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정기룡장군 신도비명 병서(鄭起龍將軍神道碑銘 幷序)

야촌(1) 2010. 12. 8. 20:45

송자대전 제164권 >

 

■ 통제사(統制使) 정공(鄭公) 신도비명 병서

 

우암 송시열 찬(尤庵 宋時烈 撰)

 

통제사 정공 기룡(鄭公起龍)은 곤양인(昆陽人)이다. 초명(初名)은 무수(茂壽)였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공(公)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창명(唱名)할 무렵에 선조대왕이, 용(龍)이 종루가(鐘樓街 지금의 종로)에서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 나서 인재를 물색했는데, 공을 얻고 괴이하게 여겨 지금의 이름을 하사했다.” 고도 한다.

 

공은 어려서부터 식우지기(食牛之氣 소를 삼킬 만한 기상을 말함)가 있었고 상호(桑弧)를 쏠 적부터 관인(官人)의 양상을 흉내 내어 뭇 아이들을 위복(威伏)시켰으므로 아이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13세에 아버지의 상(喪)을 만나 여묘(廬墓) 살이를 하면서 곡읍(哭泣)하였고, 상을 마치고는 글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활쏘기 배우기를 청하니, 그 형 인룡(仁龍)이 금지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일찍이 형과 함께 시험장에 갔다가 형이 병이 나서 수레에 실려 와서 죽으매, 공이 크게 통곡하고 마침내 그 업을 버리고 형을 위하여 3년 동안 고기 없이 밥을 먹었다. 3년이 지난 뒤에 족인(族人)이 그 어머니에게 권하여 그 업을 마치도록 면려하게 하였다.

 

이미 무과에 급제하여 북쪽 국경(國境)을 수위(戍衛)할 때에는 북수(北帥)가 그 척호(陟岵)의 정을 가엾이 여겨서 기한을 앞당겨 귀향을 허락하였다. 임진왜변(壬辰倭變) 때에는 방어사(防禦使) 조경(趙儆)을 따라 남하(南下)했는데 그에게 적을 방어할 책략을 제의하니, 조경이 기뻐하여 별장(別將)으로 삼아 왜적(倭賊) 5백을 거창(居昌)에서 크게 패배시켰다.

 

또 잇따라 금산(金山)의 적을 공격하여 한참 싸움이 벌어졌을 때 조경이 적에게 사로잡혀가자, 공이 칼을 뽑아들고 적중에 들어가 그를 빼앗아 돌아왔다. 이어 조경에게 청하여 어머니를 찾아보고 지리산(智異山)에서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을 찾아갔는데, 마침 이광악 이 진주(晉州) 싸움에 나가면서 공을 가수(假受)로 삼았다.

 

이때 김공 성일(金公誠一)이 영남 병사(嶺南兵使)로서 공을 격서(檄書)로 불러 유격병(遊擊兵)을 거느리고 뒤를 막게 했다가 이윽고 상주 판관(尙州判官)으로 삼았다. 목사(牧使) 김해(金澥)가 평소에 공의 능력을 들은 터라 매사를 공에게 자문하였다.

 

왜적이 바야흐로 주성(州城)에 웅거하였는데, 공이 분초적(分抄賊) 4백여 명을 이미 격살시키고 수급(首級)을 순영(巡營)에 올리고, 또 밤에 불로 성을 공격하여 크게 이겼는데 이 일이 보고되자 공에게 진판관(眞判官)을 제수하였다.

 

승지(承旨) 윤승훈(尹承勳)이 영남(嶺南)을 시찰하고 돌아가서 공의 토적(討賊)한 실상을 말하니, 상이 공에게 임시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시켰다가 이윽고 진 목사(眞牧使)를 제수하고 감사군 대장(敢死軍大將)을 겸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이 토인(土人)으로 난을 일으킨 자를 평정한 뒤에 그들을 모아 둔전(屯田 군사를 주둔하여 농사를 짓게 하는 것)을 개설하여 양식을 자급하고 남은 곡식으로는 기민(飢民)들을 진휼(賑恤)하였으며, 그중에 날쌔고 건강한 자를 뽑아 병사로 삼으니, 모두가 감동하여 도적을 만나면 죽기를 다투었기 때문에 그 군사를 ‘감사군’이라 일컬은 것이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왜가 다시 쳐들어오매, 공이 아홉 고을의 관원과 더불어 가속(家屬)을 거느리고 금오성(金烏城)을 지켰는데, 체찰사(體察使)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공을 불러 장수를 삼았다.

 

고령(高靈)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을 때 공이 말을 달려 만인(萬人) 총중에 들어가 홍의(紅衣)를 입은 적장을 잡아 돌아와 승첩을 아뢰니,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시켜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를 제수하므로 군영을 성주(星州)에 개설하였다.

 

얼마 있다가 상주에서 조령(鳥嶺)을 넘어서 호서(湖西)의 영동(永同)에 주둔한 적을 나아가 토벌하였다. 이때 적장 청정(淸正)이 장차 대병(大兵)으로 경사(京師)를 침범하려다가 천병(天兵 명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달아났는데, 공이 보은(報恩) 적암(赤巖)에서 이들을 만나 앞장서서 말을 세우고 활을 쏘아 수십 명의 적을 거꾸러뜨렸는바 의용이 매우 의젓하고 여유가 있어 보였으므로, 적이 공에게 대비가 있는가 의심하여 한참 동안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호서(湖西)와 영남의 피란민들로서 화를 면하게 된 자가 수십만 명이었다.

청정이 상주를 지나매, 공이 뒤따라 추격하여 뒤떨어진 적을 죽이고 또 천병과 더불어 경주(慶州)에 유진(留陣)한 적을 쳐부수었다. 천장(天將)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도산(島山)에서 싸우매, 공이 선봉이 되어 맨 먼저 진격하였으나 천병(天兵)이 후퇴하므로 공이 드디어 칼을 휘두르며 달려 돌아왔지만 적이 감히 추격하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연이어 거창(居昌)ㆍ함양(咸陽)ㆍ안음(安陰)ㆍ금산(金山)ㆍ상주(尙州)ㆍ성주(星州)ㆍ사천(泗川)의 적을 격살하였다. 공이 함양을 칠 적에 천장(天將) 이절(李梲)이 싸움에 패하여 죽자, 그 나머지 병사들이 공에게 소속되기를 원하므로 공이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황제가 이를 허락하고 이어 천조(天朝 명 나라 조정)의 총병관(摠兵官)을 삼았다.

 

공이 크고 작은 60여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작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쳤으나 일찍이 좌절되지 않았으므로 양경리(楊經理)와 도독(都督) 마귀(麻貴)가 다 격려하는 상전(賞典)으로 표패(票牌)를 주었고 사세용(史世用)은 시(詩) 2장(章)을 지어 주어 찬미하였다.

 

공은 의관(儀觀)이 웅위(雄偉)하고 눈빛이 횃불과 같았으며, 청렴결백하여 흠결이 없었고 항상 남의 곤궁함을 급히 여겨 자기의 사정을 돌아보지 않았다. 일찍이 왜적의 수급(首級)을 천장(天將) 조승훈(祖承訓)에게 주어 속죄(贖罪)하게 하였는데, 조승훈이 비록 받지는 않았으나 공의 의로운 소문은 현저하였다.

 

처음 조정에서 이공 순신(李公舜臣)을 위하여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를 설치하여 수군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뒤에 공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그 직임에 있다가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임술년(1622, 광해군14) 2월 28일에 군영에서 졸(卒)하니 나이 61세였다.

 

공의 자는 경운(景雲)으로 내행(內行) 또한 갖추어졌었다. 젊어서는 빈천하였다가 이미 귀(貴)하게 되어 그 아버지 호(浩)는 좌찬성(左贊成)을, 조부 의걸(義傑)은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증조 철석(哲碩)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추증하였다. 부인 강씨(姜氏)는 세정(世鼎)의 딸인데, 세정은 일찍이 주(州)의 아전이 되었다.

 

강씨가 도적을 피하여 진주성(晉州城)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손가락을 깨물어 적삼에 혈서를 써서 공에게 죽음을 고하고 마침내 그 어머니 및 소고(小姑 시누이)와 함께 촉석루(矗石樓) 아래 큰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공이 그 혈서 쓴 적삼을 곤양(昆陽)의 선영(先塋)에 장사 지냈다.

 

공의 수하에는 형의 아들 수린(壽麟)과 이희춘(李希春)ㆍ김천남(金天男)ㆍ김세빈(金世賓)ㆍ황치원(黃致遠)ㆍ김사종(金士宗)ㆍ정범례(鄭範禮)ㆍ노함(盧涵)ㆍ최윤(崔胤)ㆍ윤업(尹業) 등이 있었는데, 다 씩씩하고 용맹스러워서 적을 셀 수 없이 죽였으며, 공이 타던 신마(神馬)가 있었는데 평지에서 여섯 길이나 되는 호(壕)를 건너뛰었고 절벽(絶壁)을 오르고 험지(險地)를 건너기를 마치 날카로운 발톱, 빠른 날개가 돋은 것과 같아서 공이 적을 제압하고 위기를 벗어나는 데 그 힘을 많이 얻었다.

 

일찍이 공과 서로 떨어져 적에게 잡혔었는데 갑자기 공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삐를 잡고 있던 적을 물어 넘어뜨리고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공에게로 달려왔다. 뒤에 병들어 죽으매, 공이 제문을 지어 제사하였다. 대저 당시에 공을 응하여 나온 것들이 다 이러하였으니, 공이 시대에 응하여 태어났던 것을 알 수 있다.

 

공이 일찍이 항복한 왜적 수십 명을 죽인 것을 종신토록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공의 지위가 높은 반열에 올랐고 자손이 번창하였으니, 이 어찌 공이 활인(活人)의 공적이 매우 많기 때문에 원한 맺힌 것들이 그 경사의 보응을 손상시킬 수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후취(後娶)는 선전관(宣傳官) 권홍계(權弘啓)의 딸인데, 딸 하나를 낳아 생원(生員) 김시절(金是梲)에게 시집보냈고, 측실(側室)의 소출(所出)인 아들은 익린(翼麟)ㆍ득린(得麟)ㆍ덕린(德麟)ㆍ시린(時麟)으로 익린 득린은 다 무과(武科)에 합격하였는데, 장남은 첨지중추(僉知中樞)로 공의 제사를 받들었고, 딸은 첨사(僉使) 박언단(朴彥枬)의 아내가 되었다.

 

손자 하영(夏韺)ㆍ원영(元韺)ㆍ순영(舜韺)ㆍ미영(美韺)ㆍ우영(禹韺)은 익린의 소생이고, 두영(斗韺)ㆍ진영(震韺)은 득린의 소생이고, 시영(是韺)ㆍ찬영(燦韺)ㆍ은영(殷韺)ㆍ주영(周韺)은 덕린의 소생이며, 시린의 소생은 선영(善韺)이다.

 

대저 공은 편비(褊裨)로 일어나서 몸을 돌아보지 않고 국가의 위급함에 따랐다. 그래서 용맹으로는 도적을 죽이고 은혜로는 백성을 살려서 영남 전역을 소생시켰으며, 마침내 모(旄)를 세우고 월(鉞)을 잡아 그 지략이 산하(山河)를 포용하였으므로 성천자(聖天子)가 그의 설명을 듣고 백부(百夫)의 장(長)으로 삼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고금에 드문 바이다. 마땅히 금석(金石)에 새겨 한없이 전하는 한편, 국가의 광채도 나타내야 한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선조대왕 시대에 / 在宣廟世

섬 오랑캐 군사를 일으켜 / 島夷搆兵

뾰족한 어금니와 날카로운 손톱으로 / 銛牙利爪

우리 백성 피흘리게 하였네 / 血我生靈

 

이때 공은 한낱 편비였기에 / 公在褊裨

그 이름 알려지지 않았지만 / 未甚知名

주장에게 고한 것은 / 爰告主將

적을 부술 모책이었네 / 可破之策

 

마침내 별장(別將)을 맡겨 주니 / 遂任以事

드디어 그 힘을 뽐내어 / 遂奮其力

적을 많이 만날수록 / 見賊愈多

적은 더욱 죽어 갔네 / 賊愈死咋

 

주장이 실수하여 / 主將蹉跌

적의 소굴에 잡혀가자 / 虎口之委

말 돌려 쫓아가서 / 躍馬奔之

수많은 적의 칼날 쓰러뜨리고 / 萬刅披靡

적의 진중에서 주장을 빼앗아 / 奪之中堅

번개같이 돌아왔으니 / 旋若電馳

어찌 한의 이광(李廣)만이 / 漢之飛將

홀로 용명(勇名)을 떨치겠나 / 名豈獨專

 

옛날 조자룡(趙子龍)의 그 싸움 / 子龍昨戰

그 담력 견줄 만하였으니 / 其膽可肩

어찌 용맹스럽다 하지 않으리요마는 / 不寧其勇

의리 또한 누가 앞서겠는가 / 義孰與先

 

동쪽 서쪽에서 짓밟으니 / 東蹂西踏

흉한 오랑캐 손을 쓰지 못하였네 / 凶醜戢乍

 

남은 군량으로 구휼책 펴서 / 卹焉周餘

흩어진 난민(難民) 먹여 살렸네 / 喙食林野

 

창상(瘡傷)한 백성 어루만져 위로하고 / 摩手拊瘡

창고 열어 굶주린 백성 먹이니 / 剖鎖哺餓

어린이와 늙은이 문 앞에 모여서 / 稚耋聚門

공이 우리를 살렸다 하였네 / 曰公生我

 

이때에 모든 천장들이 / 維時天將

문과 무 훌륭했는데 / 文武洋洋

너나 없이 표패를 주었으니 / 爭遺票牌

그 광채 찬란하였고 / 有爛其光

 

글하는 사람들이 준 시는 / 詞人有贈

유화(柔和)하기 증민시(蒸民詩)와 같았네 / 穆如之章

 

황제가 공의 성명 듣고 / 帝聞其名

나의 장수 이절이 / 曰予將梲

싸움에 패하여 죽으매 / 戰敗而死

남은 군사 7백 명이 / 餘卒七百

의를 사모해 소속되기를 원하니 / 慕義願屬

네가 그들을 거느리라 하였네 / 汝其將之

 

이 조서가 천조에서 내려지니 / 綸音自天

오랑캐들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 獠漢愕眙

다들 천자가 / 咸曰天子

만리 밖을 환히 본다고 하였네 / 萬里明見

 

천자의 배려가 이와 같았거든 / 皇鑒如斯

하물며 우리 주상의 사랑이랴 / 矧我主眷

 

창과 독과 활과 도끼며 / 戟纛弓鉞

기(旗)와 절(節)이 찬란하여 / 旌卩有絢

천자의 위엄 의지하였으니 / 皇威旣仗

그 형세 물병을 거꾸로 세운 듯하였네 / 勢如瓴建

 

난리가 지나고 나라 평정되어 / 難去國平

공과 상 의논했으니 / 功賞斯論

한수(漢水)가 띠처럼 되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도록 / 將其帶礪

나라 운명과 함께 영원히 보존되리 / 與國永存

 

그러나 공은 항상 물러앉아 / 公常退坐

큰 나무 밑에 앉아 있었건만 / 大樹之根

마침내 큰 전공을 헤아려 / 卒乃稽馘

차례로 훈적에 오르게 되니 / 序之從勳

추증의 영광 또한 환히 빛나서 / 推榮燀爀

선대(先代)에까지 미쳤네 / 于考祖曾

 

공의 충성과 용맹이 아니었다면 / 匪公忠勇

누가 이 일을 실행했겠는가 / 孰其承膺

 

무덤을 응당 산처럼 크게 하여 / 塚宜象山

그 능력 빛내야 하는데 / 以顯其能

지금 이 비석 넉 자 높이지만 / 今雖四尺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리 / 永世不崩

 

 

[각주]

 

[주01]상호(桑弧)를 쏠 적 : 어릴 때를 말한다. 상호는 상호봉시(桑弧蓬矢)의 준말로, 사내아이가 출생했을 때 뽕나무로 된 활에 쑥대로 된 화살을 메워 천지(天地)ㆍ사방(四方)에 쏘아서, 장래 사방에 웅비(雄飛)하기를 비는 행사에서 유래하였다. 《禮記 內則》

 

[주02]척호(陟岵)의 정 : 아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아버지를 그리는 심정을 뜻한다. 《시경(詩經)》 척호(陟岵)에 “저 민둥산에 올라서 아버지가 계신 곳을 그린다.” 한 데서 온 말.

 

[주03]항상 …… 있었건만 : 임진왜란 때 정기룡(鄭起龍)이 자신의 전공(戰功)을 자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뒤에 물러가 있었음을 뜻한다. 동한(東漢) 때 편장군(偏將軍) 풍이(馮異)가 가장 많은 전공을 세우고도 논공(論功)할 때가 되어서는 늘 큰 나무 밑에 물러가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 칭한 데서 온 말. 《後漢書 馮異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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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統制使鄭公神道碑銘 幷序

統制使鄭公起龍。昆陽人也。初名茂壽。或云公捷武科。當唱名。 宣祖大王夢龍起於鍾樓街。飛上天衢。旣覺。物色得公而異之。賜以今名云。公自幼有食牛氣。射桑弧時。略作官人樣。威伏群兒。群兒莫敢違。十三喪其父。廬墓哭泣。喪畢。不肯學書。請學射。其兄仁龍止之不能得。嘗偕之試所。仁龍以病輿歸而死。公大痛。遂棄其業。爲之食素三年。後族人勸其母勉卒其業。旣及第戍北。則北帥憐其陟岵之情。先期許歸。壬辰倭變。從防禦使趙儆南下。說儆以禦賊之略。儆喜以爲別將。大敗賊五百于居昌。又從擊金山賊。方戰酣。儆爲賊所獲。公奮劍入中堅。奪儆以歸。仍請於儆尋母所在。遂自智異山。往見昆陽守李光岳。光岳方赴戰晉州。以公爲假守。時金公誠一爲嶺南兵使。檄召公。使將遊兵捍後。俄以爲尙州判官。牧使金澥素聞公能。每事咨焉。賊方據州城。公旣擊殺分抄賊四百餘。上級于巡營。又夜以火攻城大鏖之。事聞。拜眞判官。承旨尹承勳使嶺南還。言公討賊狀。 上使權牧于尙。俄卽眞。兼敢死軍大將。先是公平土人爲亂者。開屯田給餽餉。以其餘賑活飢民。仍調其驍健者爲兵。無不感戴。遇賊輒爭死。故號其軍爲敢死。丁酉。倭奴再逞。與九邑官。率家屬守金烏城。體使李公元翼召公爲將。大戰於高靈。公躍馬入萬人中。取紅衣賊將而歸。捷奏。陞折衝拜慶尙右兵使。開營于星州。俄而由尙州踰嶺。進討湖西永同屯賊。賊將淸正以大兵將西犯京師。爲天兵所敗走。公遇於報恩赤巖。當前立馬。射倒數十賊。意甚整暇。賊疑有備。良久不敢動。以故湖嶺避亂人獲免者數十萬人。淸正旣過尙州。公追躡之殺零賊。又與天兵擊破慶州賊。天將楊經理鎬戰于島山。公爲前鋒。旣先登而天兵左次。公遂揮刀馳還。賊不敢追。自是連殺居昌,咸陽,安陰,金山,尙州,星州,泗川賊。其攻咸陽。天將李梲戰敗而死。其餘兵願屬公。事聞。 皇上許之。仍以爲天朝摠兵官。公大小六十餘戰。皆以少擊衆。未嘗挫衄。楊經理,麻都督貴皆甚奬賞。遺以票牌。及史世用贈詩二章以美之。公儀觀雄偉。眼光如炬。淸白無點。常急人之困。不顧己私。嘗以首級與天將祖承訓以贖罪。祖雖不受。義聲則著矣。初朝廷爲李公舜臣置三道統制使。以領水軍。後公以輔國崇祿大夫居其職。 天啓壬戌二月二十八日。卒于營。年六十一。公字景雲。公內行亦備。少貧賤旣貴。 贈其父浩左贊成。祖義傑戶曹判書。曾祖哲碩戶曹參判。夫人姜氏。其父世鼎常爲州椽。姜氏避賊入晉州城。城陷。血指書衫。告公以死。遂與其母及小姑。投于矗石樓下大江之水。公葬其衫于昆陽先兆。公所用有兄子壽麟,李希春,金天男,金世賓,黃致遠,金士宗,鄭範禮,盧涵,崔胤,尹業等。皆壯猛殺賊無算。所騎有神馬。能平超六丈壕。能緣絶度險。如利爪快翮者。公制勝脫危。多得其力。嘗與公相失。爲賊所得。忽應公聲。嚼仆執鞚賊。走赴公峻坂上。後病死。公爲文以祭之。蓋當時應公而出者皆如是。公之應時而出可知也。公嘗殺降倭數十。終身恨之。然公位隮崇班。子姓蕃衍。豈公活人甚多。故其所恨不足以傷其慶報耶。後娶宣傳官權弘啓女。生一女。適生員金是梲。側出男翼麟,得麟,德麟,時麟。翼麟,得麟皆武科。長爲僉樞。主公後。女爲僉使朴彥枬妻。孫夏韺,元韺,舜韺,美韺,禹韺,翼麟出。斗韺,震韺,得麟出。是韺,燦韺,殷韺,周韺,德麟出。時麟出者善韺也。蓋公起自褊裨。奮不顧身。以徇國家之急。勇以殺賊。惠以活民。使全嶺甦息。遂得建旄秉鉞。略苞山河。至乃 聖天子聞其名姓。俾作百夫之長。此古今之所未有。是宜刻之金石。傳之無窮。並以著國家之耿光也。銘曰。

在 宣廟世。島夷搆兵。銛牙利爪。血我生靈。公在褊裨。未甚知名。爰告主將。可破之策。遂任以事。遂奮其力。見賊愈多。賊愈死咋。主將蹉跌。虎口之委。躍馬奔之。萬刅披靡。奪之中堅。旋若電馳。漢之飛將。名豈獨專。子龍昨戰。其膽可肩。不寧其勇。義孰與先。東蹂西踏。凶醜戢乍。卹焉周餘。喙食林野。摩手拊瘡。剖鎖哺餓。稚耋聚門。曰公生我。維時天將。文武洋洋。爭遺票牌。有爛其光。詞人有贈。穆如之章。 帝聞其名。曰予將梲。戰敗而死。餘卒七百。慕義願屬。汝其將之。 綸音自天。獠漢愕眙。咸曰 天子。萬里明見。 皇鑑如斯。矧我 主眷。戟纛弓鉞。旌卩有絢。 皇威旣仗。勢如瓴建。難去國平。功賞斯論。將其帶礪。與國永存。公常退坐。大樹之根。卒乃稽馘。序之從勳。推榮燀赫。于考祖曾。匪公忠勇。孰其承膺。塚宜象山。以顯其能。今雖四尺。永世不崩。<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