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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죽재기(雙竹齋記)

야촌(1) 2011. 1. 15. 03:00

출전>>두암집

 

쌍죽재기(雙竹齋記)

 

두암(斗庵) 김약련(金若鍊)

[생졸년] 1730(연조 6)~1802(순조 2)

계축년 가을에 문중 사람인 김사묵(金士默)이 개성에서 두암(斗庵)으로 나를 찾아왔다. 서로 악수를 하고 친척간의 우의를 표하였다.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제 집 동쪽은 선죽교(善竹橋)와 가깝고, 서쪽은 죽림당(竹林堂)과 가깝습니다."


아! 포은 정몽주 선생의 순절 사적과 익재 이제현의 전장이 고을의 좌우에 있어서, 사람들이 포은· 익재(益齋) 선생을 함께 추모하고, 존경하고 있다. "당신은 무얼 하시면서 사시고 계십니까?" "저의 집은 가난합니다. 채소를 가꾸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여분이 생기면 여종을 시켜 개성 성중(城中)에 가서 팔게 합니다. 성중은 저의 집에서도 가깝습니다. 또 성안에 유식자(遊食者: 글자 그대로 놀고 먹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로 양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도 않고 또 특별히 관직에 있지도 않은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재산이 있는 계층이다. 반계 유형원은 이런 유식자 계층을 없앰으로써 경제를 안정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들이 많은데, 채소가 귀해서 팔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주로 쌀과 고기와 바꾸어 부모님을 공양하고 있지요. 평소에는 가문 내의 자제들과 함께 문장을 논하고 또 그들에게 학업을 부과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개성은 큰 도회지입니다. 관아 정사에 득실이 많지요. 그러나 저는 입을 닫고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또 향중 논의에 시비가 붙어도 저는 번번이 귀를 덮고 듣지 않습니다. 제가 앞에서 얘기한 두 가지 이외에는 달리 업으로 삼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혹시 이것보다 좋은 업이 있으면 저에게 가르쳐 주실 수 없습니까? 그러면 제가 좀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말하였다. "당신이 사는 곳은 정말로 좋은 자리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업으로 삼고 있는 일도 그리 나쁘지 않는 것 같고요. 저는 대단히 궁벽한 곳에 살고 있고, 또 제가 하는 일도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당신의 업을 넓혀줄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죽사현(竹似賢)」 1편을 외우고 다시 "대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살 수 없네〔不可居無竹〕"라고 시 한 구절을 읊어, 그 사람이 갈 때 전별하려고 하였다. 손님이 일어나 나에게 청하면서 말하였다.

 

"우리 집은 선죽교와 죽림당 사이에 있습니다. 선죽교는 오래되었지만 충정의 피가 선명하게 어려있고, 또 죽림당은 허물어졌지만 아직 어진 선비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지요. 그곳에 가서 옛 사람들을 상상하면, 100세(世)가 하루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제 집을 '쌍죽재(雙竹齋)'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저의 집의 기문을 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실 수 있는지요?" 내가 말하였다. "저는 문장이 졸렬해서 당신의 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업이 아까 저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한두 가지 뿐이라면 '자락(自樂)'이라고 이름 붙여도 괜찮을 것 같은데, 당신이 이 이름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으시고 쌍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쌍죽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두 사적에 있는 '죽(竹)'자에서 착안한 것이 아니라 포은과 익제를 생각하고 그리 하신 것 같으니, 당신은 이미 그들의 정신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데 제가 글을 써서 기록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가 떠나려 하면서도 가지 않고 재삼 부탁하길래, 마침내 서로 주고받았던 대화를 글로 써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