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오윤겸(吳允謙)

야촌(1) 2011. 1. 23. 17:58

■ 오윤겸(吳允謙)

 

[요약정보]

◇자 : 여익(汝益)

◇호 : 추탄(楸灘)/토당(土塘)

◇시호 : 충간(忠簡)

◇시대 : 조선중기

◇생졸년 : 1599년(명종 14)~1636 (인조 14)

 

[관련정보]

[문과]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丁酉) 별시(別試) 병과(丙科) 1위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15년(158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45위

 

[상세내용]

1559년(명종 14)∼1636년(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字)는 여익(汝益), 호(號)는 추탄(楸灘) 또는 토당(土塘)이다.

 

1. 가계와 출사

    선공감역 희문(希文)의 아들이고,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9년 전강에서 장원하여 영릉참봉(英陵參奉)·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 등을

    역임하였다.

 

2. 관직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從事官-從六品)으로 발탁되었으며, 시직(侍直)을 거쳐 평강현감(平壤縣監-從六品)으로 5년간 봉직하면서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현감(縣監-從六品)을 그만둔 뒤 한때 결성(結城)에 우거하였다가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從六品)· 이조좌랑(吏曹佐郞-正六品)· 지제교(知製敎)· 부교리(副校理-從五品)를 역임하였다.

1602년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하여 있던 스승 성혼(成渾)을 변호하다가 시론(時論)의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京城判官-從五品)으로 출보(黜補)되었으며, 그뒤 7, 8년간 안주목사(安州牧使-正三品) · 동래부사(東來府使-從三品)등의 외직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안주성의 축조를 담당하였으며, 북도순안어사(北道巡按御史)로서 함경도의 민폐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비로소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 우부승지(右副承旨-正三品)· 좌부승지(左副承旨-正三品)등을 역임하였으며, 당시의 권신인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를 반대, 사림과 대립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린 바 되어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從二品)로 좌천되었다.

1년 남짓 관찰사(觀察使-從二品)로 재임하는 동안 기민(饑民)을 구제하고, 한편으로는 영월에 있는 단종(端宗)의 묘를 수축하여 그 제례절차와 각 고을로부터의 제수마련 법식을 제정하여 이후 이를 준용하게 하였다.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正三品)가 되었으나, 집권세력인 북인의 발호로 계축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계가 혼란해지자 늙은 어버이의 봉양을 구실로 광주목사(廣州牧使-正三品)를 자원하였다.

1617년 다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正三品)가 되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정사로서 사행400여명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명을 쇄환하였는데, 이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다시 정상화되었다.

1618년 폐모론이 북인들에 의하여 제기되자 이를 반대, 정청(庭請)에 불참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선영하의 토당(土塘)으로 물러나 화를 피하였다.

1622년 명나라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하극사(賀極使)로 선발되어, 육로가 후금에 의하여 폐쇄되었으므로 바다로 명나라를 다녀와 그 공으로 우참찬(右參贊-正二品)에 올랐다.

이듬해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大司憲-從二品)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吏曹-正二品) 형조(刑曹-正二品). 예조(禮曹)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북인 남이공(南以恭)의 등용문제로 서인이 노서(老西)· 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김류(金瑬)· 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의 영수가 되어 남인(南人). 북인(北人)의 고른 등용을 주장, 민심의 수습을 꾀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어 예조판서(禮曹判書-正二品).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正二品) 를 거쳐, 1626년 우의정(右議政-正一品)에 올랐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고 자전(慈殿)과 중전을 봉행하여 먼저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며, 환도 뒤 좌의정(左議政-正一品)을 거쳐 1628년 70세로 영의정(領議政-正一品)에 이르렀다.

이때 노서·소서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자 이의 중재에 힘썼으며, 특히 경연에서 정치혁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에의 전념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인조(仁祖-조선의 제16대왕)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고 또 부묘(祔廟)하려는 논의가 일자 이에 반대하여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正一品)로 물러났다가 1633년 좌의정(左議政-正一品)에 재임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인열왕후(仁烈王后: 仁祖妃)의 상에 총호사(摠護使)로서 과로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었다.

 

3. 업적과 평가

    예론에 일가견을 가져, 특히 인조 생부의 추숭과 부묘론에 있어 선조(宣祖-조선의 제14대왕)의 왕통을 이어받은 인조는 선조가 비록 할아버지이기는 하나 예묘(예禰廟: 아버지의 사당)에 해당되므로 왕이 아닌 대원군(大院君: 仁祖 生父)을 예묘로 삼는 것은 예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부묘반대론의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외직에 있으면서 평강현과 경성부의 민폐를 다스려 선치수령(善治守令)으로 명성을 얻었고, 중앙관으로는 온아단수(溫雅端粹)하고 공정한 자세를 견지, 주위의 촉망을 받았다.

만년에 재상의 자리에 10여년간 있을 때 백성의 편의를 위하여 연해공물(沿海貢物)의 작미(作米)와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하고 명분론의 반대를 물리치면서까지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였으며, 또한 사림을 아끼고 보호함으로써 어진 재상이라 불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경제(經濟)의 재주가 부족하고, 시폐와 왕의 잘못을 직언하는 기개가 모자라 평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덕업의 수양에만 힘쓸 뿐 사장(詞章)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그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조리가 있고, 시는 맑으면서도 운율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하며, 성혼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귀(李貴)·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김류 등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이귀와는 동문수학에 외가로 척의가 있고, 임진왜란중에 친교가 두터웠다. 다만, 뒤에 노서·소서의 대립에 이귀가 소서의 영수가 되어 추숭을 적극 추진하자 틈이 벌어졌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조정에 시호를 청하지 말 것과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게 하였으나, 1663년(현종 4)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광주(廣州)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고,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과 소차를 모은 《추탄문집》을 비롯하여 《동사일록 東槎日錄》·《해사조천일록 海槎朝天日錄》 등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楸灘文集  ◇瑣尾錄

 

 


↑추탄 오윤겸의 필적이다.

 

●오윤겸 선생의 묘소

   1559(명종 14)~1636(인조 1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 토당(土塘).  아버지는 선공감역(繕工監役) 희문(希文)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재상의 묘소를 지키는 문인석과 동자석, 그리고 비갈이 옛일을 말해 주는듯 하다

 

↑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 藝文館 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贈諡  忠貞 吳公允謙之墓

    (祔左). 貞敬夫人慶州李氏 之墓.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증시충정오공 윤겸지묘(부좌)

정경부인경주이씨 지묘 ) 라 묘비에 기록되어 있다.

 

즉 정일품관 영의정 겸 영경영에 홍문, 예문, 춘추관 관상감사를 겸하여 세자의 스승으로서 시호를 충정이라 하니 오공의 묘는 부인의 왼편에 모시노라, 부인은 정경부인 경주이씨이다.

 

※ 배위(配位)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고려말 17世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11대손으로, 21世 청호공(淸湖公) 희((暿)의 장자인 문안공(文安公) 이문형(李文炯)의 현손(고손)인 26世 군기사 첨사공(軍器寺 僉使公)이응화(應華)의 장녀(長女)이다 

 

해주오씨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때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고비로 중앙정계에 진출, 기라성 같은 명현(明賢)들을 배출 하면서 명문의 위치를 굳혔다.

 

특히 인조반정 이후 우의정, 좌의정을 거처 영의정에 오른 오윤겸(吳允謙) 선생은 당대의 거목이었다.

그는 선조조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 이조좌랑(吏曹佐郞), 부교리(副校理)등을 역임 하였다. 한때 스승인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모함을 받아 사직 하기도 했으며 정인홍(鄭仁弘)을 탄핵 하다가 좌천 되기도 하였다.

 

광해군 9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서 회답사(回答使)가 되어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 320여명을 데려오는 활약을 하였다. 이때 부터 일본과 국교가 재개되었다고 한다. 그후 폐모론을 반대 하다가 탄핵받았고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인조반정후 서인이 분열될때 노서(老西)의 영수가 되어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이괄(李适)의 난때는 왕을 공주(公州)에 호종 하였으며 정묘호란(丁卯胡亂)에는 소현세자와 함께 강화(江華)에 피난 하였다.

 

돌아와 좌의정(左議政)을 거처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는데 인재등용을 공정히 하는 명재상으로 이름이 났다. 공의 손자 오도일(吳道一) 은 숙종조에 대제학, 병판을 지냈으며 현손 오명항(吳命恒)은 영조조에서 우의정을 지내는 등 인재들이 줄을 잇게 되었으니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묘역 입구에 잘 조성되어 있는 연못이 거울처럼 맑았다.

 

 

↑유덕재(維德齋) 는 오추탄 선생의 재실이다.

 

모름지기 산이 우뚝하면 골이 깊고 물이 맑고 깊으면 근원이 먼것은 천하의 이치이다. 면면이 이어져 오는 공의 업적과 가르침이 후손들에게 전해져 나라에 동량이 되는자 부지기수이니, 이것이 모두 선조를 빛내는 사업이요 이것이 후손된 도리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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