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당대 최고 언어학자 세종, 말과 글의 혁명 이끌다.

야촌(1) 2010. 11. 3. 14:30

■ 당대 최고 언어학자 세종, 말과 글의 혁명 이끌다.

 

이덕일의 事思史 :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6호] 20100516 입력

 

군사력이 아무리 강해도 문화 수준이 낮으면 강국이 될 수 없다.

일시적으로는 세상을 지배할지 모르지만 곧 높은 문화에 의해 녹아내리게 마련인 것이다.

 

세종은 외교정책상으로는 중국에 사대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독자성을 추구했다.

금속활자를 만들고 아악(雅樂)을 정비했다. 무엇보다 훈민정음을 직접 만들어 백성들의 언어생활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려 했다.

 

 

성공한 국왕들 세종
⑧훈민정음 창제

 

세종은 훈민정음을 직접 창제하고 이를 토대로 용비어천가를 제작하게 해서 조선의 무궁한 번성을 기리게 했다. 
    우승우(한국화가)

 

세종의 업적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누가 만들었을까? 세종대왕이 신숙주·성삼문 같은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는 공동창작설이 일반적이다.
 

신숙주 등이 요동에 유배 온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13차례나 만나 자문을 받았다는 일화까지 곁들여지면 의심할 것이 없어 보인다. 공동창작설의 진원지는 조선 초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세종이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고 신숙주·성삼문에게 명해서 언문을 만들었다...(언문은) 우리나라와 여러 나라의 말에 대해 문자(文字=한자)로는 적지 못하는 것까지 다 통해서 막힘이 없었다”라며 공동창작인 것처럼 썼다.


조선 중기 허봉(許<7BC8>·1551~1588)의 해동야언(海東野言)이나 조선 후기 이긍익(李肯翊·1736~1806)의 연려실기술도 모두 신숙주·성삼문 등과 함께 만들었다고 썼는데, 하나같이 용재총화를 인용했다.
 

한마디로 성현의 용재총화가 공동창작설의 진원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훈민정음 창작 사실이 최초로 공개된 세종 25년(1443)에 성현은 네 살에 불과했다.


세종 21년(1439) 태어난 성현은 세조 8년(1462)에 23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연산군 10년(1504)에 사망한 인물이다.용재총화는 성현이 세상을 뜬 연산군 10년 저술한 것인데, 이때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세종 25년보다 61년 후였다.


따라서 용재총화보다 앞선 사료를 가지고 훈민정음 창작자를 찾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처음 전하고 있는 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자의 기록은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달에 임금이 직접 언문(諺文) 28자(字)를 만들었다. 그 글자는 옛 전자(篆字)를 본떴는데,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문자(文字:한자)에 관한 것과 우리나라의 이어(俚語:이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다.

글자는 비록 간요(簡要)하지만 전환(轉換)이 무궁한데 이를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

세종실록은 ‘임금이 직접 언문 28자를 만들었다(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며 세종이 직접 창제했음을 전해주고 있다.

 

세종의 단독 창작설인 셈이다.

신하들이 편찬하는 실록은 신하들이 임금의 명을 받아 어떤 일을 했을 경우 반드시 그 사실을 기록하기 때문에 ‘임금이 직접 만들었다’는 기록은 세종이 혼자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럼 신숙주·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과 공동창작인 것처럼 인식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훈민정음 창작이 아니라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을 가지고 운서(韻書)를 편찬하게 한 것을 훈민정음 창제에 가담한 것으로 혼동하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한자 자전(字典)은 두 종류가 있다. 옥편(玉篇)이 뜻을 중심으로 분류한 자전이라면 운서(韻書)는 음을 중심으로 분류한 자전이다.

 

신숙주 등이 훈민정음 창제를 도우려 요동에 갔다면 그 시기는 세종 25년 이전이 돼야 하지만 신숙주 등이 요동에 가서 황찬을 만난 것은 2년 후인 세종 27년(1445)이다. 세종실록 27년(1445) 1월 7일자는 “집현전 부수찬(副修撰) 신숙주, 성균관 주부(注簿) 성삼문, 행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을 요동에 보내 운서(韻書)에 관해 질문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재집(保閑齋集)의 부록에 이조참판 이파(李坡)가 지은 묘지문(墓誌文)이 있는데 여기에도 같은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때 한림학사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에 유배되었는데 을축년(세종 27년:1445) 봄에 공(신숙주)에게 북경에 가는 사신을 따라서 요동에 가서 황찬을 만나 질문하게 했다.

 

공이 언자(諺字:훈민정음)로 중국말을 번역하고(諺字=華音) 질문을 쉽게 풀이해서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황찬이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이때부터 요동에 갔다 온 것이 무릇 13번이다.(보한재집, 부록 묘지)”

 

명사(明史)는 황찬이 제노통지(齊魯通志) 100권과 황찬 문집(黃瓚文集) 12권을 저술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세종이 신숙주와 성삼문 등을 그에게 보낸 것은 훈민정음을 가지고 한자에 음을 다는 자전 편찬 작업에 자문을 얻기 위해서였다.

 

세종이 신숙주 등을 필요로 했던 것은 훈민정음이란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훈민정음을 가지고 한어에 음을 다는 자전 편찬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신숙주는 일종의 한자 발음자전(發音字典)인 운서(韻書)를 만드는 데 가담했다.

 

명 태조 주원장은 1375년 홍무정운(洪武正韻)을 간행하는데, 세종은 신숙주 등에게 홍무정운 역훈(譯訓)을 편찬하게 했다.홍무정운 역훈은 홍무정운의 운목(韻目)에 훈민정음으로 주음(注音)하게 하고 일부 주석을 단 것인데 단종 3년(1455)에야 완성되었다.

 

세종은 재위 30년(1448) 신숙주·최항·박팽년 등에게 동국정운(東國正韻)을 간행하게 해 훈민정음으로 조선 한자음을 바로잡았다. 신숙주 등은 이처럼 훈민정음으로 한자음을 다는 운서 편찬 작업을 한 것인데 마치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한 것처럼 잘못 알려졌던 것이다. 조선 중기 이정형이 쓴 동각잡기(東閣雜記)에 훈민정음과 운서 편찬 과정이 순서별로 실려 있다.

 

“임금이 언문 자모 28자를 만들었다. 대궐 안에 국(局)을 설치하고 성삼문·최항·신숙주 등을 뽑았다. 이때 한림학사 황찬이 요동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성삼문·신숙주에게 명해 사신을 따라 요동에 가서 황찬에게 음운(音韻)에 대해 묻게 했다. 무릇 요동에 13번이나 왕래했다.(동각잡기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

 

동각잡기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그후 신숙주 등에게 운서를 만들게 했다고 전하는 셈이다.

훈민정음 창제 소식이 전해진 두 달 뒤인 세종 26년(1444) 2월 집현전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 등 7명의 학사가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유명한 상소문을 올린다.

 

최만리 등은 ‘중국의 제도를 준행해야 하며, 현행 이두를 써도 뜻이 통할 수 있다’면서 새 글자 창제를 반대했다.

그러자 세종은 최만리 등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또한 너희들이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四聲) 칠음(七音)을 아느냐?

 

자모(字母)가 몇 개인지 아느냐?

만약 내가 운서(韻書)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집현전 학사들에게 “너희들이 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을 아느냐?”라고 꾸짖고 ‘내가 아니면 누가 운서를 바로잡을 것이냐?’고 물을 정도로 세종은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다. 세종은 최만리 등 6명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가 하루 뒤 풀어주었으나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만은 파직시켰다.

 

세종은 재위 16년(1434) 역대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실을 한문과 그림으로 그린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간행했는데,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해 반포하려 하면서 정창손에게 이렇게 하면 민간에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많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정창손은“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도 충신·효자·열녀가 배출되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반드시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라고 반박했다.

 

세종은 정창손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속유(俗儒)’라고 비판하면서 파직시켰다.

훗날 정창손은 사위 김질과 함께 상왕 단종 복위 기도 사건을 고변하는 장본인이 된다.

 

세종은 재위 28년(1446) 9월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정인지는 그 서문에서 “계해년(세종 25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를 처음으로 창제하셔서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라고 말해 세종이 직접 만들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나랏말미 中듕國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훈민정음 어제(御製)’에서 세종도 “내 이를 불쌍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라고 자신의 창작임을 밝히고 있다. 한 해 전인 세종 27년(1445) 완성된 용비어천가는 불휘 기픈 남 ⑧매 아니 뮐 곶 됴코 여름 하니/ㅣ미 기픈 므른 래 아니 그츨 내히 이러 바⑧래 가니라고 노래하고 있다.

 

세종은 조선을 뿌리 깊은 나라, 샘이 깊은 나라로 만드는 것은 문화적 주체성이란 사실을 자각했고 실천했던 군주였다.

 

[출처]이덕일의 事思史 : 조선 왕을 말하다 - 당대 최고 언어학자 세종, 말과 글의 혁명 이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