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론이 보낸 자객, 왕의 침실 지붕 뚫고 암살 시도.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70호] 2010.06.12 입력
상대방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정치를 주도할 경우 정쟁은 극단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이 경우 상대방이 집권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되고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정치의 모든 타협이 거부되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되면서 정치 자체가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1> 정조는 즉위 후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시는 경모당을 짓고 옥으로 만든 도장을 바쳤다. 노론에서는 정조를 압박
하기위해 이복동생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라고 주장했다. 사진은 헐리기 전의 경모궁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2> 현재 서울대 의대 경내에 남아있는 경모궁터 초석.
<3> 사도세자의 서자 중 한 명인 은신군 이신의 묘비석. 은신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서울역사박물관 뜰에 있
다. <사진작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② 3대 모역사건
정조 1년(1777) 7월 28일. 국왕의 경호를 담당하는 호위청(扈衛廳) 소속의 호위(扈衛)군관 강용휘(姜龍輝)는 대궐 밖의 개장국집에서 원동(院洞) 임장(任掌) 전흥문(田興文)을 만나 개국 이래 유례가 없는 일에 대해 논의했다.
강용휘는 전흥문에게 전립(戰笠)을 쓰고 칼을 차게 해 호위군사처럼 변장시킨 후 입궐시켰다.
입궐한 전흥문은 강용휘의 조카인 대궐 별감(別監) 강계창(姜繼昌)의 방을 찾았다. 강계창이 “왜 칼을 차고 있소”라고 묻자 전흥문은 “존현각 위에 올라가려 하는데,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찌르려는 것이오”라고 답했다.
강계창은 “나까지 연루돼 처형되겠소”라고 말했으나 실제로 놀라는 표정은 아니었다.
존현각(尊賢閣)은 정조의 침실이므로 정조를 암살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들이 이날을 거사일로 삼은 이유가 임금이 거처하는 편전(便殿)의 정문인 차비문(差備門)의 직숙(直宿:숙직)이 강계창이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올린 옥인.
고궁 박물관장./ 세손 시절 기록인 존현각일기 등에도 나오는데 노론 벽파의 암살 위협 때문에 밤을 새우는 날이
뜻이다.
허리 뒤에 철편(鐵鞭)을 두른 강용휘가 나타나 딸인 궁녀 강월혜를 불렀다. 강월혜가 부친의 계획을 방주(房主)인 상궁 고수애(高秀愛)에게 전하자 고수애는 아주 기뻐했다.
고상궁은 대비 정순왕후 김씨 쪽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궁중의 청소부인 조라치(照羅赤) 황가(黃哥)도 가담했다. 위로는 대궐의 가장 웃어른인 대비 정순왕후부터 국왕의 호위군관과 내시·상궁·궁녀에서 청소부까지 모두 가담했으니 실패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밤이 깊자 강용휘와 전흥문은 존현각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 잠든 정조를 살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야심한 시각에 정조가 잠을 자지 않고 독서하는 바람에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정조가 밤늦게 책을 보는 버릇은 세손 때부터 생긴 것이었다. 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살기 위한 생존 본능이었다. 정조실록에는 정조가 세손 시절을 회상하며 “옷을 벗지 못하고 자는 때가 또한 몇 달인지 알 수 없었다(정조실록 즉위년 6월 23일 )”라고 토로하는 내용이 나온다.
정조는 보장문(寶章門) 동북쪽 행랑채 지붕 위에서 들리던 소리가 존현각 지붕 위에 와서 멈추는 것을 느꼈다.
위험을 직감한 정조가 소리를 지르자 내시들과 액정서(掖庭署)의 액예(掖隸)들이 몰려왔다.
지붕 위에 올라가 보니 기와가 뜯겨지고 자갈·모래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국왕 독살설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임금을 죽이려고 자객이 들어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자객이 정확히 존현각 지붕 위로 올라왔다는 사실은 궁내에 내통자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신들 중에는 ‘도깨비의 소행 같다’고 희석시키려는 분석도 나왔다. 그러나 도승지 겸 금위대장(禁衛大將) 홍국영(洪國榮)은 “반드시 흉얼(凶孼)들이 화심을 품고 몰래 변란을 일으키려고 한 짓”이라며 “나는 새나 달리는 짐승이 아니라면 결코 궁궐 담장을 뛰어넘을 리가 없으니 즉각 대궐 안을 두루 수색하게 하소서”라고 요청했다.
숙위(宿衛:경호) 군사가 대궐 담장과 금중(禁中:궁궐) 수색에 나섰으나 어두운 밤이었고 수풀이 무성해 범인의 종적이 묘연했다. 이튿날 새벽 정조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대신들에게 “흉얼들이 엿보는 짓으로 내 마음이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숙위가 어찌하여 이처럼 허술한가?”라고 꾸짖으면서 비상 경호대책을 수립하게 했다.
위장(衛將)이 하룻밤에 다섯 교대로 순찰하던 옛 제도를 부활시키고 액예 중에서 근본이 불분명한 인물들을 교체했다.
그리고 존현각이 너무 노출돼 있다는 이유로 거처를 창덕궁(昌德宮)으로 옮겼다.
거처를 옮긴 닷새 후인 8월 11일 밤이었다. 수포군(守鋪軍)의 17세 소년군사 김춘득(金春得)은 경추문 북쪽 담장을 넘으려는 괴한을 발견하고 곁에서 자는 군사들을 발로 차서 깨웠다. 수포군 넷은 도주하는 괴한을 추격해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비상계엄이 내려진 상황에서 대담하게 다시 대궐 담을 넘던 전흥문이 체포된 것이다.
정조의 친국 결과 배후가 드러났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홍계희의 아들인 홍술해(洪述海)와 홍상범(洪相範) 부자였다. 홍술해는 정조 즉위 초의 정사를 ‘비위에 거슬린다’는 등으로 비아냥대다가 귀양 간 홍지해의 친형제이기도 했다.
정조 즉위와 동시에 몰락한 이들은 집안과 당파가 살려면 정조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이들은 정조의 호위군관 강용휘를 포섭하고 전흥문을 끌어들였다. 전흥문은 “저는 완력은 있었으나 가난했는데 강용휘가 돈 1500문(文)을 주고 여종까지 아내로 주면서 함께 일하자고 요구하기에 승낙했습니다”고 돈과 여색에 끌려 국왕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고 자백했다.
국문 결과 홍상범의 부친 홍술해가 배후에서 조종했음이 드러났다.
홍술해의 종 최세복(崔世福)이 서울과 흑산도 유배지를 오가며 홍술해의 지시를 전달했다.
무술을 할 줄 아는 종 최세복도 정조 암살에 직접 내보냈다.
궁궐의 액예 김수대(金壽大)를 통해 최세복을 배설방(排設房) 고직(庫直:창고지기)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배설방은 궁중 행사 때 각종 제구(諸具)를 설치하는 관청으로 배설방 고지기는 차비문 가까운 곳까지 드나들 수 있었다. 최세복을 배설방 고지기로 삼아 도승지 홍국영을 제거하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 즉 정조까지 살해하려는 계획이었다.
홍술해의 부인 이효임(李孝任)은 홍술해가 귀양 갈 때 부적(符籍)을 베개 속에 넣어 보낼 정도로 무속을 신봉했다.
효임은 용하다는 무녀(巫女) 점방(占房)의 신통력을 사서 정조를 제거하려 했다.
점방은 동서남북과 가운데(五方:오방)의 우물물과 홍국영의 집 우물물을 구해 홍술해의 집 우물물과 섞어 한 그릇으로 만든 다음 홍술해의 집 우물에 쏟았다. 점방은 붉은 안료 주사(朱砂)로 홍국영과 모성양반(某姓兩班)의 화상(畵像)을 그렸는데 모성양반이란 정조를 뜻했다.
쑥대화살에 두 화상을 얽어매고 공중에 쏘면서 둘은 반드시 죽는다고 저주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이런 방법이 통할 리 없어 궁중 난입사건 수사 도중 주술사건도 함께 발각되고 말았다.
수사 도중 홍상범의 사촌 홍상길(洪相吉)의 정조 암살 계획도 드러났다. 홍상길은 예문관 청지기 이기동(李奇同)의 친족 나인인 궁비(宮婢) 이영단(李永丹)을 시켜 한밤중에 정조의 침실에 들어가 살해하려고 계획했다.
여기에는 내시 안국래(安國來)도 관련됐다.
국왕의 호위군관부터 궁중의 액예와 나인·내시까지 임금을 보호해야 하는 모든 직책의 궁인이 연루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암살을 모면한 것 자체가 천운이었다. 이들이 막무가내로 정조 암살에 나선 것은 정조만 제거하면 그 다음은 걱정할 게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조 사후 노론 천하가 만들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막무가내 식 정조 암살의 배후가 모두 노론으로 드러나자 노론은 전전긍긍했다.
이런 와중에 노론의 호재가 발생했다. 국청에서 “네가 성궁(聖躬:임금)을 모해하고서 그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려 한 것이냐?”고 묻자 홍상길이 은전군(恩全君) 이찬(李<79B6>)을 추대하기로 했다고 답변한 것이었다. 3왕손으로 불렸던 은전군 3형제는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가 아끼는 이복동생들이었다.
은언군은 영조 때 사망했지만 은전군·은신군 형제가 살아 있었다. 이것이 전기였다.
위기의식을 느끼던 노론은 은전군 이찬이 추대받았다는 자백을 국면전환용으로 사용했다.
백관이 일제히 나서 은전군을 죽여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러나 홍상길의 일방적 추대 주장 외에는 그가 추대에 동의했다거나 이들과 만나 모의했다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상궁 고수애는 정순왕후 쪽 사람이니 정순왕후도 연루돼야 했지만 아무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론은 이를 계기로 정조 암살 기도 정국을 은전군 사형 주청 정국으로 바꿀 힘이 있었다.
백관은 만사를 제쳐 놓고 은전군의 사형만을 요구했다. 영의정이 백관을 거느리고 무려 44번이나 정청(庭請)하며 은전군의 처형을 요구했고, 삼사에서는 62번이나 사형을 주청했다. 정조가 거부하자 대신들은 의금부 뜰에 은전군을 끌어내 자결을 강요했다.
은전군이 거부하자 승지에게 자진(自盡=자살)하라는 탑교를 쓰라고 명했고 정조가 아닌 대신들의 명으로 전지가 작성됐다. 정조 1년 9월 24일. 이렇게 사도세자의 한 핏줄이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야 했다.
자객을 보내고, 주술하고, 왕손을 추대하려 한 이 사건은 3대 모역사건이라고 하는데, 적당(敵黨)인 노론에 포위된 정조의 정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출처]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노론이 보낸 자객, 왕의 침실 지붕 뚫고 암살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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