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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강서원 강당기(龜岡書院 講堂記)

야촌(1) 2011. 1. 6. 18:33

■ 구강서원 강당기(龜岡書院 講堂記)

 

우리나라는 해 돋는데, 가까운 지역이다.

수. 화. 목. 금.  토(水火木金土)의 오행(五行)에 있어서는 목(木)에 속하는 땅이요.

 

춘하추동(春夏秋冬) 사계절(四季節)에 있어서는 춘(春)에 속하는 땅이니, 문명(文明)한 운수가 사방(四方)의 다른 지역(地域) 보다도 앞설 것인데, 오히려 중국(中國) 보다도 뒤 떨어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아마도 지역이 좁고 기운이 맞지 않아서, 삼광(日. 月. 星辰)과 오악(五嶽 : 한국의 이름난 다섯 산을 뜻 한다) 정기(精氣)가 흩어 저 모이지 않는 까닭이 아닌가 한다.

 

중국으로 말하면, 오제(五帝), 삼왕(三王)으로 부터, 진(秦), 한(漢). 진(晉). 수(隋). 당(唐). 송(宋)을 지나는 동안에 문화와 물질이 거의 전통을 이루었고, 다스리고 어지러운 것이 거의 국한(局恨) 되었다. 

 

우리나라는 오히려 그 풍속이 미개하고, 또 언어도 바르지 못 하였는데, 단군은 신인(神人) 이면서도 문자(기록을 말함)를 남기지 못하였고, 기자(箕子)는 성인(聖人) 이면서도 전기(傳紀)가 없었는데, 당(唐)나라 만년(晩年)에 와서, 비로소 최고운[崔孤雲-최치원(崔致遠]이 나시었고, 원(元)나라 말기(末期)에 와서, 익재선생[益齋先生-이제현(李齊賢)]이 나시었으니, 이 두 현인(賢人)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는 끝내, 미개국(未開國0이 될뻔 하였다.

 

고운선생(孤雲先生)은 북(北)으로 중원(中原)에서 공부 하여서 그 글이 한 시대에 뛰어났는데, 애석하게도 산문(山文)에 자취를 감추어서 불교만을 숭상하였고, 익재선생(益齋先生)은 세상에 드문 호걸로서 육경(六經)과 성인(聖人)의 도(道)를 얻어서 덕행(德行)이 중국(中國)과 우리나라에 드날리었고, 공적이 어지러운 세상에 태어나서 글을 쓰고, 글을 삭제(削除) 하는 예(例)가 옛날 주자(朱子)와 비슷하고, 이단[異端 : 자기가 믿는 이 외의 도(道)]을 물리치는 뜻이 명도(明道) 이천(伊川)과도 같았다.

 

원(元)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정복(征服) 시키려는 관청(官廳)을 설치하려고 의논하였을 때에, 구경(九經)의 뜻을 풀이하여 부당한 조건과 도당(都堂)의 서적(書籍)을 교정(校正) 하였다는 사실을 들어서 좌임(左袵 : 오랑케의 풍속)하는 풍속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여, 동방(東方)에서 유절(有切) 하기가 어찌 이족(異族 : 다른민족)의 아래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문장(文章)이 넓고, 크고, 밝고, 점잔 하여 쇠세(衰世)의 폐습(陛習)을 벗고, 옛사람(古人)의 작풍(作風)을 닮았기 때문이다. 이서(而西)로는 천독[川蜀 : 이천(伊川)의 학파(學派) 들과 소동파(蘇東坡)의 학파들] 학파(學派) 들에게 초대(招待)도 받았고, 남(南)으로는 오(吳)나라 초(楚)나라에 놀아서 산천(山川)의 장관(壯觀)을 다 보았는 것이 또 장점(長點)이 되었고, 가치(價値)가 높아 졌었다.

 

그러기에 선생(先生)의 이름이 천하(天下)에 떨쳐서 중국학자(中國學者)들도, 앞설 수 없었으니 요수(姚遂). 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 같은 모든 사람들과 문장(文章)의 교제가 깊었고, 촌탕선생[村湯先生=탕병룡(湯炳龍)]같은 분은 원(元)나라에서도 이름 높은 학자였는데, 선생(先生)의 화상찬문(畵像讚)에 쓰기를 「사람으로서는 으뜸이요.

 

선비로서는 통(通)한 분이라 학문(學問)도 충분(充分)하고, 도(道)도 높았다」하였고, 목은(牧隱) 이선생(李先生)은 선생의 행장((行狀)을 쓰기를「정대고명(正大高明)한 학문(學文)은 동국(東國) 사람들이 모두 태산북두(太山北斗)와 같이 쳐다 보았다.」하고

 

또 말하기를「우리나라에서 글하는 선비들이 속루[俗陋 : 비속(鄙俗)하고 누열(陋劣)함] 전아[典雅 : 법도(法度)에 맞아 아담(雅淡ㆍ雅澹)함]한 글을 쓰게 된 것은 다 선생(先生)이 교화(敎化)하였다 하였으니」 이런 것을 미루어 말한다면 도덕(道德)과 사업(事業)과 문장(文章)이 옛날에 삼불후(三不朽)라 하는 것을 선생(先生)은 실제로 겸하신 어른이다.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유교문화를 도와서 많은 현인(賢人)들을 주염계[周濂溪 : 중국 송대(宋代)의 철학자]와 정명도(程明道)에 견주게 하였고, 이 작은 나라를 조(趙)나라와 송(宋0나라에 짝이 되게 하였으니 고려 말기에 선생(先生)이 나신 것은 주(周)나라 말년에 규성[奎星 : 문장(文章)의 별)이 나타난 것과 같은 일이다.

 

선생(先生)이 송도(松都)에서 나시었고, 송도(松都)에서 벼슬하였기 때문에, 송도(松都)에서 가까운 고을 금천(金川)에 서원(書院)을 세워서 제향을 치른 바가 되니, 기사(己巳) 1689년(숙종 15년)에 영남(嶺南) 선비들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하는 말이「우리나라가 좁고 모퉁이에 있어서도 소중화(小中華)라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모두들의 대답이 부사(父師)들의 팔조목(八條目)의 교화*(敎化)일 것이요.

또는 익재선생(益齋先生)의 일어킨 공(功)일 것이라 하였다.

 

「우리 영남은 신라와 고려이후로 글과 글씨로 이름을 낸 사람이 천리(千里) 거리에 선비가 한명씩 백년(百年) 동안에 유학자(儒學者)가 한명씩 나서, 육경(六經)의 학문을 듣기도 어려웠는데, 지금은 크게 변하여 집집마다 글 읽는 소리가 들리고, 정주학(程朱學)이 아니면 배우지 않고, 주공(周公)과 공자(孔子)가 아니면 법 받지 않아서 추노(鄒魯)의 고을을 이루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모두가 하는 말이「정포은(鄭圃隱=鄭夢周). 길야은(吉冶隱=吉再). 여파(餘波)요.

또한 선생이 인도하신 공(功)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여 이 좁은 나라가 소중화(小中華)가 되었고, 소중화(小中華)가 추노향(鄒魯鄕)이 되었으니 제(齊)나라가 변하여 노(魯)나라가 되는 것이나 다를바 없는 것이다.

 

우리 영남에서 만이 그 고마움을 갚는 보답이 없어서야 될 일이랴. 하물며 계림(鷄林)은 선생의 관향((貫鄕)이며, 채읍지(采邑地)라 사우(祠宇)를 세워서 제사 드리기를 어찌 행(行)하지 않으리오」하니 모두 말하기를 당연(當然)하다 하였다.

 

이에 구강(龜江)에 터를 정(定)하여 서원(書院)을 세우고, 그 다음해 경오(庚午) 1690년((숙종 16년) 구월(九月)에 선생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향을 치르고 선생의 후손(後孫) 명징(明徵)이 서(西)로 수백리를 달려가서 호서지방[湖西地方=충북보은장산영당(長山影堂)을 말함]에 있는 일가사람 담경(覃慶)이 봉안(奉安)하고 있는 선생의 유상(遺像)을 모사(模寫)하여 묘우(廟宇)에 뫼시었다.

 

사방(四方)에서 모여든 선비들이 모두 경축(慶祝)하였다. 그 후(後) 백년(百年)을 지나서 금년(今年) 기유[己酉 : 1789년(정조 13)]에 이사문(李斯文) 우암(宇嵒)이 경주(慶州)에서 서울 까지 와서 나 완산(完山) 이헌경(李獻慶)에게 축문(祝文)을 청(請)하고 또 편액(扁額) 액호(額號)를 청하기에 내 말하기를 선생(先生)은 우리나라에서 선사(先師)이라 선생을 찬양(讚揚)하는 일에 어찌 사양하랴마는 내가 늙고 영리하지 못한 사람이라 어찌 선생을 빛나게 하리오하고, 어렵게 여기었으나 더욱 간절히 청하기에 마지못하여 그 전말을 기록하고 묘우(廟宇)는 문시사(文始祠)라 하고, 당(堂)은 적취당(覿醉堂)이라 하고, 동재(東齋)는 시술재(時述齋)라 하고, 서재(西齋)는 시존재(是遵齋)라 하고, 문(文)은 종앙문(宗仰文)이라 하니, 이렇게 하면은 그 뜻이 맞을 것이다. 우암((宇嵒)은 즉 선생의 후예(後裔)이다.

 

금상(今上) 13년 기유[己酉=1789년(정조 13)]추석(秋夕)에 가선대부 예조참판(嘉善大夫 禮曹參判) 완산(完山) 이헌경((李獻慶)은 삼가 짓고,

 

후손(後孫) 통정대부 이조참의(通政大夫吏曹參議) 집두(集斗)는 글씨를 쓰다.

 

[참조내용]

위 강당기의 국역은 판윤공(判尹公=之帶)의 5대손인 26世 청와공(淸窩公=景漢) 후손 명징(明徵)의 11대손 되는 경주 양월출신 상윤(相潤) 종친이 구강서원 강당기 편액(扁額) 원문(原文)을 사진으로 찍어  진성후인(眞城后人) 전 성균관부관장(前成均館 副館長) 소원(韶園) 이수락(李壽落) 선생(에게 번역을 의뢰하여 1999년에 받은 국역문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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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艮翁先生文集卷之二十一/간옹 이헌경 저

   

龜岡書院 講堂記

 

我東近日出之域。於五德屬木。於四序屬春。是宜文明之運先於四方。而反後於中華何也。豈以地理有偏全。風氣有蚤暮。三光五嶽之精。散而不聚歟。以中華言之。則自五帝三王歷秦漢晉隋唐宋。文質幾統矣。理亂幾局矣。我東猶尙顓蒙其俗。咿嗢其語。檀君神焉而缺於文字。箕子聖焉而闕於傳紀。唐之晩。始得崔孤雲。元之季。始得益齋先生。靡二賢我東其終於天荒乎。然孤雲北學中原。頗尙笁敎。惟益齋先生以間世豪傑之才。得六經聖人之道。德行聞於華夷。功烈見於危亂。筆削之例。暗合於紫陽。闢異之旨。密傳於二程。當元朝議置征東省於我東也。演九經之義。投都堂之書。終使三韓之民。得免左袵之俗。其有功於東方。豈居夷吾下哉。且其文章。渾厚博大。淸遒雅健。固已振衰世之陋。追作者之古。而西聘川蜀。南游吳楚。極山川瓌壯之觀。又長一格而增倍價矣。是以先生之名。振於天下。中國學士莫之或先。姚遂,閻復,元明善,趙孟頫諸人。皆爲紵縞之交。北村湯先生亦元朝名學士也。贊先生畫像曰。爲人之宗。爲儒之通。於學則充。於道則隆。牧隱李先生撰行狀曰。正大高明之學。東人仰之若泰山北斗。又曰東方學文之士。袪其靡陋而稍爾雅。皆先生化之也。由玆以譚。道德事功文章。古之所謂三不朽者。先生實兼之。而倡起斯文。啓佑我聖朝儒化。使羣賢比盛於濂洛。偏邦匹美於趙宋。則孰知麗季之降先生。猶周末之現奎宿耶。先生生於松京。仕於松京。故松京之傍郡金川。建院以祀先生。我肅宗十五年己巳。嶠南章甫颺言于衆曰。我東以偏隅而名小中華者何故。咸曰父師敎條之化。而亦惟先生興起之功乎。惟我嶠南自羅麗以還。以騷墨立名字者雖亦千里出一士。百年推一儒。而六經之學。蔑之聞焉。今也丕變之俗。家絃戶誦。非程朱不師。非周孔不法。蔚然爲鄒魯之鄕者何故。咸曰圃隱冶隱之派。而亦惟先生䟽導之力乎。然則自偏隅而中華。自中華而鄒魯。不翅齊一變至魯。而顧我嶠南獨無報祀其賜者乎。况雞林實先生之貫而采也。柌烏可已也。咸曰諾。於是龜岡叶吉。院宇隆成。以越明年庚午九月。妥先生之祠板而祭之。先生之後孫明徵南走數百里。得先生遺像於湖西宗人覃慶家。摸寫以歸。揭虔祠中。四方來觀者大龢會相慶。于後百年。至今己酉。李斯文宇嵒甫自雞林來京師。請記其事於完山李獻慶。且請扁額之號。獻慶曰噫。先生東人之先師也。於贊揚先師乎何辭。而抑不佞老禿翁耳。髦言不足以華奈何。屢辭請益懇。卒叙其顚末爲記。名其廟曰文始。堂曰覿醉。東西齋曰時還曰是遵。門曰宗仰。顧名而思。庶幾得其義哉。宇嵒亦先生之後裔云。

 

上之十三年己酉 嘉平節 嘉善大夫 行 禮曹參判 完山 李獻慶 慶謹記

後孫 通政大夫 行 吏曹參議 集斗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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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내용]

 

●28世 이명징(李明徵) : 익재공(益齋公)의 11대 손이요. 판윤공의 5대손인 26世 청와공(淸窩公) 휘(諱) 경한(景漢=生父,

   洪의 次子)의 손자(孫子)이고, 아버지 상현(尙賢)의 차자(次子)로 자는 대보(大保), 관(官)은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 이우암(李宇嵒): 慶州 淸窩公 門中의 후손

 

● 이헌경(李獻慶) 1719(숙종 45)∼1791(정조 15).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성경(星慶). 자는 몽서(夢瑞), 호는 간옹(艮

    翁). 기문을 쓰신 때가 기유년 1789년으로 익재공 후손 이우암(李宇嵒)선생께서 경주에서 한양으로 올라와 기문을 청

    했다고 한다.

 

● 30世 이담경(李覃慶)

    [생몰년] : 1641년(인조 19)~1708년(숙종 35) 壽 67歲. 

 

    간옹(艮翁)은 오늘날의 국보 제110호 익재 이제현선생의 화상을 소장했던 분으로 세계는 아래와 같다.

 

◇17世 익재공 제현(齊賢) →18世 운와공 달존(達尊)→19世 소부윤공 학림(學林)→20世 대언공 담(擔)→21世 청호공 희

   (暿)→22世 참판공 계반(繼潘)→23世 판관공 식(埴)→24世 눌헌공 사균(思均)→25世 현감공 건(健 : 생부 사권)→26世

   생원공 정종(貞宗)→27世 윤(胤)→28世 승의랑공 복익(復益)→29世 오(墺)→30世 담경(覃慶).

    

 

● 34世 이집두(李集斗)

    [생졸년] : 1744년(영조 20)~1820년(순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중휘(仲輝), 호(號)는 파서(琶西), 또는 구학(瑾鶴)이다. 좌의정 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의 현손(5대손)으로 감역(監役-從二品), 이진원(李進源)의 아들이다.

 

1774년(영조 50)에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하여, 검열(檢閱-正九品), 주서(注書-正七品)를 지내고, 1784년(정조 8) 이조좌랑(吏曹佐郞-正六品)으로 한식제(寒食祭)를 잘 치른 공으로 문성 진 첨절제사(文城鎭僉節制使-從三品)에 올랐다.  

 

이어 장령(掌令-正四品), 형조참의(刑曹參議-正三品), 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 대사성(大司成-正三品), 승지(承旨-正三品), 안동부사(安東府使-正三品)등을 거쳐, 대사헌(大司憲-從二品)이 되었다. 1798년(정조 22),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從二品)가 되어 변방의 야인을 잘 다스렸고, 1800년(정조 24)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순조 즉위 후 1804년(순조 4) 8월 7일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正二品)에 제수되었고 그 후에도 1809년(순조 9),1811년(순조 11), 세 차례에 걸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였다.

 

이어 공조(工曹), 예조판서(禮曹判書-正二品)가 되고, 1810년(순조 10)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갔다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從一品)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글씨에 뛰어 났으며 정조(正祖 : 제22대왕)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의 자서(自序)를 해서(楷書)와 전서(篆書)로 첩(帖)을 써 바치기도 하였다.  

 

병인 1806(순조 6)년 9월에 경주 시조탄강지(始祖 誕降地) 아래에 세운 표함 유허비(瓢巖 遺墟碑) 및 경주 구강서원 강당기(龜岡書院 講堂記) 글씨가 바로 정헌대부 형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正憲大夫刑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파서 이집두(李集斗)공의 글씨이다.

 

묘지는 충북 증평군 증평읍 미암리 산109-17의 선영 아래에 있다.

 

 

 

 

▲경주 구강서원 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