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녹은 이희규 묘갈명(鹿隱李希規墓碣銘)-청호공파

야촌(1) 2011. 2. 1. 21:14

[생졸년] 28世 이희규『李希規, 1573년(선조 6) ~ 1635년(인조 13)』

 

贈通政大夫 戶曹參議 鹿隱李公 墓碣銘 幷序

증통정대부 호조참의 록은이공 묘갈명 병서

 

古之殉義未有盛於睢陽常山顔許張三家子 姓未聞有隱遁沒世者 而在穆陵世有鹿隱李公 諱希規字聖輔 特沒世而隱遁 古人之所未聞也

옛날의 순의는 수양과 상산의 안씨 허씨 장씨의 세 집안 아들들보다 성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성명이 알려지지 않아 숨어버리고 세상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목릉(선조)때에 녹은 이공이 있었으니 휘는 희규 자는 성보로 유독 죽어서도 이름이 새겨져 옛날에도 듣지 못했던 바였다

 

公之先慶州人也 上祖諱謁平佐羅功臣 中祖則居命 顯祖則益齋先生齊賢是也 歷累葉有諱友夏號樵隱是高祖也 有諱頊號松隱是曾祖也 有諱磻琦號湖巖以剡薦文兼宣傳官是大夫也 考曰仁傑號月齋訓鍊僉正綠宣武勳 贈兵曹參板 妣曰長興張氏

공의 선대는 경주인이다. 상조의 휘는 알평으로 신라를 도와준 공신이며 중조는 거명이며 현조는 익재선생 제현이다. 여러 댓수를 내려와 휘 우하라는 분은 호가 초은이니 고조가 되시는 분이다. 휘 욱은 호가 송은으로 증조이며 휘 반기는 호가 호암으로 특별히 추천되어 문직을 겸하여 선전관을 지냈으니 대부였다. 아버지는 인걸로 호는 월재 훈련첨정으로 선무훈에 록되어 병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어머니는 장흥장씨였다

 

公生而儀表魁偉性質磊確承訓鯉庭 早聞詩禮文章夙就材擬棟樑矣 龍蛇亂作國步板蕩 其先大人月齋公擧義赴戰 癸巳殉于幸州收屍不得 遂皋衣而葬之時公弱矣

공은 태어나면서 의표가 괴위하고 성질이 굳건하여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일찌기 시예를 배워 문장이 일찍 이루어져 동량지재라는 기대를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자 그의 아버지 월재공이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 달려가 계사년(1593년)에 행주에서 순절하였다. 시체를 걷우지 못하여 마침내 초혼하여 장사 지냈으니 당시에 공은 어렸었다.

 

思欲起復重堂不許 偏慈無依有誠未伸爲之 居廬備經三祀 過期後不燮縞冠啖素 杜門屛跡容膝自安以文學爲粮以耕樵爲事

다시 의병을 일으킬 생각을 했으나 할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고 홀어머니가 의지할 데 없어 정성을 두고도 펴지 못하였다 아버지를 위하여 거려하며 3년을 지내고 기간이 지나고도 호관을 바꾸지 않았으며 소식하였다.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며 편안하게 생활하며 문학으로 양식을 삼고 밭갈고 풀베는 일로 업을 삼았다.

 

規矩而正家繩尺而矯俗 是非曲直多决于公 一鄕莫不敬憚負 智勇抱經綸而 竟乃湮沒者 孰使之然非人也天也 非天也公也 大義政重公何爲哉

법도에 맞게 집안을 바르게 하여 어긋남 없이 풍속을 교정하여 시비곡직이 대부분 공에게서 해결되어 한 고을에서 공경하고 꺼려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혜와 용기를 등에 지고 경륜을 가슴에 안고도 마침내 인멸되었으니 누가 그렇게 하였을까?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하늘이 한 일이며 하늘이 한 일도 아니며 공 자신이 한 일이다. 대의란 진정으로 무거운거니 공인들 어떻게 하랴!

 

公之生宣廟癸酉也 公之圽仁祖乙亥也 享年六十三 贈戶議以孫廷弼貴追榮也 配贈淑夫人金海金氏參軍鍵女也 以貞淑稱 墓美巖面採芝里坤坐合厝

공이 태어난 것은 선조 계유년(1573년)이며 공의 죽음은 인조 을해년(1635년)이었으니 향년 63세였다 호조참의에 증직되니 손자 정필의 귀로 추증한 영예였다. 배는 증숙부인 김해김씨는 참군 건의 딸이다. 정숙하다는 칭찬이 있었으며 묘소는 미암면 채지리 곤의 좌향에 합조하였다.

 

擧一男曰柱南號望湖剡薦授司業 贈兵曹參判 孫廷亮號南溪官宣傳贈工議 廷弼武兼宣傳官 階嘉善以孝蒙旌 廷蔓通德郞 廷贇號竹窩通德郞 廷河以下煩不盡錄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주남으로 호는 망호로 특별히 추천되어 사업이 내렸으며 병조참판에 증직되다. 손자로는 정량은 호가 남계 벼슬은 선전이며 공조참의에 증직되다. 정필은 무과로 선전관을 겸하고 가선대부의 품계로 효자로서 정려가 내리고 정만은 통덕랑이며 정빈은 호가 죽와 통덕랑이며 정하는 호가 송파이니 이하는 번거러워 다 기록하지 못한다

 

嗚呼公之肖胤柱南 從余遊因知其爲 故家遺裔而 日以家狀一篇示於余 請其先公隧道之銘 謹按狀公之嘉言善行余之在朗時素所熟聞也 盥讀不覺歛膝爲之銘曰

오호라! 공의 아들 주남은 나를 따라 노닐던 사람이니 그로 인하여 그가 고가 유예임을 알았는데 하루는 가장 일편을 나에게 보내주며 그의 선공 묘비명을 청하였다. 삼가 장문을 살피니 공의 가언과 선행을 내가 영암에 있을 때에 평소 익히 들은 바였다 손을 씻고 읽다가 무릎이 여며짐을 깨닫지 못하여 명문을 짓노라

 

國而有臣 / 나라에 신하있고

父而有子 /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있다

父忠子孝 / 아버지는 충성하고 아들이 효도함은

一致無二 / 일치하는 일이지 둘이 아니라

終身縞素 / 종신토록 흰 갓에 소복이며

人難公易 / 남들은 어려워도 공은 쉬었네

莫曰文學 / 문학한다고 말을 말게나

爲公餘事 / 공에게는 여사였다네

欲知當日 / 당시의 일을 알고 싶거든

可質太史 / 태사에게 물어 보게나

于何考德 / 어떻게 덕을 살필까

嗚乎也己 / 오호라! 그만 두게나

 

崇禎記元 甲子 仲秋下澣

숭정기원 갑자(1684년) 중추 하순에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 領議政兼經筵監春秋館舍 安東 金壽恒 撰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 영의정겸경연감춘추관사 안동 김수항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