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정여창선생신도비명병서(鄭汝昌先生神道碑銘幷序)

야촌(1) 2010. 10. 1. 22:07

 문헌공 일두 정선생 신도비명 병서

文獻公 一蠹 鄭先生 神道碑銘 幷序

 

동계(東谿) 조구명(趙龜命 : 1693~1737) 찬

 

우리 동방(東方)은 은(殷)나라 태사(太師)가 교화를 베푼 뒤로 이적(夷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성대하게 일었으나 아득한 수천 년 동안 참다운 선비가 드물었다. 고려 말기에는 정 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鄭夢周)) 한 사람뿐이었고, 우리 국조(國朝)에는 소문이 나서 알려진 분이 다섯 선생인데 선생이 그중의 한 분이다.


선생의 휘(諱)는 여창(汝昌), 자(字)는 백욱(伯勗)이며, 선대의 관향(貫鄕)은 하동(河東)인데, 뒤에 함양군(咸陽郡)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휘 지의(之義)는 종부시 판사(宗簿寺判事)이고, 휘 복주(復周)는 전농시 판사(典農寺判事)이며, 휘 육을(六乙)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추증되었는데, 이들이 선생의 증조(曾祖), 조부(祖父), 선고(先考) 3세(世)이다.

 

모친 최씨(崔氏)는 목사(牧使) 효손(孝孫)의 딸이다. 경태(景泰) 원년 경오년(1450, 세종32)에 선생을 낳으니,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좌윤공이 의주 통판(義州通判)으로 있을 때에 선생은 어린 나이였다.

 

중국 사신 장영(張寧)이 한 번 보고 선생이 비상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 명설(名說)과 함께 이름을 지어 주었다. 뒤에 좌윤이 함길도 우후(咸吉道虞候)가 되어 반란을 일으킨 장수 이시애(李施愛)를 막다가 죽자, 선생이 졸도했다가 다시 깨어나서 쌓인 시체 속에 들어가 부친의 유체(遺體)를 모시고 돌아와 장례를 치렀으니, 당시에 공의 나이가 17세였다.

 

삼년복(三年服)을 마치자, 상이 국가를 보위하다 목숨을 바친 좌윤의 공로를 가상하게 여겨 그 아들에게 관직을 명하니, 선생이 아비의 죽음으로 자식이 영화를 누리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 하여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모부인(母夫人)을 봉양하여 맛있는 음식을 골고루 올려 드렸고 모부인의 하는 일이 의리에 그다지 해로운 것이 아니면 감히 어기지 않았으니, 모부인도 아들의 뜻을 알고 상심시키지 않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모부인은 지나친 거조가 없었고 아들도 무조건 순종하다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없었다.


계묘년(1483, 성종14)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는데, 모부인이 대과에 급제하는 것을 보고자 하므로 태학(太學)에 들어갔다. 깊은 밤마다 단좌(端坐)하였는데, 이에 반중(泮中)에서 선생에게 도학공부가 있음을 알고 더욱 존경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오자 모부인이 돌림병을 앓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문밖에서 안부를 묻기를 권하였으나 선생은 듣지 않고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에 모부인이 병으로 돌아가시자,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 피를 토하고 거의 실성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례(喪禮)를 치를 때에 풍속에서 꺼려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습염(襲殮)과 빈전(殯奠)을 다 예에 맞게 하니, 사람들이 매우 위태롭게 여겼다. 그러나 돌림병이 스스로 사라지고 선생도 마침내 무사하였으니, 사람들은 효성(孝誠)이 하늘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관찰사가 그의 행실에 관하여 듣고 군관(郡官)으로 하여금 장례(葬禮)에 필요한 도구를 지급하도록 하니, 선생이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여 원망이 어버이에게 미치게 한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도와주겠다는 자가 있었으나 모두 듣지 않고, 이에 좌윤공과 합장(合葬)하였다. 1년 동안 죽을 마시고 3년 동안 근심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여막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며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서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았다.

 

상례(祥禮)를 다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서 허둥지둥하며 마치 무엇인가 찾아 헤매는 듯한 모습으로 지냈다. 사람들이 술과 고기를 권하면 문득 눈물을 흘리면서 먹으려 하지 않았다.

 

군수인 매계(梅溪) 조위(曺偉)가 몸소 와서 권유하며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중제(中制)를 감히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자, 그제서야 감히 사양하지 않았다. 시정(寺正) 조효동(趙孝同)과 참의(參議) 윤긍(尹兢)이 상소하여 그의 학행(學行)을 천거하니, 성묘(成廟)가 가상하게 여기고 특별히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진정(陳情)하는 상소를 올려 굳이 사양하니, 성묘가 그 상소의 끝에다 쓰기를, “그대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행실은 가리울 수가 없는 법인데 지금 오히려 이와 같이 하니, 이것이 바로 그대의 장점이라 하겠다.” 하였다.

 

형제(兄弟)와 자매(姉妹)가 전토(田土)와 하인들을 분배할 때에 선생은 척박한 땅과 노약자를 가려서 차지하였으나, 그래도 오히려 마음에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다시 자기가 차지했던 것을 그들에게 주었다.


성묘(成廟) 경술년(1490)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官檢閱)에 보임되었다가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옮겨서 올바른 도리로 보도(輔導)하였지만, 동궁(東宮)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곧바로 외임(外任)으로 나가기를 요구하여 갑인년에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나갔다.

 

현이 평소에 피폐한 고을로 일컬어졌으므로 선생이 우선적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찾아서 과조(科條)를 엄격하게 세우고 사소한 폐단까지 말끔히 제거하니, 백성들이 소생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에 은택과 신뢰가 두루 미쳤으며, 관리와 백성이 서로 경계하여 감히 속이거나 저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런 여가에 고을의 자제들 중에 뛰어난 자들을 불러 모아서 친히 가르치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와서 배웠다. 무오년(1498, 연산군4)의 사화(士禍)에 연좌되어 종성(鍾城)에서 7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지만, 조금도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종성부가 뜰에 횃불 밝히는 일을 맡기자, 사신(使臣)이 관부(官府)에 들어 올 때마다 직접 횃불을 밝히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선생이 환난(患難) 속에서 처신한 것이 이와 같았다.

 

육진(六鎭)은 오랑캐 지역과 가까워서 문풍(文風)이 없어진 지가 오래되었다. 선생이 더불어 말할 만한 자를 선발하여 열심히 가르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진사 시험에 합격한 자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지나는 곳마다 감화(感化)를 입는다는 오묘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갑자년(1504, 연산군10) 여름 4월 1일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5세였다. 상여를 함양(咸陽)으로 모시고 돌아와 승안동(昇安洞)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이해 가을에 사화(士禍)가 다시 일어났는데 그 상황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겠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원통함이 남김없이 신원(伸冤)되었고 포증(褒贈)과 사전(祀典)이 갈수록 더욱 융성하였다. 고을의 유생(儒生)들이 서원(書院)을 건립하니, 남계서원(灆溪書院)으로 특별히 사액(賜額)하고 봄가을로 소뢰(小牢)를 써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무진년(1508, 중종3) 이후부터 관학(館學)의 유생(儒生)이 문묘(文廟)에 배향하여 해마다 제사 지내기를 요청하였는데, 만력 경술년(1610, 광해군2) 가을에 비로소 윤허를 받았으며, 8월에는 그 집에다 사제(賜祭)하였으니, 그제서야 선생의 도학(道學)이 세상에 더욱 빛나게 되었다.


선생의 학문은 염락(溓洛)을 표준으로 삼고 글을 읽을 때에는 이치를 연구하는 것으로 우선하였으며, 마음 씀씀이는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고 날마다 하는 공부는 성경(誠敬)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정치를 하는 율령(律令)과 격례(格例)에도 최선을 다하여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고을을 다스렸던 데에서 찾아보면 그 단서를 확인할 수 있다. 한훤당(寒暄堂) 김 선생과 함께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뜻이 같고 도(道)가 합하여 서로 막역(莫逆)한 사이가 되었으며, 도를 논하고 학문을 강론할 때면 언제나 서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하신 말씀이 세상에 조금도 전하지 않고 선생이 평소에 저술해 둔 글도 무오년의 사화에 소실되었으니, 어찌 후학(後學)들의 길고 긴 통한(痛恨)이 되지 않겠는가. 아, 저 소인배들이 설령 일시적으로 설쳐 댄다 하더라도 장구하게 지속되는 공론(公論)에서 본다면 또한 숨길 수가 없다.

 

따라서 열성(列聖)들이 포창하여 추대한 은전과 선비들이 크게 사모하는 마음이 바다처럼 깊고 북두성(北斗星)만큼이나 높아서 백세후에 그 기풍(氣風)을 듣고 흥기하여 감발하는 것이 백이(伯夷)의 기풍을 듣고 탐욕스런 자가 청렴하게 되고 나약한 자가 강한 의지를 가지게 되는 것에 못지않으니, 비록 선생으로 하여금 당시에 낭묘(廊廟)에 있게 하였더라도 그 영향이 무궁한 데까지 미쳤을 것이라는 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과도한 말이겠는가.


선생이 종실(宗室)인 도평군(桃平君) 말생(末生)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공정대왕(恭靖大王)의 손녀이다. 2남 4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희직(希稷)인데 직장(直長)을 지냈고, 차남은 희설(希卨)이다. 희직은 적처(嫡妻)에 후사가 없고 단지 서자(庶子) 여산(如山)만 두었으며, 희설은 당제(堂弟)인 희삼(希參)의 아들 언남(彦男)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장녀는 부호군 최호문(崔浩文)에게 시집갔는데 아들은 언청(彦淸)이며, 사위 임호신(任虎臣)은 관찰사이다. 2녀는 생원 조효온(趙孝溫)에게 시집가서 아들 안수(安壽)를 낳았고, 3녀는 이현손(李賢孫)에게 시집가서 아들 승수(承壽)를 낳았다.

 

또 4녀는 설공순(薛公諄)에게 시집가서 아들 선(璿)을 낳았다. 언남(彦男)은 동지(同知)인데, 아들 대민(大民)을 낳으니 현감이다. 현감이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홍서(弘緖)인데 문과(文科)로 학정(學正)이 되었으며, 딸은 방원진(房元震)에게 시집갔는데 찰방이다.

 

학정의 초취(初娶)는 증 도승지 양사형(梁士衡)의 딸인데 2남 1녀를 낳았으니, 광한(光漢)은 생원이고, 광연(光淵)은 진사이다. 딸은 이교(李皦)에게 시집갔다. 후취(後娶)는 임진상(林眞㦂)의 딸로 1녀를 두었는데 곽문원(郭文院)에게 시집갔다. 여산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천수(天壽)와 계수(桂壽)이다.

 

천수의 아들은 원례(元禮)와 형례(亨禮)이고, 계수의 아들은 흥례(興禮)이다. 원례와 형례는 선생의 음덕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적서(嫡庶)의 증손 현손으로 남녀 약간 명이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오, 크신 상제님이 / 於皇上帝
동쪽에 치우친 우리나라가 / 悶玆東偏
갈수록 부박해지는 것을 근심하여 / 日趨澆漓
이에 큰 선비를 내리시니 / 迺降碩儒
영남의 한 고을이요 / 于嶺之隅
맑은 소리 옥 같은 자태로다 / 金聲玉姿


선생이 태어나심에 / 先生之生
포부가 가볍지 않았으니 / 抱負非輕
도(道)가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 文不在玆
낙민을 거슬러 올라가 / 泝求洛閩
근원을 궁구하여 진리를 음미하고 / 窮源嚼眞
문사는 숭상하지 않았으며 / 不尙文辭
마음을 침잠하고 토론하여 / 潛心論討
실천하고 깊이 나아갔건만 / 實踐深造
요점은 속이지 않는데 있었다네 / 要在不欺


효와 제를 몸소 실천하고서 / 躬于孝悌
시와 예까지 통달하여 / 達以詩禮
성현처럼 되기를 희망하면서 / 聖賢是希
만년에 조정에 들어가서 / 晩武天庭
실행할 조짐이 충분하였으니 / 兆足以行
누가 그것을 막으랴 / 誰其泥之
작은 고을을 맡아 다스림에 / 鳴琴十室
덕화를 기월 사이에 이루었는데 / 化成期月
혜택은 이 정도에 이르고 말았네 / 施至於斯


하늘은 무슨 뜻으로 선생을 내시고서 / 天生何意
어찌하여 이렇게 인색한가 / 天嗇何以
세도를 위하여 슬퍼하노라 / 世道之悲
오로지 그 밝은 빛만이 / 惟其耿光
세상을 뜬 뒤에 더욱 빛나서 / 沒世彌彰
공묘에다 모셨다네 / 躋于孔祠


넘치는 물은 흘러서 양양하고 / 濫水洋洋
오르는 산은 높아서 푸르르니 / 昇山蒼蒼
마르지 않고 떨어지지 않으리 / 不渴不隳
선생의 크나큰 명성을 / 能令大名
산처럼 높고 물처럼 맑게 하였으니 / 山高水淸
이 비석에 있지 아니한가 / 不在斯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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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惟我東方。自殷太師設敎。蔚然有變夷之風。而寥寥數千載。眞儒者罕出。在麗季。惟鄭文忠公一人而已。入我朝。聞而知之者。有若五先生焉。先生其一也。先生諱汝昌。字伯勖。其先貫河東。後徙居咸陽郡。有諱之義。判宗簿寺事。諱復周。判典農寺事。諱六乙。贈漢城府左尹。寔先生曾若祖若考三世也。母崔氏。牧使孝孫之女。以景泰元年庚午。生先生。生有異質。左尹通判義州時。先生在齠齔。華使張寧。一見知其爲非常兒。作說以名之。後左尹爲咸吉道虞侯。拒叛將李施愛。死之。先生絶而復穌。入積尸中求遺體歸葬。時年十八矣。服制畢。上嘉左尹衛國功。命官其嗣。先生以父敗子榮爲不忍。辭不受。奉養母夫人。滫瀡備至。母夫人所爲。無甚害於義。不敢違。母夫人亦知子之志。不欲傷。故母無過擧。子無曲順之失。癸卯。中進士試。母夫人又欲見決科之榮。乃遊太學。每夜深。必兀然端坐。於是。泮中知其有思道之功。益尊敬之。及南歸。母夫人方在癘染中。人勸令在外候問。先生不聽徑入。未幾。母夫人遘癘不起。擗踊嘔血。幾至滅性。治喪不顧俗忌。襲斂殯奠。皆以禮。人甚危之。而癘患自熄。先生終無恙。人皆以爲孝感所致。方伯聞其行。令郡官辦葬具。先生以煩民力怨及親。爲辭不受。凡有欲助之者。皆不聽。期啜粥。三年憂。苴杖不出廬外。危坐終日。不脫絰帶。旣祥。不歸家。入頭流山。皇皇有如有求不得之狀。人勸酒肉。輒涕泣不肯。郡守曺梅溪偉躬造勉之。以爲先王中制不敢過。於是不敢辭。寺正趙孝仝,參議尹兢。疏薦其學行。成廟嘉之。特授昭格署參奉。先生陳情固辭。成廟題其疏尾曰。聞汝之行。予不覺出涕。行不可掩。而今猶如此。是汝之善也。兄弟姊妹。分土田臧獲。先生擇 其磽薄老弱者自占。猶有不厭其心者。則復以己所得與之。成廟庚戌。登丙科。補藝文館檢閱。遷侍講院說書。輔導以正。東宮頗不悅。卽求補外。甲寅。出監安陰縣。縣素稱凋弊。先生首訪民隱。嚴立科條。櫛垢爬痒。民獲蘇醒。期月之間。恩信周遍。吏民相戒。莫敢欺負。暇日。招選鄕子弟之秀異者。親自敎誨。遠近聞風多來學。坐戊午史禍。謫鍾城七年。無幾微怨悔見於色辭。府定庭燎之役。每使星入府。躬自燃火。不懈益謹。其行乎患難如此。六鎭近胡域。無文風久矣。先 生擇其可與語者。敎誨不倦。未幾。有中進士科者。斯非過化之妙歟。甲子夏四月一日。易簀于謫所。壽五十有五。輿歸咸陽。葬昇安洞艮坐坤向之原。是年秋。史禍復作。其可忍言哉。不數年。昭雪無餘憾。褒贈祀典。愈久愈隆。郡儒建書院。特賜灆溪之號。春秋用小牢享之。自戊辰以後。館學儒生。請從祀文廟。歲以爲常。萬曆庚戌。始蒙允。八月。賜祭於家。於是先生道學之光。益彰於世矣。先生之學。以濂洛爲準的。讀書以窮理爲先。處心以不欺爲主。日用工夫。不出誠 敬之外。至於治平之律令格例。無不究其極。求諸治縣。已見其端緖矣。與寒暄金先生。俱遊佔畢金先生之門。志同道合。許以莫逆。論道講學。動必相隨。惜其微言餘論。不少傳於世。而先生平日著述。又火於戊午之禍。豈不爲後學之長痛乎。嗚呼。彼小人者。雖或螮蝀於一時。然至於公論之久長。蓋亦莫得以掩之。列聖褒崇之恩。多士景慕之誠。有如滄海之深。北斗之高。百世之下。聞其風而興起感發者。不在於立懦廉頑之後。則雖使先生坐廊廟於當時。其風效之 及於無窮者。夫豈或之過哉。先生娶宗室桃平君末生之女。恭靖大王之孫也。生二子四女。長希稷。直長。次曰希卨。正郞。希稷。嫡無嗣。只有庶子如山。希卨。取堂弟希參之子彥男爲後。女長適副護軍崔浩文。生子彥淸。壻任虎臣。觀察使。其次適生員趙孝溫。生子安壽。次適李賢孫。生子承壽。又其次適薛公諄。生子璿。彥男。同知。生子大民。縣監。庶子秀民。參奉。縣監生一男一女。男曰弘緖。文學正。女曰房元震。察訪。學正初娶贈都承旨楊士衡之女。生二男一女。男曰 光漢。生員。曰光淵。進士。女適李皦。後娶林眞㦂之女。有一女。適郭文浣。參奉生三男。弘纘,弘繼,弘經。弘經生光淑,光湜。餘幼。如山有子二人。曰天壽,桂壽。天壽之子。元禮,亨禮。桂壽之子。曰興禮。元禮,興禮。以先生蔭除參奉。合嫡庶曾玄男女凡若干人。銘曰。

於皇上天。閔茲東偏。日趨澆漓。乃降碩儒。于嶺之隅。金聲玉姿。先生之生。抱負非輕。文不在茲。泝求洛閩。窮源嚼眞。不尙文詞。潛心論討。實踐深造。要在不欺。躬于孝悌。達以詩禮。聖賢是希。 晩武天庭。兆足以行。誰其尼之。鳴琴十室。化成期月。施止於斯。天生何意。天嗇何以。世道之悲。惟其耿光。沒世彌彰。躋于孔祠。蘫水洋洋。昇山蒼蒼。不渴不隳。能令大名。山高水淸。不在斯碑。<끝>

 

 

↑일두 정여창 선생 묘. 배위의 묘는 선생 묘의 위에 있다.

 

↑정영창 선생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