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황산찰방 이덕장 갈음명 병서

야촌(1) 2010. 10. 30. 11:22

[세계] 월성군파

[생졸년] 이덕장「李德嶂 1482(성종 13) ~ 1523(중종 18)」

 

황산찰방 이덕장 묘갈명 병서(黃山察訪李德璋碣陰銘 幷序)

 

퇴계 이황 찬(退溪 李滉 撰)

 

공(公)의 휘(諱)는 덕장(德璋)이요. 자(字)는 경부(慶簿)요. 경주(慶州)인이다.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 알평(謁平)의 후손으로 증조(曾祖)는 승직(繩直)이니 대사헌(大司憲)이요. 조부(祖父)는 시민(時敏)이니 생원(生員)이요. 아버지는 홍준(弘準)이니 진사(進士)이다.

 

공(公)이 성화(成化) 임인년(壬寅年) 1482년(성종 13) 12월 19일에 태어났다. 일찍부터 학업(學業)에 힘을 써서 여러번 향시예부(鄕試禮部)에 응시 했으나 합격을 못하고, 음직(蔭職)으로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이 되었다.

 

가정(嘉靖) 계미년(癸未年,1523년 중종 18)에 부친상을 당하여 퇴직하였다가 복(服)을 마치고 나니 집은 가난하여 늙은 모친을 봉양하기 어려워 다시 벼슬을 구하여 서울에 갔더니 이듬해인 4월 27일 병을 얻어 객지에서 운명하니 향년 42세였다.

 

갑신년(甲申年,1524년 중종 19) 12월 17일에 단현(皆丹縣 : 오늘날 봉화군 물야면) 운봉산(雲峯山) 간좌곤향(艮坐坤向) 언덕에 안장했다. 공이 젊을 때부터 장부의 기상이 있어 속이 좁고 용렬(庸劣)한 무리와는 교유를 싫어하고 서울에 있을때, 상소문을 지어 모든 일을 진술하고자 하더니 친상(親喪)으로 인하여 벼슬에서 물러 나왔다.

 

자제들의 가르침에 심히 엄했고 마을에 후학들을 위하여도 근학(勤學)하고 독려(督勵)하며, 생산작업(生産作業)에는 힘쓰지 않고 빌리고 갚는 것으로 자급자족(自給自足) 하였다. 

 

공(公)의 배위(配位)는 풍산류씨(豊山 柳氏)로 진사(進士) 자온(子溫)의 따님이요. 공조전서(工曹典書) 종혜(從惠)의 후손이다. 성화(成化) 계묘년(癸卯年,1483년 성종 14) 12월 20일에 출생하니 품성(稟性)이 정숙하고 평상시에 언행(言行)의 조급함이 없었다.

 

공(公)이 별세한 뒤에 집이 더욱 궁색(窮塞) 하였는데, 가난함을 한탄하지 않고 "나의 분복(分福)이 이뿐이니 무엇을 한탄하리오" 하며, 아들을 교훈(敎訓)하되 차라리 굶고 죽을 지은정 부당하게 제물(財物)을 취하지 말아야 하며, 친족 간에 화목하고 이웃을 사귀되 정성을 다하여 흠결이 생기는 일이 없었다.

 

혹 남이 자기의 가난을 돕거나 급한 일을 도와주면 절대로 공짜로 받는 일이 없었으며, 한번은 일가 사람들이 제사(祭祀)일로 류씨(柳氏)를 헐떳어 말하기를 "제사를 분별없이 지낸다고 꾸짖으며 마음 씀이 이같으니 억지로 지내는 제사를 그 조상이 흠향(歆饗) 할까?" 하더니 수년이 지난후에 그 사람들이 부인 정성에 감회(感懷)되어 부끄러워 하고 다시는 헐떳는 일이 없었으니 그 마음 가짐이 정숙하고 착함이 이와 같았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잉(艿)이고 다음은 여(茹)이며, 셋째는 울(葎)이고, 끝은 포(苞)이다. 공(公) 별세후 10년뒤 위로 3형제가 따라 사망하고 막내 아들 포(苞)가 기유년(己酉年,1489년 성종 20)에 생원(生員)으로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이러렀고 딸은 생원(生員) 이훈(李薰)에게 출가 했다.

 

가정(嘉靖) 병진년(丙辰年,1496년 연산군 2) 정월 13일에 류씨(柳氏)가 별세(別世)하니 수(壽)는 74세(歲)요. 공의 묘소에 합장(合葬)하였다. 명(銘)에 가로대

 

월성이씨(月城李氏)는 유례가 깊고 멀다.

공(公)이 이집에 태어나서 그 거동(擧動)이 빼어나다.

충실한 성품으로 나라에 출사(出仕) 했건만 명(命)이 어찌 다하는고,

우관(郵館=察訪)에 응시하니 여의치 않도다.

중년에 다시 벼슬을 구한 것은 어버이를 위함이라.

뜻은 가졌으나 몸이 먼저 가니 객사(死) 함이 원통하다.

어진 아내를 두었으니 풍산류씨(豊山 柳氏) 화벌(華閥)이라.

몸가짐이 맑고 삼가니 규문(閨門)이 화목하도다.

자녀를 길러내니 찬란한 난초(蘭草)요, 빛나는 옥(玉)이로다.

화액(禍厄)을 자주 당하니 그 짐을 보존할까!

막내 아들의 성품이 지극하니 효성(孝誠)이 따로있나.

하늘이 도와주니 차착(差錯)이 없으리라.

높은 언덕이 백양(白楊)의 바람에 우니 그 가려짐을 같이 하면서

유궁(幽宮)을 길이 보전하리라.

 

퇴계집 > 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六 > 墓碣誌銘

------------------------------------------------------------------------------------------------------------------------------------

 

[原文]

 

■ 黃山察訪李公碣陰銘 幷序 - 퇴계 이황

 

公諱德嶂。字缺。慶州人。新羅始祖赫居世佐命大臣謁平之後。曾祖某。大司憲。祖某。生員。考某。進士。公生於成化壬寅十二月十九日。少習擧業。嘗擧於鄕試。禮部不中。蔭補黃山道察訪。嘉靖癸未。丁外艱。服闋。爲家貧親老。求再遂祿仕計。勉赴京師。明年四月二十七日。遇病不起。享年四十二。癸未十二月十七日。葬于皆丹縣雲峯山艮坐坤向之原。公自少軒輊尙氣。不肯齷齪庸流中。其在京師日。嘗草疏。欲陳時事。已而。戒出位而止。敎子弟甚嚴。鄕里後生。亦加勸督。不以生産作業爲務。嘗稱貸以自給。公配曰 豐山柳氏。進士子溫之女。工曹典書從惠之後。成化癸卯十二月二十日生。稟性閒靜。平居無疾言遽色。公歿。家益窮。猶不聽家人之歎貧曰。吾分止是。何恨焉。其訓子。以爲寧受凍餒。不可取不義之物。睦族交隣。盡心無慊。或拔貧以周急。又未嘗虛受人饋。族人有以祀事見推。柳氏無辨而行其祀惟謹曰。彼之用心如此。雖强令行之。祖考肯享之乎。數歲。其人感愧而止。其宅心精且善。皆此類也。生四男一女。男長艿。次茹。次葎。後公十餘年。相繼死。其季曰苞。己酉生員。爲齊陵參奉。女適生員李薰。嘉靖丙辰正月十三日。柳氏歿。享年七十四。是年十二月。祔葬于公。銘曰。

 

月城之李。遙遙厥緖。公則是承。其儀擧擧。以充觀國。胡命之阻。試于郵官。思馬斯臧。中替求復。爲親在堂。齎志永已。旅櫬悲傷。公有賢婦。豐山茂族。淑愼其身。閨門雍穆。亦旣長育。粲粲蘭玉。喪禍仍荐。克持其家。季也至性。誠孝靡他。天之報騭。於是匪差。有崇其原。白楊號風。同其翳然。永保幽宮。

 

◇嘉靖癸未。可疑。

 

퇴계집 > 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六 > 墓碣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