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의정에 남인 채제공 발탁, 권력 재편 승부수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71호] 20100620 입력
이념적 지향성이 강한 정치집단은 배타적 권력독점을 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이념은 치열한 논쟁을 거쳐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이 권력의 힘으로 성역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정치집단이 배타적 독점 권력을 장악할 경우 사회는 크게 퇴보하고 이런 상태를 해소하려는 정치개혁 요구가 거세지게 된다.
↑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앞 시사단(試士壇). 정조가 영남 남인들을 위해 도산서원에서 지방 별시를 실시한 것을
기념하려고 세운 비각이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정조
③ 남인의 부상
정조 즉위 무렵 조정은 노론 일색이었다.
소론의 당론을 지지하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이후 조선은 사실상 노론 일당독재 국가가 되었다.
남인으로는 드물게 영조의 지우(知遇)를 받았던 채제공(蔡濟恭)이 겨우 조정에 남아 있었고, 소론은 영조 4년 이인좌의 난과 영조 31년의 나주벽서 사건으로 대거 몰락해 명맥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노론 일당독재 체제를 다당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조선이 더 나은 미래로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치개혁이었다.
소론은 정조가 즉위 일성으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자 이에 고무되어 공세에 나섰다.
정조 즉위년 4월 1일 시골 유생 이일화(李一和)가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했는데, 정조실록은 조재한(趙載翰)이 사주했다고 전하고 있다. 영조 때 승지와 대사간을 역임한 조재한은 조현명(趙顯命)의 아들이자 조재호(趙載浩)의 조카였다. 조재호는 뒤주에 갇히기 직전 사도세자가 급박하게 구원을 요청했던 인물이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직후 “한쪽 사람들(노론)은 세자를 핍박했지만 자신은 세자를 보호했다”고 말했다가 노론에게 난역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이일화의 상소에 뒤이어 전 승지 이덕사(李德師)와 전 사간원 정언 유한신(柳翰申)이 상소했는데 정조실록은 ‘상소의 말이 똑같이 임오년(사도세자 사건)의 의리를 가장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채제공 초상
정조는 노론의 격렬한 반발을 무릅쓰고 남인 채제공을 정승에 임명하고, 다른 정승 자리가 비었을 때 충원하지 않
는 방식으로 독상(獨相) 체제로 끌고 가기도 했다.
소론의 조직된 공세였다. 이에 대해 정조는 뜻밖에도 크게 화를 내며 국청 설치를 명했다. 소론이 성급한 공세를 펼친 것이기도 했다. 겨우 즉위에는 성공했지만 정조의 권력은 아직 노론에 맞서기에는 크게 미약했다. 게다가 정조는 물론 소론도 사도세자 문제에는 딜레마가 있었다.
사도세자 비극의 정점에 영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원한을 풀려면 영조의 처분이 잘못이라고 선언해야 했는데, 이 경우 노론의 쿠데타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정조의 태생적 모순이었다. 정조는 영조가 죽기 한 달 전인 영조 52년(1776) 2월 대리청정하는 세손의 자격으로 사도세자 묘인 수은묘(垂恩廟)를 배알하고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임오년 처분에 대해 신(臣=정조)은 사시(四時)처럼 믿고 금석같이 지킬 것입니다”라고 다짐했다.
자신이 즉위해도 사도세자 문제로 정치보복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영조는 죽기 전 세손에게 ‘앞날에 이 일(사도세자 사건 재조사)을 범하는 자는 빈전(殯殿=임금의 시신을 모신 곳) 뜰에서라도 반드시 준엄하게 국문해 왕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영조는 사도세자 사건의 재조사를 주장하는 자들은 자신과 정조 모두의 역적이라고도 말했다.
정조는 국문 끝에 시골 유생 이일화와 이덕사·조재한 등 소론 인사들을 사형시켰다.
이는 노론의 의구심을 푸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정조 자신의 우익을 스스로 자르는 우를 범한 것이었다. 귀양 등의 처분으로 살려두었다가 훗날 노론 견제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패를 스스로 버린 셈이었다. 이것은 정조의 뜻이라기보다는 정조 초반의 실세였던 홍국영의 작품이었다.
홍국영은 노론 집안 출신이었으나 영조 말년 세손궁의 사서(司書)로서 노론 벽파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워 세손을 보호했다. 이를 높이 산 정조는 즉위 3일 만에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삼았다가 넉 달 후에는 도승지로 승진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이듬해(1777) 5월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경호실장)까지 겸임시켰다.
서른의 젊은 나이에 비서실장(도승지)과 경호실장(금위대장)을 겸임한 최초의 인물이 된 것이다.
자객이 침실 지붕까지 올라오는 상황에서 홍국영에게 도승지와 금위대장을 겸임시킨 정조의 조치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홍국영의 목표가 정조와 달랐던 것이 문제였다. 조선을 정상적인 왕조국가로 만드는 게 정조의 목적이었다면 홍국영의 목적은 노론 정권의 영수가 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홍국영은 소론이나 남인들이 정조에게 접근하는 것을 극력 차단했고, 조재한 등은 그 희생양이 된 것이다.
심지어 홍국영은 정조 2년(1778)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인 원빈(元嬪)으로 삼아 그 소생에게 정조의 후사를 잇게 하려 했다.
원빈이 이듬해 사망하자 홍국영은 장례식 때 은언군의 아들 이담(李湛)을 국왕을 대신해 전(奠)을 올리는 대전관(代奠官)으로 삼았다. 홍국영은 이담을 완풍군(完豊君)으로 일컬으며 ‘내 생질’이라고까지 말했는데, 완(完)자는 완산(完山:전주)을 뜻하고, 풍(豊)자는 자신의 본관인 풍산(豊山)을 가리킨 것이었다.
완풍군은 전주 이씨의 적손이자 풍산 홍씨의 외손으로서 정조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비로소 정조는 홍국영이 자신의 왕국을 꿈꾸는 인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홍국영이 정조 즉위 초 혜경궁의 풍산 홍씨와 대비 정순왕후의 경주 김씨를 쫓아낸 명분은 외척 제거였지만 그 속셈은 자신이 척리(戚里:임금의 외척)가 되는 데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정조는 재위 3년(1779) 9월 홍국영이 자진해서 벼슬을 내놓는 형식으로 전격적으로 쫓아냈다.
정조는 홍국영을 조정 원로들의 명예직인 봉조하(奉朝賀)로 임명해 ‘흑두(黑頭) 봉조하’로 불렸다.
홍국영은 조정에 심어 둔 심복들을 동원해 복귀를 꾀했으나 그를 배제하려는 정조의 의지는 굳었고 결국 홍국영은 정조 5년(1781) 4월 불과 서른넷의 나이로 강릉에서 죽고 말았다. 홍국영 실각 후 정조는 비로소 정국을 자의로 이끌 수 있었다.
이때 정조가 주목한 정치세력이 남인들이었다.
남인들 중 영남 지역의 남인들은 이인좌의 난에 대거 가담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과거 응시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이후 남인은 당의 기능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몰락했으나 성호 이익(李瀷)을 사사(師事)한 근기(近畿:경기 부근) 지역의 남인들은 당파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정계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드디어 재위 12년(1788) 2월 정조는 어필(御筆)로 직접 임명장을 써서 남인 채제공을 우의정에 특배(特配)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정조는 어필을 용정(龍亭)에 싣고 북 치고 피리 부는 무리를 앞세우고 채제공의 집에 가서 전하게 했으나 80여 년 만의 남인 정승 탄생은 쉽지 않았다.
채제공의 정승 임명 불가는 노론의 확고한 당론이어서 승지들은 전교를 받들기를 거부했고, 명령을 집행해야 할 이조판서 오재순(吳載純)도 왕명 집행을 거부했다. 정조는 승지들과 이조판서를 파직시키며 채제공의 정승 임명을 강행했다.
영남 남인들은 채제공의 정승 임명에 고무되었다. 안동 유생 이진동(李鎭東)을 비롯한 영남 유생들은 상소문과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을 갖고 상경했는데 무신창의록은 이인좌의 난 때 영남 사대부 모두가 이인좌에게 동조한 것이 아니라 반군에 맞서 싸운 사대부도 많다면서 그 공적을 기록한 책자였다.
이진동 등은 8월부터 대궐 문 앞에 꿇어 엎드려 상소를 올렸으나 노론이 장악한 승정원은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진동은 11월에야 경희궁으로 거동하던 정조가 시전 상공인들의 질고를 묻기 위해 어가(御駕)를 세운 틈을 타서 상소문과 무신창의록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예조에서는 정조에게 무신창의록을 읽지 말라고 권유했으나 정조는 밤 새워 다 읽은 다음 채제공에게 “그때 영남 사람 중에 속임과 유혹을 받아 역적이 된 자가 간혹 있었으나 어찌 이 때문에 전체 영남 사람의 앞길을 막아서야 되겠는가”라면서 무신창의록 간행과 대상자들의 포상을 명했다.
그러나 노론이 책자 간행을 거부하고 승지와 사관들마저 명을 받기를 거부하자 정조는 “오늘날 조정에 임금이 있는가?
신하가 있는가? 윤리가 있는가? 강상이 있는가? 국법이 있는가? 기강이 있는가?”라고 분노했다.
정조는 재위 16년(1792) 3월 각신(閣臣:규장각 신하) 이만수(李晩秀)를 영남으로 보내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별시(別試)를 치르게 했다. 이인좌의 난 이후 무려 65년 만에 영남 남인들이 복권되는 과거였다.
별시장(別試場)에 입장한 유생이 7200여 명, 시권(試券:답안지)이 5000여 장, 구경꾼까지 합쳐 1만여 명이 훨씬 넘는 대인파가 모여 ‘영남에 사대부가 만인’이라는 말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정조는 이만수가 가져온 시권을 직접 채점해 강세백(姜世白)과 김희락(金熙洛)을 합격시켰다.
그사이 남인들은 한두 명씩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서 세를 만들어 나갔다.
드디어 정조는 재위 19년(1795) 봄 채제공을 좌의정, 이가환을 공조판서, 정약용을 우부승지로 삼는 등 남인들을 대거 요직에 임명했다.
정약용이 ‘정헌 이가환 묘지명’에서 “이에 안팎의 분위기가 흡족하여 훌륭한 인재들이 모두 진출하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라고 서술한 것처럼 노론 일색의 조정 역학구도에 변화 조짐이 일었다. 그러자 노론에서는 주문모(周文謨) 신부 밀입국 사건을 비롯한 천주교 문제를 현안으로 부각시켜 남인 축출 공작에 나섰다.
[출처]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우의정에 남인 채제공 발탁, 권력 재편 승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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