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僉使 李宰榮 墓碣銘(첨사 이재영 묘갈명) - 판윤공파

야촌(1) 2010. 11. 13. 01:02

■ 첨사 이공 묘갈명(僉使李公墓碣銘)

   

[생졸년] 이재영『李宰榮, 1853년(철종 4) ~ 1928년(왜정 19)』

 

曺兢燮 撰(조긍섭 찬)

 

공의 휘는 재영(宰榮), 자는 경선(敬善), 처음 휘는 재백(宰伯)이다. 이씨(李氏)의 선계는 경주(慶州)에서 나왔으니 시조 알평(謁平)은 신라 좌명공신(佐命功臣)이다. 고려 때 문정공(文定公) 진(瑱)과 문충공(文忠公) 제현(齊賢)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조(李朝)에 들어와 휘 선(瑄)은 판서이다.

 

5대를 내려와 휘 학(鶴)은 주부(主簿)인데, 임진왜란에 의병에 참여한 공로로 병조 참의의 증직을 받았으니, 공에게 9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승철(承哲)인데 효행으로 동몽교관의 증직을 받고 처음으로 울주(蔚州) 사람이 되었다. 증조의 휘는 만택(萬宅)이니 증 사복시 정(司僕寺正)이다.

 

조부의 휘는 정규(正奎)이니 증 승정원 좌승지이다. 부친의 휘는 삼기(三基)이니 무과에 급제하였고 증 한성부 좌윤이다. 모친은 증 정부인 광주 노씨(光州盧氏)이니 한언(漢彥)의 따님인데, 철종〔睿陵〕 계축년(1853) 3월 9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때부터 자제의 과실을 범한 적이 없었다. 자라서는 활 쏘고 말 타는 일을 익혀서 고종 경인년(1890)에 무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사과(司果)를 맡았다. 계사년(1893, 고종30)에 외직으로 나가 임치도 첨사(臨淄島僉使)가 되었다.

 

당시에 흉년을 당하자 자신의 봉급을 덜어 다섯 달 동안의 군량을 보충하고, 한가한 때는 섬 안의 글 읽는 자제를 방문하여 양식을 대주어 공부하게 하니, 아전과 백성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고 무유(武儒)라고 일컬었다.

 

한 해 동안 있다가 체직(遞職)되어 돌아오고, 이윽고 부호군ㆍ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후에 가선대부로 품계가 오르고, 위로 3대에 은전(恩典)이 더해졌다.

 

일찍이 양산(梁山)의 군청 남쪽에 집을 얻어 살았는데, 그곳은 시장이 가까워 자손을 살게 할 곳이 아니라고 하여, 군 북쪽 석동(石洞)에 살 곳을 정하여 집을 지어 편액을 ‘석은(石隱)’이라 하고 시로써 자신의 뜻을 보였다.

 

사는 마을은 곤핍(困乏)하고, 사람들은 게으른 것에 익숙하고 도박을 좋아했는데, 공이 힘써 거느려 엄하게 금지시키자 습속이 일신하여 10년 사이에 마을이 조밀하고 수목이 무성하게 되니, 사람들이 공에게 그 공을 돌렸다. 처음에 공은 능히 재산을 다스려 풍요함을 이루고, 또 어버이를 잘 섬겼다.

 

그런 까닭에 양친이 장남을 떠나 공에게 봉양을 받았고, 양친의 상례와 장례에도 모두 유감이 없었다. 재물을 두 차례 형에게 주고 아홉 차례 아우에게 주었어도 언사와 안색에 기미가 드러나지 않았다.

 

선대의 묘소에 석물을 구비하고 원조(遠祖)의 사단(祠壇)에 제향의 비용을 드리는 일에 모두 정과 예가 알맞았다. 글을 많이 읽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수천 권의 책을 사서 여러 자식을 공부하게 하고 별도로 서당을 지었는데, 서당의 스승을 대접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에 세 번 몸소 술을 드렸다.

 

나라가 망하게 되자 그 아들을 상해(上海)에 보내어 유람하면서 그곳 정세를 살피고 그곳의 인사와 교유를 맺도록 하고, 이윽고 탄식하기를 “그럴 것 없으니 빨리 돌아오너라.”라고 하였다.

 

가난한 일족들에게는 전답을 주어 농사짓게 하고 세를 납입하는 것은 그들의 뜻에 맡겼다. 손님이 많아 방문 밖에는 신이 항상 가득했고 접대하는 데 정성스럽고 넉넉하지 않음이 없었다.

 

계묘년(1903, 고종 광무7) 기근에는 금품과 곡식을 많이 출연하여 마을 사람들을 주휼(賙恤)하였다. 염병에 걸린 나그네가 있었는데, 공이 전염을 무릅쓰고 몸소 구제하였지만 자신은 끝내 무사하였다. 평소에 비단옷을 입지 않고 거마를 타지 않다가 예순 살이 된 후에야 비로소 비단옷을 입고 거마를 탔다.

 

무진년(1928) 가을에 질병이 들어 자제가 약을 드리자 물리치고, 또 말하기를 “선영 아래 나를 묻어라.”라고 하고 드디어 세상을 마쳤으니, 8월 17일이었다. 모월 모일에 동래 두명리(斗明里) 율목산(栗木山) 선영 건좌(乾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김해 김씨(金海金氏)이니 상두(相斗)의 따님이다. 2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 규한(圭漢)ㆍ규홍(圭洪)은 모두 주사(主事)이고, 사위 정인욱(鄭寅昱)은 의관(議官)이고 권목(權穆)ㆍ정성대(鄭聲大)는 또한 모두 주사이다. 규한의 아들은 종무(鍾武), 종학(鍾學), 종택(鍾澤), 종훈(鍾焄)이다. 규홍의 아들은 종문(鍾文)이다. 나머지는 어리다.

 

규한이 상중에 있으면서 가장(家狀)을 가지고 김군(金君) 상우(相宇)를 통하여 나의 글을 구하여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자 하였다. 나는 일찍이 공의 가홍정(駕虹亭)에 기문을 지은 사람이니, 또 명(銘)을 붙인다.



누가 말하는가 무사는 선비의 행실을 할 수 없다고 / 孰謂兜鍪不能操士行
누가 말하는가 몸소 재산을 이루어 재물로 명을 삼는다고 / 孰謂躬致產以財爲命


이미 복록을 누리고 장수했으며 / 旣祿而壽
아들과 손자에게 가르침을 남겼네 / 宜子與孫


이 선에 대한 보답을 / 是善之報
이 언덕에서 살필 수 있네 / 庶徵斯原

 

【각주】

[01] 울주(蔚州) : 경상남도 울산(蔚山)의 옛 이름이다.

 

[02] 임치도 첨사(臨淄島僉使) : 임치도는 지금의 잔라도 함평(咸平)에 속한 섬으로 첨사(僉使)는 첨절제사(僉節

        制使)의 약어로 종3품(從三品)의 무관직이다.

 

[03] 김군(金君) 상우(相宇) : 김상우(金相宇, 1888~1962)를 말한다. 자는 경일(景一), 호는 단산(丹山)ㆍ응재(凝

         齋),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경상남도 울주군 웅촌면 검단(檢丹)에서 살았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과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응재유고(凝齋遺稿)》가

        있다.

 


[04] 가홍정(駕虹亭) :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에 있다. 석은(石隱) 이재영(李宰榮, 1853~1928)이

         1918년에 자신의 소유지였던 이곳에 홍룡폭포(虹龍瀑布)를 감상기 위해 죽우(竹友) 권순도(權順度,

         1870~1934)와 함께 지은 정자이다.

--------------------------------------------------------------------------------------------------------------------------------------

 

[原文]

 

僉使李公墓碣銘 - 曺兢燮(조긍섭)

 

公諱宰榮字敬善。初諱宰伯。李氏系出慶州。始祖謁平。新羅佐命功臣。高麗時文定公,文忠公齊賢最著。入李朝有諱判書。五世至諱主簿。以壬辰義勞贈兵曹參議。於公間九世。高祖諱承哲以孝贈童蒙敎官。始爲蔚州人。曾祖諱萬宅贈司僕寺正。祖諱正奎贈承政院左承旨。考諱三基武科贈漢城左尹。妣贈貞夫人光州盧氏漢彥女。以睿陵癸丑三月九日生公。自幼未甞有子弟過。長治弓馬業。洪陵庚寅登武科。明年付司果。癸巳出爲臨淄島僉使。時値歉荒。捐俸以補五朔軍餉。暇則訪島中讀書子弟資贍之。吏民立石頌之。稱爲武儒云。居一年遞歸。尋授副護軍僉知中樞府事。後增秩嘉善。追恩三世。甞僦居梁山郡治南。以近市非所以居子孫。卜築於郡北石洞。扁之曰石隱。詩以見志。所居里凋弊。人習怠惰好睹博。公力率而痛禁之。俗爲一變。十年之間。井落稠密。林木繁茂。人歸功焉。始公能治產致饒。又善事親。故二親捨長而養於公。至喪葬並無有憾。再贍兄九給弟而無幾微見辭色。先世丘壠備儀物。遠祖祠壇供享需。皆稱情禮。以不多讀書爲恨。購書數千卷。以業諸子。別構書塾。其待塾師也。必親餉酒日三。及國斬則遣其子遊滬上。相勢結交。旣而歎曰無庸亟反之。其處貧族。授之田耕。而入租從其意欲。戶外屨常滿。而待之無不欵洽。癸卯之饑。多出金糓以賙坊人。客有遘癘者。手自救之卒無事。平生衣不帛行不乘。至六十後始爲之。戊辰秋疾。子弟進藥却之。且曰葬我於先兆下遂終。八月十七日也。以某月日葬于東萊斗明里栗木山先塋負乾原。夫人金海金氏相斗女。有二男三女。男圭漢圭洪皆主事。女婿鄭寅昱議官, 權穆, 鄭聲大亦皆主事。圭漢男鍾武, 鍾學, 鍾澤, 鍾焄。圭洪男鍾文, 餘幼。圭漢方持服。以狀介金君相宇求余文將碣于墓。余甞爲記其駕虹亭者。則又爲之銘曰。

孰謂兜鍪不能操士行。孰謂躬致產以財爲命。旣祿而壽。宜子與孫。是善之報。庶徵斯原。

 

출전 : 巖棲先生文集卷之三十二 : 암서 조긍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