이 대답하기를,

 

“상세(上世)에는 성인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뭇 신하들이 서로 화협하여 아예 붕당(朋黨)이란 명칭도 없었는데, 후세에 와서 비로소 군자와 소인의 당이 있게 되었습니다.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는 한두 사람이 서로 힐책하는 것을 인하여 경박하고 일 만들기 좋아하는 무리가 그것으로 제목(題目)을 만들어버리므로, 조정에 있는 모든 신하가 한 사람도 그 명목 가운데 들어있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언론하고 처사하는 즈음에 모두가 ‘자기 당을 비호하고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으로 지목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혹은 머뭇거리며 삼가고 두려워하여 그 혐의를 기피하기도 하니, 이는 자못 좋은 일이 아닙니다.

 

상께서 붕당을 싫어하여 제거하시려는 것은 당연히 좋은 뜻입니다. 그러나 성상의 마음에 먼저 걸린 것이 있어 매양 ‘뜻이 같은 사람과 당을 짓고, 뜻이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고 신하들을 의심하시니, 이는 온 조정의 모든 신하가 다 의심하여 믿지 못하는 가운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군신의 사이가 어찌 이래서 되겠습니까. 어찌하여 처사하는 즈음에 우선 당을 싫어하는 마음을 버려서 성상의 마음을 화평하고 중정하게 하신 다음에 그 일 한 가지만 가지고 그 시비를 결단하고 말지 않으십니까.”하고, 또 산릉(山陵)의 석물(石物) 제도가 옛 제도에 어긋난 것과 대군(大君)의 저택이 제도에 지나친 것 등의 일을 말하니, 상이 모두 받아들였다.


공은 또 나만갑을 죄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뢰었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이때 능소(陵所)에 관한 말이 그치지 않았는데,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은 모두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고, 신경진(申景禛)은 흙을 날라다가 그 흔적을 감추려고 하자 참봉이 이를 다투어 말렸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는 말이 돌았다.

 

정언 송몽석(宋夢錫)이 이 때문에 인피하여 심지어는, “실정을 조사하여, 사실을 속여 숨기는 소인의 죄를 적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대신이라도 어찌 감히 용서될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까지 하였다.

 

그래서 공이 차자를 올려 재차 살피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명하여 중사ㆍ사관ㆍ참봉 3명을 함께 잡아다가 면질(面質)을 시키게 하였는데, 모두 실사(實辭)가 없었으므로 뭇 사람의 의심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이후 공이 세 차례 상소하여 체직을 요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공은,

“몸이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남들에게 신용을 얻지 못하였으니, 감히 재상의 지위에 태연하게 있을 수 없습니다.”하고, 휴가를 청하여 동호(東湖)로 나와서 우거하였다.

 

상이 그 사실을 듣고는 즉시 승지를 보내서 온후한 말로 타이르기를, “대신이 자리에 앉아서 인심을 진정시키지 않고 자신이 먼저 나가버리면 사람들의 의심이 반드시 더욱 심해질 것이니, 속히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하니, 공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국가가 재상을 두는 데 있어 적임자를 얻느냐 못 얻느냐에 치란(治亂)이 달린 것입니다.

 

적임자를 얻은 다음에야 인심이 믿어 복종하는 것이요, 인심이 믿어 복종한 다음에야 진정하는 방도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형편없는 위인으로 외람되이 대신의 반열에 끼어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경멸을 받아 한갓 신용만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끝내는 몸을 욕되게 하여 나라를 욕되게 하기에 이르렀으니, 요즘 흉흉한 말들이 어찌 그 분명하고도 큰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신이 위로 국사를 생각하고 신의 몸을 반성해보건대, 관직에 연연하여 머뭇거리면서 나라를 병들게 하고 어진이의 등용을 방해하기보다는 차라리 몸을 붙들고 국문 밖으로 나가서 망녕되이 행동한 죄를 달게 받는 것이 낫겠습니다.

 

여러 해 동안 아무 하는 일도 없이 대신의 지위에 염치없이 눌러 앉아 있었으니, 기왕의 죄과는 뉘우쳐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거의 죽게 되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문을 굳게 닫고 엎드려 있으면서 후일에 사죄할 뿐입니다.”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 후 두 번 세 번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네 번째는 상이 승지를 보내서 온화한 말로 타이르고, 다시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고 승지를 보내서 온화한 말로 타일렀으며, 사관을 보내서 비답하였다.

 

스물한 번째에 이르러서는 또 승지를 보내서 온화한 말로 타일렀다. 공이 다시 상소하여 진정(陳情)하니 상이 답하기를,

“흉패한 무리의 동요하는 말을 개의할 것이 없으니, 굳이 사양하지 말고 엄정한 낯빛으로 조정에 나와서 대신을 몰아내려고 하는 시인(時人)들의 기습을 막아야 한다.” 하였다.

 

그러자 공은 상의 비답 중에 꺼림한 어의가 있다 하여 차자를 올려 왕언(王言)이 중도에 지나쳤음을 논하고, 또 “천리(天理)가 우세하면 일이 밝아지고, 분기(忿氣)를 내면 거스름을 초래하는 것이니, 본원(本原)에 힘을 다하여 평상시의 말도 반드시 삼가서 해야 한다.”는 뜻을 말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내가 실로 지나쳤구나.” 하였다.

 

이때 대사간 정온(鄭蘊)이 상소하여 능에 관한 일을 논하면서 공을 퍽 심하게 비난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또 차자를 올려 인책하고 해면해주기를 요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정온은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부망(浮妄)한 말들을 주워모아서 남을 논박할 거리로 만들었으므로, 그 말이 사리에 맞지 않음을 사람들이 틀림없이 알 것이니, 경은 이것 때문에 물러나기를 요구해선 안 된다.” 하였다.


이때 태학생들이 이율곡ㆍ성우계양현(兩賢)을 종사(從祀)할 일로 상소하여 소장이 누차 들어갔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는데, 생원 채진후(蔡振後) 등은 또 그 의논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양현을 비난하여 배척하였으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이를 변론하면서 양현의 학문과 도덕의 훌륭함과 선왕의 제회 권우(際會眷遇)의 융숭함과 양현이 말년에 참소와 무함을 입은 사유에 대해서 갖추 말하고, 또 상께 깊이 믿고 독실히 좋아하여 다른 논의에 동요되지 말도록 권유하였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여러 재신들을 거느리고 두 능을 수개(修改)하고 와서 아뢰기를,  “신들이 여러 관원을 거느리고 능에 올라 봉심해보니, 빗물로 인해서 무너진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하니, 인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 각각 생각한 바를 말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모두 말하기를, “처음에 외간에 떠도는 말로 인하여 의심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이제 와서 직접 보니, 남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이러합니다. …… ” 하였다.

 

이 뒤로 사람들의 말이 조금 잠잠해지자, 공은 이 기회에 영원히 물러나서 치사(致仕)하려는 뜻을 이루려고 전후로 정사(呈辭)한 것이 스물한 번이었고 봉소(封疏)하여 사직을 요청한 것이 또 열한 번이었는데,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고 승지를 시켜 온화한 말로 타이른 것과 사관을 시켜 비답을 전한 것이 계속해서 이르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상께서 고집하여 윤허하지 않으시니 필시 내 병이 사실이 아니라고 여겨서 그런 것이다. 여러 달을 서로 버티고 있어 봐야 아무 이익될 것이 없으니, 조정에 돌아가서 한 번 등대(登對)하여 쌓인 회포를 남김없이 토로하고, 또 노병(老病)의 실상을 진술하여 상께서 통촉하시도록 하는 것이 낫겠다.

 

그런 다음에 물러나와 병으로 사직을 하면 내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7월 이후에 들어가 사은하였다. 그리고는 한 칸의 정사(精舍)를 마련하여 책상 위에 《근사록(近思錄)》ㆍ《심경(心經)》 한 질씩을 비치하고 몇 개월 동안 조용히 들어앉아 있었다.


12월에 인렬왕후(仁烈王后)가 승하하자 공이 총호사(摠護使)의 직임을 맡아 기무(機務)에 응대하느라 피로하고 초췌해진데다 죽만 마시면서 냉지(冷地)에 거처한 지 오래 되어 이로 인해 병을 얻었는데, 병을 무릅쓰고 조당(朝堂)에 나가다가 병이 더욱 심해지자 비로소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다.

 

국상(國喪)의 성복일(成服日)에는 예조에서 상에게 부장기(不杖期)의 복을 입도록 하려고 하자, 상이 이를 대신들에게 물으므로, 공이 의논하기를, “의당 주자(朱子)가 제정한 ‘남편은 아내를 위해 지팡이를 짚는다.[夫爲妻杖]’는 데에 따라야 합니다.

 

선왕조의 등록(謄錄)에는 이 조문이 비록 실려 있지 않지만, 상께서 단연코 거행하시어 자신으로부터 옛 일을 만들어서 후세의 법이 되도록 하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 의논대로 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또 계사(啓辭)를 초하여 신릉(新陵)의 석물 등에 관한 일은 의당 건원릉(健元陵)의 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논하였는데, 이는 바로 공이 지난날 등대했을 때에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상은 이미 도감에 명하여 신릉의 일은 의당 건원릉의 옛 제도를 본받아서 하도록 하였으니, 대체로 지난날에 공이 한 말을 기억했던 것이다.


상은 연이어 약물을 내리고 승지를 보내서 문병하였으며, 동궁 또한 궁관(宮官)을 보내 문병하였고, 액정(掖庭)의 하인들도 하루에 두세 번씩 이르렀으니, 이 또한 특별한 대우였다. 공은 자제에게 유명(遺命)하기를,

 

“치상(治喪)의 여러 가지 도구는 힘써 검소한 쪽을 따라서 하여, 유거(柳車)를 빌려 쓴다든지 하는 화려한 꾸밈에 마음 쓰지 말고, 남들에게 만사(挽詞)를 짓게 하여 칭찬을 늘어놓게 하여 널 앞에 세워서 부끄러운 일이 되게 하지 말 것이며, 전제(奠祭)에는 유밀과(油蜜果)를 써서 보기 좋은 자료로 삼지 말고, 시호(諡號)를 청하지 말 것이며, 신도비(神道碑)를 세우지 말라. 이것은 모두 나의 뜻이 아니다.

 

나는 성명(聖明)을 만났는데도 세도(世道)를 만회하지 못하여, 나라에는 남긴 공이 없고 내 몸에는 덕이 없었으니, 장사를 지내고 나서 한 조각의 돌을 세워 ‘모관(某官) 아무개의 묘[某官姓名之墓]’라 쓰고 그 뒷면에다 자손들을 차례로 열거하여 써놓으면 족하겠다.” 하였다.


처음에 공이 강상(江上)으로부터 들어와서는 한 번 조연(朝筵)을 기다려서 상께 소회를 다 말하려고 했었으나, 그때 일이 많았던 관계로 오랫동안 조연을 폐함으로써 한 번의 등대(登對)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이 임종시에도 늘 이 일을 말하였고, 병이 위독했을 적에도 승지가 오면 반드시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조복(朝服)을 몸 위에 덮고서 만나보았다. 사람들이 약물을 들라고 권하면 그때마다 손을 저어 물리치며 말하기를,  “나는 나이와 지위가 이미 극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바로 조용하게 돌아갈 때이다.

 

어찌 다시 약물을 일삼겠는가.” 하였다. 공이 운명하기 직전에는 자제에게 명하여 자리와 베개를 똑바르게 정돈하도록 하고, 부인을 물리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정월 19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78세였다.


왕세자는 그때 상중(喪中)이었으므로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치조(致吊)하고 특별히 어의(御衣) 세 벌을 내리었다. 성복(成服)을 한 뒤에는 상이 도승지에게 명하여 치조하고 예관을 보내서 사제(賜祭)하였으며, 관(官)에서 예대로 장사를 도와주었다. 4월 27일에 용인(龍仁)의 사좌 해향(巳坐亥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부인과는 같은 언덕에 실(室)이 다르다.


공은 천품이 도에 가깝고 기국이 순수하여 온화하고 선량하고 단아하며, 청렴하고 안온하고 평이하고 담백해서 그 용모(容貌)와 말투에 드러난 것이 온화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을 한번 바라보면 덕 있는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일찍부터 사우(師友)를 종유하여 옛사람의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조존 천리(操存踐履)의 공부를 듣고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은 평생 《대학》의 글을 가장 좋아하여 항상 남에게 말하기를, “묘도(妙道)와 정의(精義)가 모두 이 가운데 들어있으니, 사람들이 천하에 기이하고 화려한 구경이나 고산 대천(高山大川)의 노닒을 하고자 한다면 어찌 회옹(晦翁)의 《대학혹문(大學或問)》 속에서 찾아보지 않는가.” 하였다.


공은 기색이 화평하고 말이 안정되어 남들이 한 번도 공의 빠른 말과 당황한 기색을 본 적이 없었다. 공이 젊었을 때 과장(科場)에 들어가서 정문(程文)을 막 올리려고 하던 차에 어떤 사람이 넘어지면서 먹물을 튀겨 그 정문을 바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사람이 대단히 부끄러워하면서 사과를 하니, 공이 그에게 말하기를,  “뜻밖의 실수를 어찌하겠습니까. 나는 기왕 시험에 일없어졌고, 보아하니 그대는 행묵(行墨)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니, 내가 우선 공을 위해 써주겠다. 공은 오직 걸음걸이를 삼가서 하라.” 하였다.

 

그 사람이 성심으로 감복하고 따랐는데, 공은 태연하여 기색이 종시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그 사람이 과거에 합격하고 돌아와서 그 사실을 남들에게 말하자, 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가 그 사실을 듣고는 바로 공의 집을 찾아와서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그대는 바로 나의 스승이다.” 하고는, 마침내 평생의 교우로 정하였다.


공이 평강(平康)에 부임할 적에는 응시만 해두고 발표가 되기 전이었는데, 임소(任所)로 가던 도중에 방목(榜目)을 가지고 지나가는 사람을 만나서 그가 공이 합격되었음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공은 그 말을 듣고도 마치 못 들은 체하고 기뻐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 방목을 가져다 보지도 않았으니, 그 평소의 조망과 국량이 이러하였다.


공은 담박하여 기호하는 물건이 없었고, 조용한 방 하나에 경서(經書) 두어 권만이 책상에 놓였을 뿐이었다. 공은 형제간에 서로 좋아하고 종족(宗族)들과 화목하여 온 집안에 화평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친구를 접하는 데 있어서는 오래갈수록 공경하면서 능히 그 사람의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버리었다.

 

수몽(守夢) 정엽(鄭曄), 추포(秋浦)황신(黃愼), 영천(靈川)신응구(申應榘), 청풍(淸風)김권(金權), 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와는 막역한 친구가 되었고, 또 상국(相國) 이원익(李元翼)을 가장 존경하여 매양 서로 만나서 담론을 하면서 여러 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선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하여 그 마음에 좋아하기를 마치 자기 입에서 나온 것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사람을 접하는 데에 화기가 넘치었다. 입으로는 남의 과실을 논하지 않았고, 모난 행실이 없었으며, 각핵(刻覈)한 의논도 없었다. 남들과 다투지 않는 마음이 있었고, 남이 침범해 와도 이를 계교하지 않는 풍도가 있었다.

 

그러나 일을 당하여 바름을 지키는 데에 이르러서는 족히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지조가 있었다. 조정의 관원들이 서로 대치해온 이후로는 아무리 선류(善流)로 호칭되는 사람일지라도 물색이 같으냐 다르냐를 따짐을 면치 못하였으나, 공은 주장하는 논의가 공평하여 호오(好惡)와 시비(是非)가 한결같이 공정함에서 나오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사로움이 없었기 때문에 식견 있는 이들이 모두 공의 바른 마음에 감복하였다.


공은 선조조에서 벼슬하기 시작하여 일찍이 청현직을 역임하면서 치적(治績)이 크게 드러났으나, 실로 연원(淵源)과 사우(師友)가 세상과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에 내직에 있을 때는 적고 외직에 있을 때가 많았다.

 

광해군이 즉위해서도 공에게 뜻을 기울이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공은 추향을 바르게 세워 사유(師儒)를 구원하고 정인홍을 배척하면서도 삼가 스스로 위씨(衛氏)의 옥사를 피하였고, 선왕조의 공신(功臣)들이 찬축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겼으며, 도당(都堂)의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고, 성효(聖孝)를 더욱 빛낼 것을 항론(抗論)하였으며, 끝내는 정청(廷請)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마침내 이 때문에 전야(田野)에 폐해져서는 도시락밥도 늘 잇지 못했고 때로는 하루의 양식을 2, 3일로 나누어 먹기도 하였으나 공은 태연하게 지냈다. 공이 군읍(郡邑)을 다스리고 나면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고, 외국 사신의 접반(接伴)을 하면 빈려(賓旅)들이 정숙해졌으며, 변방을 지키면 먼 곳의 오랑캐들이 복종하였고, 관찰사로 나가면 곤폐한 백성들이 소생되었으며, 일본에 사신으로 나가서는 사명(使命)을 완수함과 동시에 염절(廉節)이 드러났고, 배를 타고 명 나라에 사신 갈 적에는 남들이 기피하는 그 임무를 조금도 난처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었다.

 

이 때문에 비록 곤험(困險)한 지경에 처해있어도 성망(聲望)이 중하였다.그리하여 인조 대왕이 반정(反正)하고 즉위함에 미쳐서는 인망(人望)을 인하여 제일 먼저 공을 기용하였다. 공은 융중(隆重)한 권주(眷注)로 사랑하여 발탁시킴을 받고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성학(聖學)을 돈독하게 하는 것을 임금 섬기는 제일의로 삼았다.

 

그리하여 연석에 입대할 때나 나와서 상소ㆍ차자를 올릴 적에나 반복하여 정성스럽게 강조한 것들이 반드시 여기에서 나왔었다. 그런데 마침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세도가 쇠해진 터라, 상이 공효를 이룰 재능과 역량이 있는 신하를 얻어서 사공(事功)을 진취하려고 생각했었다.

 

이에 공은 어진 임금을 만난 지 십수 년 동안에 전형(銓衡)을 두 번 잡았고 상부(相府)를 세 차례 들어갔으나, 일찍이 한 번도 공리(功利)에 관한 말은 하지 않았고 매양 본원(本源)의 터전을 닦고 개제(愷弟)의 풍화를 이룩할 일로 간절히 말하였다. 이 때문에 예우는 비록 성대하였으나 공의 말이 다 임용되지는 않았으므로 논하는 이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기었다.


공이 헌부의 장관으로 있을 적에는 그때 막 간당(姦黨)들을 대대적으로 주살할 때였는데도, 공정과 관용으로 잘 처리하였고, 오만 방자한 훈신들을 배척하여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였으며, 간신(諫臣)들의 폭넓은 의논을 도와서 국론(國論)을 바로잡았고, 임금 호종한 공로를 사양하여 공신(功臣)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려고 힘썼다.

 

그리고 전조(銓曹)의 장관으로 있을 적에는 사사로운 청탁을 막고 청알(請謁)에 의한 벼슬 제수를 중지시켰다.

재상의 지위에 올라서는 왕자 공(珙)을 논하면서 시의(時議)에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 명 나라의 연호(年號)를 고집하여 버리지 않았으며, 교단(郊壇)에서 오랑캐와 동맹(同盟)하는 일을 막아 큰 법도를 부지하고서 스스로 그 실정을 명 나라에 다 토로하였다.

 

그리고 원종(元宗)을 추숭하는 예에 신중하였고, 능변(陵變)으로 뭇사람이 떠들어대던 때에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으며, 끝내는 또 자신이 스스로 물러났다. 그 임종시에 지성스럽게 말한 것은 오직 국가의 중대사로서 연석(筵席)에 올라 계달하려던 것이 실로 입 안에 있었으니, 그 빛나는 충성심을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있을 듯하다.


아, 슬프다. 공 같은 이는 거의 부자께서 이른바,  “독실히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음으로 지키면서 도를 좋게 한다. 나라에 도가 없을 때 나가 벼슬하거나,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하는 일도 없이 녹만 받아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는 데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공이 노년에는 나이가 많고 몸이 병든데다 또 시사(時事)가 어찌할 수 없음을 보고는 사퇴하기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끝내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매양 탄식하기를,  “나는 과거를 통해서 진출하였고 녹봉을 받기 위해 벼슬하였으므로 산림(山林)의 은일(隱逸)과는 다르니, 진퇴(進退)를 나의 뜻대로 할 수 없다.” 하였다.

 

병이 위독해진 날에는 자제에게 이르기를,  “오늘 갑자기 죽는다 하더라도 마음에 걸릴 것이 없으나, 다만 다시 천안(天顔)을 뵙고 성학(聖學)을 진보시키도록 권해드리지 못하는 것이 끝없는 한이 될 뿐이다.”하였으니, 여기에서 또 공의 뜻을 볼 수 있겠다.


공은 조정에 벼슬한 지 40여 년에 지위가 경상(卿相)에 이르렀으나 원옥(垣屋)을 수축하거나 전원(田園)을 경영하지 않아서, 관직에 있을 적에는 협소한 집에서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였고, 공이 작고한 뒤에는 자손들이 모두 춥고 굶주림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 또한 세상에 배우기는 남을 위하여 배우고 벼슬은 자기를 위하여 하는 자들과는 다르다 하겠다.

 

공은 평소에 저술을 일삼지 않아서 장차(章箚)의 초고를 모아둔 것 한 부가 집에 소장되어 있을 뿐이다. 부인 이씨(李氏)는 관향이 경주(慶州)로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인 군기시 첨정 응화(應華)의 딸이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달천(達天)은 면천 군수(沔川郡守)이고 다음 달주(達周)는 금구 현령(金溝縣令)이며, 큰딸은 정두망(鄭斗望)에게 시집갔으나 후사가 없고 그 다음은 평안도 관찰사 구봉서(具鳳瑞)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은 3남 3녀인데, 큰아들 달조(達朝)와 그 다음 달원(達遠)은 일찍 죽고 그 다음은 달사(達士)이다. 큰딸은 장후완(蔣後琬)의 첩이 되었고, 그 다음은 남포 현감(藍浦縣監) 이경선(李慶善)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진사 엄석구(嚴碩耈)에게 시집갔다.

 

달천은 정랑 구곤원(具坤源)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도종(道宗)이고 다음은 도륭(道隆)이며, 큰딸은 황모(黃某)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한성필(韓聖弼)에게 시집갔다. 후처는 현감 조간(趙幹)의 딸인데,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도일(道一)이고 딸은 아무아무이다.

 

달주는 도사(都事) 김규(金頍)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도원(道源)이고 다음은 도익(道益)이며, 딸은 이치(李緻)에게 시집갔다. 구봉서는 2남 3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이경(爾慶)과 다음 이상(爾祥)은 모두 일찍 죽었고, 딸들은 이상규(李尙揆)ㆍ이진(李禛)ㆍ이집성(李集成)에게 시집갔다. 달조는 2남 4녀를 낳았고, 달원은 1남을 낳았으며, 달사는 2남 2녀를 낳았으니, 내외손이 모두 약간명이다.

 

옛사람의 말에,

“세상이 어지러우면 법도를 바꾸지 않는 군자를 생각하게 된다.” 하였는데, 지금 하늘의 조화가 변천하고 세상의 일이 번복되는 이때 노성(老成)들이 이미 죽어서 전형(典刑)을 볼 수 없게 되었는지라, 나는 옛사람의 말을 슬피 여기어 일찍이 자주 되풀이하면서 크게 한숨짓지 않은 적이 없었다.


휴는 바로 공의 동네에서 자제들과 노닐었다. 그래서 일찍이 공을 책상에서 배알하였는데, 공이 나를 처음 보고 흔연히 고해주기를  “옛글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껴입는 것은 문채가 환히 드러나는 것을 꺼려서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군자가 후중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는 것이니, 학문 또한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이 두 가지는 군자의 학문하는 데에 큰 단서가 되는 것이니, 너는 이를 힘써 하라.” 하였다.

 

우리 선정(先正) 율곡 선생(栗谷先生)의 도는 이락(伊洛)의 학문에 근본하여 나온 것인데 -- 이하 원문 빠짐 -

백호전서 제21권 > 행장(行狀)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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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기리(奇李)

조선 광해군(光海君) 당시에 광해군을 적극 옹호했던 기자헌(奇自獻)과 이이첨(李爾瞻)을 합칭한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주02]왕자(王子) 공(珙)

선조(宣祖)의 서자(庶子)로 인성군(仁城君)에 봉해졌는데,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를 주장했던 관계로,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강원도 지방에 유배되었었다.

 

[주03]위씨(衛氏)의 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