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정기룡(鄭起龍) - 진양정씨

야촌(1) 2010. 12. 8. 20:34

■ 정기룡(鄭起龍) 장군

    [생졸년] 1562년(명종 17)∼1622년(광해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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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곤양 정씨(昆陽鄭氏) 의 시조. 초명은 무수(茂壽).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곤양 출신. 증좌찬성 호(浩)의 아들이다. 1580년(선조 13) 고성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159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휘하에 들어가고 다음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으로 승진하여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휘하에서 종군하면서 방어의 계책을 말하고, 거창싸움에서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김산(金山)싸움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하였고, 곤양 수성장(守城將)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이어 유병별장(游兵別將)이 되고, 상주목사 김해(金澥)의 요청으로 상주판관이 되어 왜군과 대치, 격전 끝에 물리치고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1593년 전공으로 회령부사(會寧府使-從三品)에 승진되고, 이듬해 상주목사(尙州牧使-正三品)가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고령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생포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 성주·합천·초계·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하고 절충장군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승진하여, 경주·울산을 수복하였다.

 

1598년 명나라 군대의 총병(摠兵)직을 대행하여 경상도 방면에 있던 왜군의 잔적을 소탕하여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이 되고, 이듬해 다시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다시 경상도방어사가 되어 다시 침입하여올지 모르는 왜군에 대처하였고, 다음해 김해부사·밀양부사·중도방어사(中道防禦使)를 역임하였다.  그뒤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도총부총관·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상호군에 승진하고, 그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從二品)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의 직을 맡다가 1622년 통영 진중에서 죽었다. 상주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정기룡장군 영정

 

↑정기룡장군 묘(상주시 사벌면 금흔리).

 

↑정기룡장군의 유물 요대(腰帶). 

 

요대(腰帶) : 길이 157㎝, 너비 4.5㎝로 문양이 투각(透刻)된 각제 띠돈에 금속 테를 둘러 혁대에 붙

였고, 그 사이에 화문장식을 하였다. 전면 걸이장식은 훼손된 상태이다. 

 

 

↑명나라 도독 마귀(麻貴)의 신패(信牌). 

 

 신패(信牌) : 선조 31년(1598년) 4월에 발행한 명나라 도독 마귀(麻貴)의 신패로,세로 55㎝, 가로 64㎝이다. 

 

 

↑ 1617년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임명한 유서(諭書).

 

유서(諭書) : 광해군 9년(1617년) 3월 7일에 임금이 내린 임명서로 세로 26㎝, 가로 91㎝이다. 그 내용은

“諭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鄭起龍萬曆四十五年三月初七”로, 작성시기가 만력45년 3

월 초7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광해군 9년(1617년)에 내린 유서(諭書)임을 알 수 있다. 

 

 

↑1617년 3월 7일(上)과 1629년 2월 25일(下) 발행된 교서(敎書).

 

교서(敎書) : 임금이 발행하는 명령서로 2축이며, 내용은 “敎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鄭起

龍”로 같으나 발행연대와 규격의 차이가 있다. 1617년 3월 7일에 발행된 것세로 170㎝, 가로 52㎝

이고, 인조 7년(1629년) 2월 25일에 발행된 것은 세로 300㎝, 가로 80㎝이다.

 

 

↑ 1773년 시호(諡號)를 내린 교지(敎旨).

 

교지(敎旨) : 영조 49년(1773년) 5월 28일자로 시호(諡號)를 내린 것으로 내용은 “輔國崇祿大夫行知

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摠管鄭起龍贈諡忠毅公者乾隆三十八年正月二十五日”이라고 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63㎝, 세로 94㎝이다.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내린 교지(敎旨).

 

↑정기룡(鄭起龍) 장군이 사용했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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