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흠(申欽)
[샹졸년]1566년(명종 21)∼1628년(인조 6).
[문과] 선조(宣祖) 19년(1586) 병술(丙戌) 별시(別試) 병과(丙科) 6위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18년(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3위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18년(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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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字)는 경숙(敬叔), 호(號)는 현헌(玄軒)· 상촌(象村)· 현옹(玄翁)· 방옹(放翁).이고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다.
1.가계와 출사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좌참찬(左參贊-正二品) 인수(麟壽)의 딸이다. 송인수(宋麟壽)와 이제민(李濟民)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으며, 1585년(선조 18) 생원 진사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承仕郞-從八品)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외숙인 송응개(宋應漑)가 1583년에 이이(李珥)를 심히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士林)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주장한 말로 인하여 당시의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라는 배척을 받고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곧 경원훈도(慶源訓導)로 나갔다가 광주훈도(廣州訓導)를 거쳐 사재감참봉이 되었다. 1589년 춘추관(春秋館-正三品衙門) 관원에 뽑히면서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正七品)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正六品) 병조좌랑(兵曹佐郞-正六品) 등을 역임하였다.
2.관직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從六品)에 좌천되었으나 전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고, 곧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從事官-從六品)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공로로 지평(持平-正五品) 으로 승진되었다.
1593년 이조좌랑(吏曹佐郞-正六品)에 체직, 당시의 폭주하는 대명외교문서 제작의 필요와 함께 지제교(知製敎)·승문원교감을 겸대하였다. 1594년 이조정랑(吏曹正郞-正五品)으로서 역적 송유진(宋儒眞)의 옥사를 다스리고 그 공로로 가자되면서 사복시첨정으로 승진하였으며, 곧 집의(執義-從三品)에 초수(超授)되었다.
같은해 광해군(光海君-조선제15대왕)의 세자책봉을 청하는 주청사 윤근수(尹根壽)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군기시정(軍器寺正-正三品)에 제수되었다.
1595년 함경도어사와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正四品)을 거쳐 장악원정(掌樂院正-正三品)·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正四品)· 종부시정(宗簿寺正-正三品)· 세자시강원필선·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正五品)·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正四品)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正四品)·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從三品)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99년 선조(宣祖-조선 제14대왕)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과 함께 동부승지(同副承旨-正三品)에 발탁되었고, 같은해 형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병조참지(兵曹參知-正三品)· 우부승지(右副承旨-正三品)· 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 예조참의(禮曹參議-正三品)· 대사간(大司諫-正三品)· 병조참의(兵曹參議-正三品)를 역임하였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합찬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從二品)에 승자되고 곧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從二品)이 되었다. 1602년 충무위부호군(忠武衛副護軍)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거쳐 예조참판(禮曹參判-從二品)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병조참판(兵曹參判-從二品)·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正三品)·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正三品) 도승지(都承旨-正三品).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從二品)· 병조참판(兵曹參判-從二品)·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04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正二品)에 오르면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正二品)이 되었고, 그뒤 병조판서(兵曹判書-正二品)· 예조판서(禮曹判書-正二品)· 상호군(上護軍-正三品)· 경기관찰사(京畿道觀察使-從二品)등을 역임하였다.
3.계축옥사로 유배
1608년(광해군 즉위) 선조애책문(宣祖哀册文)을 짓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正二品)· 예조판서(禮曹判書-正二品)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세자의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從一品)에 승자되었고, 1610년에는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從二品).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從二品)·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正二品)을 겸대하였다.
그러나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으로서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16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김제남(金悌男)에의 가죄(加罪)와 함께 다시 논죄된 뒤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1621년에 사면되었다.
1623년(인조 1) 3월 인조(仁祖-조선 제16대왕)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吏曹判書-正二品) 겸 예문관(藝文館-正三品衙門)· 홍문관(弘文館-正三品衙門)의 대제학(大提學-正二品)에 중용되었고, 같은해 7월에 우의정(右議政-正一品)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左議政-正一品)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난하였으며, 같은해 9월 영의정(領議政-正一品)에 올랐다가 죽었다.
4.평가와 저술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전념하여 벼슬하기 전부터 이미 문명을 떨쳤고, 벼슬에 나가서는 서인인 이이(李珥)와 정철을 옹호한 것으로 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인하여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사림의 신망을 받음은 물론,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正宗) 또는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칭송되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군에 있다. 1651년(효종 2)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편서로는 《상촌집》·《야언 野言》 등과 〈현헌선생화도시 玄軒先生和陶詩〉·〈낙민루기 樂民樓記〉·〈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 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황화집령 皇華集令〉 등이 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상촌 신흠선생 유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