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정승과 세자에게 권력 분산, 국정의 효율 극대화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8호] 20100530 입력
국왕이 직접 모든 국사를 챙긴다는 뜻이 ‘만기친림(萬機親臨)’이다.
세종은 모든 국사에 성실했으나 여러 종류의 지병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세종은 모든 국가기관이 최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북돋고 국가기관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것을 주요한 일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왕권까지 과감하게 의정부 또는 세자와 나누었다.
왕권보다 중요한 것이 국사라는 생각에서였다.
↑영릉과 신도비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던 것을 이장했는데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힌다. 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세종⑩ 시스템 통치
국가에는 많은 권력기관이 있다. 이들이 본연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국정 운영 성공의 요체다. 조선은 의정부와 육조(六曹)의 권력 조정이 오래된 숙제였다. 국가 최고기관인 의정부가 육조를 통할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면 왕권이 약화된다.
반면 육조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육조직계제를 실시하면 왕권은 강화되나 의정부는 유명무실해졌다. 개국 초 태조는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태종실록 14년(1414) 4월 17일자에 “의정부의 모든 일을 나누어서 육조에 돌렸다”라고 전하는 것처럼 태종은 육조직계제로 바꾸었다.
이로써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세종은 최고의 경륜을 지닌 정승(정1품), 찬성(贊成:종1품)들이 운집한 의정부가 유명무실한 것은 국가적 손해라고 보았다. 세종은 재위 14년(1432) 6월 “만약 한 사람의 정승을 얻을 수 있다면 국사는 근심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정승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한 군주였다.
그래서 세종은 재위 18년(1436) 4월 12일 “태조의 성헌(成憲)에 따라 육조는 각자의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품의(稟議)하고, 의정부는 가부를 의논한 뒤 임금에게 아뢰어 지시를 받아 다시 육조로 돌려보내서 시행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의정부 서사제의 부활이었다. 다만 이조·병조의 관리 임명과 병조의 군사 기용 등은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게 해 의정부의 왕권 침해도 방지하게 했다.
박동량(朴東亮)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수상(首相:영의정)은 자리가 비록 높기는 하나 맡은 사무가 없고, 좌상(左相:좌의정)은 이조ㆍ예조ㆍ병조 판서를 겸임하고 우상(右相)은 호조ㆍ형조ㆍ공조 판서를 겸임한다”고 전하고 있다.
세종은 영의정의 권한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서 “좌·우의정만이 모두 다스리고 영의정은 관여하지 않는 것은 예부터 삼공에게 임무를 전담시켰던 본의와 어긋나니 지금부터 영의정 이하가 함께 논의해 가부를 시행하게 하라”고 명했다.
이때의 영의정이 양녕대군을 지지하다 귀양 갔던 황희(黃喜)였다. 이렇게 세종은 한때 정적이었던 황희를 중용해 의정부 서사제의 장점도 살리는 조화의 정치를 주도했다.
<1>농사직설 세종의 명에 의해 정초 등이 편찬했다. 우리 실정에 맞는 농사법을 소개하는 게 목적이었다.
<2>향약집성방 세종의 명에 의해 전의감 노중례 등이 편찬한 의학서. 향약이란 ‘조선에서 생산되는 약’이란 뜻으로
역시 조선 실정에 맞는 치료법을 개발·보급하려는 것이었다.
세종은 재위 1년(1419) 2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데,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民惟邦本, 食爲民天)”고 말했다. 아무리 현란한 형용사로 치장한 정치가의 말도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말 이상의 애민사상을 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세종은 사회적 약자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관비(官婢)가 출산할 경우 7일 휴가를 주던 것을 100일을 더 주도록 했으며, 남편에게도 30일간 동반 출산휴가를 주었다. 또한 죄수의 처우에도 신경을 썼다.
“옥(獄)이란 것은 죄 있는 자를 징계하자는 것이지 사람을 죽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옥관(獄官)이 마음을 써서 살피지 않아서 심한 추위와 무더위 속에, 질병에 걸리거나 얼거나 굶어서 죽는 일도 없지 않으니 참으로 불쌍하다.(세종 7년 5월 1일)”
세종은 재위 30년(1448) 8월에는 각도 감사에게 “지방의 감옥(<72B4>獄)은 죄인을 가두어두는 곳이지만 보호하지 않으면 횡액으로 병에 걸려 죽는 사람이 있게 된다”면서 구체적인 죄수 보호책을 지시했다.
그중 ‘음력 4월부터 8월까지는 새로 냉수를 길어다 자주 옥중에 비치할 것’ ‘10월부터 정월까지는 옥 안에 짚을 두껍게 깔 것’ 등과 ‘목욕을 시키고 머리를 감게 할 것’ 같은 내용도 있다. 세종이 이처럼 죄수에게까지 세심한 신경을 쓴 것은 그 자신이 평생 질병을 달고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종은 ‘움직이는 종합병동’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지병이 많았다. 태종은 상왕 시절인 세종 즉위년(1418) 10월, 하연(河演)을 통해 의정부와 육조에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는데 몸이 살찌고 무거우니(肥重) 마땅히 가끔 밖으로 나와 노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했다. 몸은 비대한 데다 운동량이 부족했다.
재위 7년(1425)에는 명나라 사신을 따라온 요동(遼東) 출신 의원(醫人) 하양(河讓)이 “전하의 병세는 상체는 성하지만 하부가 허한데 이는 근심이 많고 과로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대로 과로에 시달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전부터 자주 물을 마시는 병이 있고, 또 등 위에 부종(浮腫)을 앓고 있는데, 이 두 가지 병에 걸린 것이 벌써 2년이나 됐다…여기에 임질(淋疾)을 얻어 이미 열하루가 되었는데 모든 국사를 청단(聽斷)하고 나면 기력이 노곤해진다.(세종실록20년 4월 28일)”
이때의 임질은 성병이 아니라 태종 6년(1406) 권근(權近)이 “(신이) 임질이 있어 소변이 잦아 그치지 않습니다”라고 사직을 청했던 것처럼 자주 오줌이 마렵지만 막상 소변은 잘 나오지 않는 증상을 뜻한다. 의원들은 세종에게 “이 병을 치료하려면 희로(喜怒)를 금하고 마음을 깨끗이 가지고 즐겁게 길러야만 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어의들의 처방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국사에 스트레스가 없을 수 없었고 병은 더해갔다.
“근년 이래 내가 소갈증(消渴症)과 풍습병(風濕病)을 앓아서 무릇 모든 정령(政令)과 일을 하는 것이 처음만 못하다. 온정(溫井 : 온양온천)에 가서 목욕한 이후에는 소갈증과 풍습병이 조금 나은 것 같다.
그러나 눈병이 더 심하게 되어 이로 인하여 여러 병증(病症)이 번갈아 괴롭히니 정치를 부지런히 하기가 쉽지 않다.
(세종실록 24년 6월 16일)”
여기에 젊어서 한쪽 다리가 치우치게 아픈 병세가 있었고, 등창도 있어서 한번 발작하면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했다. 그래서 세종이 고안한 묘수가 세자 대리청정이었다.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해 세자에게 서무를 맡기려 하였다. 첨사란 진(秦)나라에서 태자(太子)의 가사를 돌보던 벼슬명이었으나, 후대에 와서는 태자궁을 뜻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종이 선위의 뜻을 표했을 때 민무구·무질 등이 기쁜 표정을 보였다는 이유로 사형 당한 전례가 있어 신하들은 일제히 반대했다. 세종은 대신들을 설득해 세종 25년(1443) 종3품의 첨사 1인과 정4품의 동첨사(同詹事) 2인을 둔 첨사원을 출범시키고 대리청정을 시켰다. 세종이 대리청정을 시킨 이유는 병도 병이지만 미리 국왕 수업을 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한 집안에서도 가장(家長)의 유고(有故)시에는 장자가 대신하는데, 하물며 세자는 나라의 버금이고 임금의 버금이니(國儲君副) 종묘 제사와 강무(講武)를 세자가 대리하는 것이 진실로 방해될 것이 없다. 또 사대부를 접견하고 정치의 대체를 습득하는 것이 또한 어찌 해롭겠는가?(세종실록 24년 5월 3일)”
이때부터 세종이 사망하기까지 7년간은 세종과 세자(문종)가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린 기간이었다. 성삼문이 지은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 서문에서 “우리 세종과 문종께서 이것을 딱하게 여기시어 이미 훈민정음을 만드시니 천하의 모든 소리가 비로소 다 기록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되었다”라고 쓴 대로 세자는 훈민정음 창제에도 힘을 보탰다.
세종 시대 후반의 여러 치적들, 즉 세종 26년의 전분(田分) 6등, 연분(年分) 9등의 전세법(田稅法) 제정이나, 27년의 용비어천가 완성, 28년의 훈민정음 반포 등의 치적은 세종과 문종의 공동 작품이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병세 속에서도 국사를 놓지 않던 세종은 재위 32년(1450) 2월 영응대군 집 동별궁(東別宮)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만 53세였다.
사관은 졸기에 이렇게 덧붙였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통찰했으니 남과 북이 복종하고 사경(四境)이 편안하여 백성들이 살아가는 것을 즐겁게 여긴 지(民樂生生者) 무릇 30여 년이다. 성덕이 높고 높으니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고 해동 요순(海東堯舜)이라고 불렀다.(세종실록 32년 2월 17일)”
‘백성들이 살아가는 것을 즐겁게 여기는 것’ 이상의 정치는 없을 것이다. 세종의 정사는 나라 밖에도 소문이 나서 북방 여진족과 남방의 왜인들이 다투어 귀화했다. 세종 5년(1423) 2월 대마도의 왜인 변삼보라(邊三甫羅) 등 24인이 ‘조선은 인정(仁政)을 시행한다는 말을 듣고 성덕을 앙모해서 왔다’면서 귀화했다.
세종실록 6년(1424) 12월 29일자는 세종이 궐내에 화붕(火棚:불꽃놀이)을 설치하고 귀화한 여진족(女眞族), 왜인(倭人)들과 함께 구경했다고 전하고 있다. 세종은 재위 1년(1419) 5월 이미 “귀화한 왜인 등은 곧 우리나라 백성”이라는 원칙을 세워놓았다.
귀화한 이민족도 내 국민이란 열린 자세가 만든 ‘정치의 한류’였다. 열린 마음과 성실한 자세로 만기(萬機)에 친림한 것이 세종의 성공 비결이었다. (세종 끝. 다음 주부터는 정조가 시작됩니다)
[출처]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3정승과 세자에게 권력 분산, 국정의 효율 극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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