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慶州李公墓碣銘(李載文)

야촌(1) 2010. 11. 3. 09:32

경주이공묘갈명(이재문)

慶州李公墓碣銘(李載文) 

이재문『李載文, 1827년(순조 27) ~ 1892년(고종 29)』

 

조긍섭(曺兢燮 : 1873~1933) 지음 

 

공의 휘는 재문(載文), 자는 원현(元見)이다. 이씨(李氏)는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시조 휘 알평(謁平)은 신라 개국공신으로 아찬(阿飡)에 봉해졌다. 뒤에 휘 거명(居明)은 벼슬이 소판(蘇判)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대대로 더욱 혁혁해져 동방의 저명한 성씨가 되었다. 

 

휘 신(新)에 와서는 이태조(李太祖)의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2대를 내려와 휘 계번(桂蕃)에 와서는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내고 비로소 의령(宜寧)에 살게 되었다.

 

5대를 내려와 휘 유(宥)는 좌승지(左承旨)이니 공에게는 9세조가 된다. 세복(世復)ㆍ국엽(國燁)ㆍ기만(基萬)ㆍ극민(克敏)은 모두 문학과 행실을 갖추고 있었으니, 이 분들이 공의 고조ㆍ증조ㆍ조부ㆍ부친이 되신다. 모친은 하빈 이씨(河濱李氏)이니, 사인(士人) 응권(膺權)의 따님이고 부덕(婦德)이 있었다. 

 

순조(純祖) 정해년(1827, 순조27)에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부터 놀이를 하지 않았고, 병이 적어서 부모의 근심을 끼치지 않았으며, 나가고 물러나는 것과 따뜻하고 시원하게 해 드리는 것을 어른과 같이 하였다. 

 

겨우 유의(幼儀)를 배울 무렵에 부모님의 상(喪)을 연달아 당하여 비록 부모님이 그리워 슬피 울었지만, 여러 형들을 따라 능히 예법을 행하였다. 상을 마치자 학업을 닦기 시작해서 이미 고아가 되었다고 스스로 학업을 폐하지 않았고, 또 능히 생업을 다스려 절약하고 변통해서 모은 것으로 자립을 하게 되었다. 

 

형제들과는 거처를 달리하면서도 함께 사는 것처럼 하였고, 부모님의 기일에는 도와서 준비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기근이 든 해에는 공시(功緦)의 친족들 중에서 끼니를 잇기가 어려운 사람들은 구제를 받았고, 조세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도움을 받아서 빚을 해결할 수 있었다.

 

수레와 말을 모아 두고서 다른 사람들도 자기 것처럼 공동으로 쓰게 하였다. 죽은 벗이 남긴 아이들이 의지할 곳이 없으면 먹이고 가르쳤다. 세상의 습속이 움츠리고 기개 없는 모습을 하는 것에 분개해서, 맑은 날 밤마다 늘 《한서(漢書)》 〈급암전(汲黯傳)〉을 낭랑하게 외우면서 마음으로 그 강직함을 사모하였다. 

 

시속의 분화함과 조급하게 다투는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마음에 들이지 않은 채 오직 검약으로 문호를 삼았다. 병이 위독해지자 자식들을 불러 유계(遺誡) 몇 조목을 적게 하고, 여러 채무를 진 사람들의 문서를 가져다가 모두 태우도록 명하고는 드디어 눈을 감았으니, 임진년(1892, 고종29) 12월 15일이었다. 

 

향년 66세이다. 화산리(禾山里) 원산(院山) 해좌(亥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니, 승정(丞正)의 따님이고, 규방의 범절을 갖추고 있었다.2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종택(鍾澤)과 종협(鍾協)이고, 딸은 전병진(田丙鎭)에게 출가했다.

 

종택은 벽진(碧珍) 이태후(李泰厚)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딸만 넷을 기르고 아들이 없어서 종형(從兄) 종승(鍾丞)의 아들 효우(孝雨)를 양자로 삼았고, 사위는 강진형(姜晉馨)ㆍ이현화(李鉉華)ㆍ이정기(李正基)이고 하나는 어리다. 

 

종협은 회산(檜山) 황일연(黃一淵)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딸만 다섯을 기르고 아들이 없고, 사위는 이용팔(李容八)이고, 나머지는 어리다.종택 씨는 이미 공의 유계를 좇아 행하여 빠뜨리거나 유감스러운 일이 없게 하고, 공의 행략(行略)을 기록해서 묘갈명(墓碣銘)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긍섭(兢燮)은 공의 집안의 외손이라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명(銘)을 붙인다.

자신에게는 검약하고 / 約于躬

오직 의리만은 풍부하게 했지 / 惟義之豐

비록 그 후사는 막혔지만 / 雖其嗇後

은택은 많이 남겼지 / 澤則多有

어찌 면면히 끊이지 않아 / 胡不綿綿

이 무덤을 높이지 않으리오 / 以崇玆阡

 

[각주]

 

 [주01]따뜻하고 …… 것 : 자식이 부모에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면서 정성껏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禮記 曲禮上》

 

[주02]겨우 …… 무렵 : 10세가 되었을 때를 말한다. 《예기》 〈내칙(內則)〉에 “10세가 되면 어린이의 거동을 배우고, 13세가 되면 음악을 배우고 시를 외며, 20세가 된 다음에야 예를 배운다.〔十年學幼儀, 十三學樂誦詩, 二十而後學禮.〕”라고 하였다.

 

[주03]공시(功緦)의 친족 : 공시는 오복(五服) 가운데서 9개월 복에 해당하는 대공(大功), 5개월 복에 해당하는 소공(小功), 3개월 복에 해당하는 시마(緦麻)를 가리키는데, 주로 손자와 종손자 이하의 항렬이나 다소 먼 친족이 이에 해당된다.

[주04]유계(遺誡) : 저본의 ‘성(誠)’은 ‘계(誡)’의 오자이다. 《심재집》 권25 〈경주 이공 묘갈명(慶州李公墓碣銘)〉에 근거해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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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慶州李公墓碣銘(李載文)

 

曺兢燮 撰

 

公諱載文字元見。李氏籍慶州。始祖諱謁平。新羅開國功臣。封阿飡。後有諱居明。官至蘇判。自是益蟬赫。爲東方著姓。至諱曰新。李太祖佐命功臣。官至判書。再傳至諱桂蕃禦侮將軍。始居宜寧。五傳而諱宥左承旨。於公間九世。曰世復曰國燁曰基萬曰克敏。皆有文行。是爲公四親。妣河濱李氏士人膺權女。有婦德。以純廟丁亥生公。自幼絶戱少疾。無父母憂。進退溫凊如成人。甫學幼儀。連遭兩喪。雖呱呱孺泣。能隨諸兄爲禮。去喪就學。不以已孤自廢。又能治產業。節縮通變。得贏有所立。與兄弟異居如同爨。値先諱助備而誠盡。歲饑則功緦之親艱食者得濟。負租稅者賴以免。蓄車馬而人之共之如其有。朋友有遺孤無所歸。飮食而敎誨之。憤世之習爲骫骳卷臠態。每淸夜朗誦漢史汲黯傳。心慕其戇直。至於流俗紛華躁競。不一入其心。惟以儉約爲門戶。疾革召諸子書遺誠若干條。命取諸欠債錢者文券悉燒之。遂暝。壬辰十二月十五日也。享年六十六。葬于禾山里院山負亥之原。配安東權氏丞正女。有閫範。生二男一女。男鍾澤,鍾協。女適田丙鎭。鍾澤娶碧珍李奉厚女。育四女無男。取從兄鍾丞子孝雨子之。女婿姜晉馨,李鉉華,李正基,一幼。鍾協娶檜山黃一淵女。育五女無男。女婿李容八,餘幼。鍾澤氏旣遵擧公遺誡。無闕憾已。錄公行畧。來徵墓銘。兢燮世爲公家出。義不敢辭。銘曰。

 

約于躬。惟義之豐。雖其嗇後。澤則多有。胡不綿綿。以崇玆阡。 

 

출전 :  암서집(巖棲集) >卷之二十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