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고려시대 인물

고려왕기(∥)

야촌(1) 2010. 6. 12. 11:31

 ↑고려 제20대왕 신종(紳宗, 1144~1204)

 

■ 신종(紳宗)

 

고려 제20대왕 신종(紳宗 : 재위 1197~1204)의 휘(諱)는 탁(晫), 초명(初名)은 민(旼), 자는 지화(至華), 시호는 정효(靖孝),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의 다섯째 아들이자 의종과 명종의 막내 동생이다.

 

1154년(의종 8) 평량후(平凉侯)에 책봉되었다가 최충헌(崔忠獻)형제가 명종을 폐하고 왕으로 추대하여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으며, 1198년,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었고 관서(關西) 민가의 안대(安碓)를 금지하였다.

 

같은 해 만적의 난이 일어난 것을 비롯하여 이듬해에는 명주(강릉)와 동경(경주), 뒤이어 진주와 전주, 합주(합천) 등지에서 민란이 계속 일어났다. 1199년에 최충헌이 문무관의 인사행정(人事行政)를 도맡았는데 이로부터 모든 실권은 최충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같은 해에 수양장도감(輸養帳都監)과 오가도감(五家都監)을 두었다.

 

1202년에 탐라(제주도)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소부소감(少府少監)인 장윤문(張允文)과 중랑장(中郞將) 이당적(李唐積)을 안무사(安撫使)로 보내어 평정하였다. 1204년 등창이 심하여 태자에게 양위하였다. 능은 개풍군 청교면에 위치한 양릉(陽陵)이다.

 

 

↑고려 제21대왕 희종(熙宗, 1181~1237)

 

■ 희종(熙宗)

 

 

고려 제21대 희종왕(熙宗王 : 재위 1204~1211)의 이름은 영(英), 초명 연(淵), 덕(德), 자는 불피(不陂), 시호는 성효(誠孝), 신종(紳宗)과 정선태후(靖宣太后) 김씨의장 자 이고. 비는 영인후(寧仁后) 진(縝)의 딸 성평왕후(成平王后)이다.

1200년, 태자로 책봉되고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1205년에 최충헌(崔忠獻)을 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에 봉하였으며 1206년에 다시 진강후(晋康侯)에 봉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우게 하였으며 1207년 최충헌의 청으로 유배자 300여명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방면하였다. 1208년 개성 대시(大市) 좌우의 긴 행랑(行廊) 1,080영(楹)을 다시 짓게 하였는데 오부방리(五部坊里)와 양반의 집에서 미속(米粟)을 내게 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휘두르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를 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뒤이어 자란도(紫鸞島)로 옮겨졌고 1215년 다시 교동으로 옮겨졌다가 1219년 서울에 봉영(奉迎)되었다. 이렇게 서울에 돌아와서 딸 덕창궁주(德昌宮主)를 최충헌의 아들 성(珹)과 혼인시켰다.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최우(崔瑀)에 의하여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1237년에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는 성효(誠孝)이며 능은 강화도 양도면에 위치한 석릉(碩陵)이다.

 

 

↑고려 제22대왕 강종(康宗, 1152~1213)

 

■ 강종(康宗)

 

고려 제22대왕 강종(康宗 : 재위 1211~1213)의 이름은 숙(璹), 정(貞), 오(吳), 자는 대수(大垂), 시호는 원효(元孝), 명종(明宗)과 의정왕후 김씨(金氏)의 맏아들 이다. 비(妃)는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이다. 1171년(명종1) 관례(冠禮)를 올리고, 1173년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1197년 최충헌에게 쫓기어 부왕과 함께 강화도로 갔다.

 

1210년(희종 6) 소환되어 이듬해 수사공상주국한남공(守司空上柱國漢南公)에 봉해졌으며, 희종(熙宗)을 폐한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왕은 재위2년 만에 돌아가셨는데 향년62세였고 능은 후릉(厚陵)으로 오늘날 황해북도 개풍군 현화리이다. 

 

 

↑고려 제23대왕 고종(高宗, 1192~1259)

 

■ 고종(高宗)

 

고려 제23대왕 고종(高宗 : 재위 1213~1259)의 이름은 철(鐵), 초명은 진(瞋). 질(侄). 자는 대명(大明), 천우(天祐), 시호 안효(安孝). 강종(康宗)과 원덕태후(元德太后) 유씨(柳氏)의 맏아들이다. 비(妃)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安惠太后) 유씨(柳氏)이다.

 

1212년(강종 1년)에 세자에 책봉되고,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최씨 일가의 무단(武斷)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다가, 1258년 최의(崔竩)가 살해되자 정권을 되찾았다. 재위 기간에 몽골족 등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았다.

 

1218년 거란의 침공을 받고 이를 격퇴하면서 몽골의 침입에 대하여는 협약을 맺었다(강동성 전투). 1225년 몽골 사신 제구유(著古與)가 귀국 도중 도적에게 피살된 것을 구실로 하여 재침하자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각지에 몽골의 다루가치(達魯花赤 : 행정 감독관) 72인을 두게 하고, 또 약간의 수비군을 주둔케 했다.

 

특히 1231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입을 받고 1232년 강화도(江華)에 천도하여(강화천도), 28년간 몽골에 항쟁하였다. 왕의 친조(親朝)와 태자 왕전(王倎)의 볼모를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되어, 이후 고려는 사실상 원나라의 속국으로서 공민왕 때 까지 굴욕을 겪었다.

 

1235년 제3차 침입을 받고, 1238년 경주 황룡사(皇龍寺) 9층 목탑을 소각당한 외에도 귀중한 문화재를 많이 잃었다. 1252년 제6차의 침입을 받았을 때는 남녀 무려 약 2십만 6천 8백 명의 포로를 내고, 태자(太子)의 입조를 약속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사실상 몽골에 굴복했다.

 

문화 발전에 힘써, 팔만대장경을 간행케 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팔만대장경은 원나라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간행하였다. 능은 강화의 홍릉(洪陵)이고, 몽골에서 내린 시호는 충헌왕(忠憲王)이다.

 

 

↑고려 제24대왕 원종(元宗, 1219~1274)

 

■ 원종(元宗)

 

고려 제24대왕 원종(元宗 : 재위 1259~1274)의 휘(諱)는 정(禎), 초명(初名)은 전(典), 자는 일신(日新), 시호 순효(順孝). 고종(高宗)과 안혜태후(安惠太后) 유씨(柳氏)의 맏아들이다. 비는 김약선(金若先)의 딸인 정순왕후(靜順王后)인데, 이후 충렬왕이 순경태후(順敬太后)로 추존했다. 1235년(고종 22년)에 태자가 되었으며, 1259년 강화를 청하기 위해 몽골에 갔다가 그해 고종이 죽자 이듬해 귀국하여 즉위했다. 원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경왕(忠敬王)이다.

 

고려 역대 국왕 중 묘호에 조(祖)나 종(宗)자를 사용한 마지막 왕이며, 이후에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조나 종이 아닌 왕자를 붙여야 했고, 앞에 글자는 원나라의 충성을 맹세하는 증거인 "충 (忠)"자를 넣어야 했다. 그리고 이때 이후로 "짐"은 "고" 또는 "과인"으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선지"는 "왕지"로 명칭이 격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관직 용어들의 명칭들도 모두 격하되었다.

 

1269년 임연(林衍)에 의해 잠시 폐위되었으나, 원의 도움으로 다시 왕위에 올랐다. 같은 해 최탄(崔坦) 등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에 투항하자, 몽골은 서경에 동녕부(東寧府)를 두었다. 1270년 개경 환도를 주장하였으나 임연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크케 반대하였다.

 

원종은 삼별초(三別抄)를 시켜 임유무를 제거하였다. 임유무가 죽음으로써 무신 정권 또한 끝이 났다.

개경으로 환도한 후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는데, 1273년 여·몽 연합군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탐라에 다루가치총관부(摠管府)를 둔 원나라로부터 일본 원정을 위한 전함 300척을 만들라는 요청을 받았다.

원나라에서 매빙사(妹聘使)가 오자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하여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능은 소릉(韶陵)이다.

 

 

↑고려 제25대왕 충렬왕(忠烈王, 1236~1308)

 

■ 충렬왕(忠烈王)

고려 제25대왕 충렬왕(忠烈王 : 재위 1274~1308), 휘(諱)는 거(拒), 구휘(舊諱)는 심(諶). 춘(瑃). 원종(元宗)과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金氏)의 맏아들이다. 비(妃)는 원(元)나라 세조(世祖)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이고 구비(舊妃)는 시안공(始安公) 인(絪)의 딸 정화궁주(貞和宮主)와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金氏)이다.

 

1260년(원종 1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1272년(원종 13) 원나라에 갔으며, 1274년(원종 15년) 음력 5월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결혼하고 변발· 호복 등 몽골 풍속에 따랐다. 그 때문에 조정 신하들마저 이 풍습을 따랐고, 후엔 백성들까지 몽골의 풍습을 따른다. 이때 승려 일연은 1285년(충렬왕 11) 《삼국유사》를 만들어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결혼한 그해 음력 6월 원종이 죽자 고려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으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했다. 왕위에 즉위한 그해 원나라 세조의 강요로 일본 정벌에 동로군(東路軍)을 파견하였다.

 

1277년(충렬왕 3년) 원나라의 병마를 사육하기 위해 제주도에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했다. 1280년(충렬왕 6년) 정동행중서성이 설치되자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도 했다. 1290년(충렬왕 16년) 합단(哈丹)이 내침하여 강화로 천도했으며, 김방경의 활약으로 수차 왜구·여진의 침입을 격퇴할 수 있었다.

 

 

↑고려 제26대왕 충선왕(忠宣王, 1275~1325)

 

■ 충선왕(忠宣王)

 

고려 제26대왕 충선왕(忠宣王 : 재위 1308~1313), 초명은 원(原), 휘(諱)는 장(璋) 자는 중앙(仲昻),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아들이다. 몽골식 이름은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익지례보화)이며, 정비(正妃)는 원나라 진왕(晉王) 감마랄(甘麻刺)의 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 : 보탑실린공주(寶塔實燐公主))이다.

 

1277년(충렬왕 3) 세자(世子)로 책봉되고, 다음 해 원나라에 가서 몽골 이름을 받았다. 1296년(충렬왕 22)에 몽골 황실의 진왕(晋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보탑실린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 원도(元都 : 북경)에서 혼사를 올렸는데 앞서 서원후 영(西原候 瑛)·홍문계(洪文系)·조인규(趙仁規)의 딸을 비(妃)로 맞아들인 바 있다.

 

1297년 어머니가 갑자기 병으로 죽자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된 것이 내총(內寵)을 투기(妬忌)하는 자들의 소치(所致)라 하여 당시 부왕(父王 : 충렬왕)의 총애를 믿고 날뛰던 무비(無比 : 백야단)와 그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가두었다. 이 지나친 처사와 왕비의 죽음에서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충렬왕은 왕위를 넘겨줄 뜻을 원나라에 알렸다.

 

그리하여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고, 부왕(父王)은 태상왕(太上王)이라 했다. 젊은 왕은 구폐를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실행하려 하였으나 권문세가의 비방을 많이 받았다. 정국(政局)의 쇄신을 꾀하고 먼저 관제(官制)를 개혁하던 무렵에 조비(趙妃)를 질투해 오던 왕비 계국공주와 왕의 반대파가 음모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충선왕 즉위 7개월 만에 다시 충렬왕이 복위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왕실의 치정 문제도 관계되지만, 충렬·충선 두 왕을 둘러싼 정치적 모략과 중상의 결과로 보인다. 충선왕이 왕위를 아버지 충렬왕에게 반환한 뒤 원나라로 간 뒤에도 그에게 원한을 품은 왕유소· 송린· 석천보 등이 그를 모함하여 충렬· 충선왕 부자지간을 이간시켰으며, 계국공주의 재가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오히려 처형되었다.

 

충선왕은 다시 즉위할 때까지 10년간 계국공주와 원나라 서울에 머물면서 후에 무종(武宗)이 된 회령왕(懷寧王) 해이샨 및 인종(仁宗)이 된 태자 아유르발리파드라(愛育黎拔力達)의 형제와 친하게 지냈다. 1307년 원나라의 성종(成宗)이 죽자 왕위 계승이 실력 문제로 비화되었을 때 충선왕은 무종(武宗)을 옹립하여 공을 세웠다.

 

이로써 원 황실과의 친분이 두텁게 되어 심양왕[1]에 즉위하였으며, 1308년 아버지 충렬왕이 죽자 고려왕에 복귀하여 다시 정치의 쇄신에 열의를 보였으나 오래 고려에 머무르지 않고 원나라 생활을 즐기며 전지(傳旨)를 통하여 국정을 행하였다.

 

왕이 해마다 많은 물품을 원나라로 가져가고 계속 원나라에 머물길 원하자, 왕의 귀국 운동이 있었으나 아들 강릉대군 도(江陵大君 燾)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세자 감(鑑)은 충선왕이 죽였다), 조카를 심양왕의 세자로 삼았으며 나중에 그에게 전위(傳位)하면서 끝내 귀국을 피하였다.

 

이는 본국에 대한 애착 결여, 원황실의 우대 등에도 이유도 있고, 충선왕의 본성이 담박하여 불교를 좋아하고 글을 즐기며 그림도 잘 그리는 등 정치와 권력에는 애착이 적었던 까닭도 있다. 그 무렵 원나라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하여 내외 서적을 모으고, 고려에서 이제현(李齊賢) 등과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 등의 학자를 초빙하여 학문을 연구하며 고려 문화 수입에 힘을 썼다.

 

한편 충선왕의 개혁정치로 말미암아 홍중희, 홍중경, 홍복원 등이 기득권을 잃게 되자, 이들 홍씨들은 고려왕이 심양왕을 겸하는 일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입성론을 펼쳤다. 입성론(立省論)은 고려를 원나라의 행성(行省, 행중서성)으로 삼아달라는 주장을 가리킨다.

 

그 결과로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시작하자마자 좌초하게 되며, 또한 충선왕은 강제 폐위되었고, 고려 왕위는 충선왕의 장자 강릉대군(江陵大君)에게, 심양 왕위는 당시 충선왕의 조카이며 태자였던 연안군(延安君) 왕고(王暠)에게 물려주게 된다.

 

그 뒤 고려왕과 심양왕은 서로에게 정통성을 주장하며 다투게 되며, 특히 고려 말에 한때 고려의 태자였던 심양왕이 고려 왕위를 요구한 횟수가 잦았다. 뒷날 심양왕은 줄곧 고려 왕족에게 이어졌으며, 고려 왕족의 후예였던 마지막 심양왕 툭타부카(脫脫不花)가 후계자 없이 죽자 요동 정벌론이 고려에서 일어나며, 이를 위해 진군하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고려는 멸망한다.

 

원나라의 인종(仁宗)이 죽자 간신의 참소로 토번(吐藩, 지금의 티베트) 땅에 유배되었다가 태정제(泰定帝)가 즉위하자 유배가 풀려 원나라 대도에 돌아와 2년 후에 죽었으며, 덕릉(德陵)에 묻혔다. 

 

 

↑고려 제27대왕 충숙왕(忠肅王, 1294~1339)

 

■ 충숙왕(忠肅王)

 

고려 제27대왕 충숙왕(忠肅王 : 재위 1313~1330, 1332~1339), 초명은 도(燾), 휘(諱)는 만(卍). 자는 의효(宜孝). 시호(諡號)는 의효(懿孝), 충선왕과 몽골인 의비 야속진의 둘째 아들이고, 비는 원나라 영왕(營王)의 딸 복국공주(僕國公主)와 홍규(洪奎)의 딸 명덕태후(明德太后)이다.

 

1313년(충선왕 5) 강릉대군(江陵大君)으로 있다가 양위 받아 즉위하였으며, 아버지 충선왕(忠宣王)은 상왕(上王)으로 있었다. 그러나 즉위 후 정치를 소홀이 하여 혼란이 오자 이 기회를 틈타 조카 연안군(延安君) 고(暠)를 심양왕(瀋陽王)의 세자로 삼아 양위하고 원나라 양왕(梁王)의 딸을 맞게 하였다.

 

이리하여 원실의 대우를 받게 된 심양왕 고는 왕위 찬탈의 뜻을 품고 충숙왕이 주색과 사냥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구실을 참소하여, 충숙왕이 원나라에 5년간 체류하였으며, 그때 왕인(王印)까지 빼앗긴 일이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사정으로 1325년에 귀국한 충숙왕은 심양왕 고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한종유(韓宗愈)등 신하들의 반대로 취소하고, 왕자 정(禎 : 후의 충혜왕)을 세자로 삼은 뒤 1330년 양위하였다. 그리고 원에 가서 부마 상주국 일수왕의 호를 받았다.

 

그러나 나이 어린 충혜왕은 수렵·유희를 일삼고 소행이 옳지 못하자 원나라의 명 으로 1332년 다시 복위되었다가 1339년 죽었다. 능은 의릉(毅陵)이다.

 

 

↑ 고려 제28대  충혜왕(忠惠王, 1315~1344)

 

■ 충혜왕(忠惠王)

 

고려 제28대왕 충혜왕(忠惠王 : 재위 1330~32. 1339~44), 휘(諱)는 정(禎), 충숙왕과 홍규(洪奎)의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의 아들이다. 비는 원나라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딸 덕녕공주(德寧公主), 1328년(충숙왕 15)세자로 원나라에 불모로 가 있다가 이듬해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를 요청하여 원나라 문종(文宗)에 의해 왕으로 책봉되어 1330년에 돌아와 즉위 했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복위 하였으나 호협 방탕하여 서모인 경화공주(慶華公主)와 수비(壽妃) 권씨(權氏)를 욕보이고 미녀가 있으면 귀천을 불구하고 강음(强淫)하였다. 이어 사신을 보내 원나라에 뇌물을 바치고 국인(國印)의 반환을 요청 하였는데 조직(曺直)등 심양왕(瀋陽王) 일파가 국인을 영안궁(永安宮)에 감춘 뒤에 군사 1.000명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 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형부(刑部)에 투옥되어 경화공주의 사건을 심양왕 일당들의 증언과 대질하게 되었으나 그를 미워하던 백안(伯顔)의 실각으로 석방되어 귀국했다. 그러나 여전히 횡포가 심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화를 탕진함으로써 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1343년 결국 원나라에 의해 다시 폐위되어 원나라로 끌려가 게양현으로 유배를 가다가 이듬해 악양현에서 죽었다. 독주를 마셨다고도 하고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고려 제29대 충목왕(忠穆王, 1337~1348)

 

■ 충목왕(忠穆王)

 

고려 재29대 왕(재위 1344~1348), 휘(諱)는 흔(昕). 충혜왕(忠惠王)과 덕녕공주(德寧公主)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었다. 1344년(충혜왕 5) 충혜왕이 죽자, 고용보(高龍普)가 왕을 옹위하고 원나라 순종을 알현하였을 때 순종이 「그대는 아버지를 배우겠는가, 아니면 어머니를 배우겠는가?」라는 물음에 “어머니를 배우고 싶다.”라고 대답하자 순종은 왕의 천성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찬탄하고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으니, 이때 나이 8세였다.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어머니인 덕령공주가 대신 정사를 맡아보며 전조(前朝)의 폐정을 시정하였다.

권세가들에게 빼앗겼던 땅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녹과전(祿科田)의 폐단을 시정하였다.

 

기근이 들었을 때 진제도감(賑濟都監)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였다. 또한, 충선왕의 명으로 민지(閔漬)가 찬진(撰進)한 《편년강목》을 증수시키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등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그는 재위동안 많은 선정을 남겼으나 재위 4년 만에 12세로 후사(後嗣) 없이 세상을 떠났다 능은 명릉(明陵)이다.

 

 

↑고려 제30대 충정왕(忠定王, 1337~1352)

 

■ 충정왕(忠定王)

 

고려 제30대 충정왕(忠定王 : 재위 1348~1351), 휘(諱)는 저(抵), 시호는 충정(忠定), 충혜왕의 서자(庶子). 어머니는 찬성(贊成) 윤계종(尹繼宗)의 딸 희비(禧妃)리다. 1384년(충목왕4)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책봉되었고 같은 해에 충목왕(忠穆王)이 후사(後嗣)없이 죽자 1349년 원나라로 부터 왕으로 책봉되어 7월에 즉위 하였다.

 

외측 윤시우(尹時遇)와 충목왕의 모후(母后)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충신(忠臣) 배전(裵佺)등이 세도를 부려 기강이 문란해지고 밖으로 침입이 잦아 구정이 순탄치 못했다. 이때 충정왕과 함께 충목왕의 후계자로 물망에 올랐던 충혜왕의 모제(母第)인 강릉대군 에게 인망(人望)이 돌아가자  기(祺)는 원(元)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결혼하고 세력을 얻게 되어 1351년 윤택(尹澤) 이승로(李承老)등이 충정왕은 나이가 어려 국정을 감당 할 수 없으니 폐위 시켜 달라고 원나라에 요청하자 재위 3년 만에 폐위되었다.

 

그 후 공민왕이 즉위하자 그는 강화도로 추방되었다가 다음해  자객에 의해 독살(毒殺)되었다. 능은 총릉(聰陵)이다.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 1330~1374)

 

■ 공민왕(恭愍王)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 : 재위 1351~1374)의 이름은 전(顚),  몽골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백안첩목아)이고, 초명은 기(祺), 호는 이재(怡齋), 익당(益堂) 충숙왕의 차남으로,  비(妃)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충목왕이 즉위 할 때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지고 1341년(충혜왕 복위2 :12세) 숙위(宿衛)하기 위하여 원(元)나라에 가서 노국대장 공주와 결혼한 뒤,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 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가 퇴 쇄해 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52년(공민왕 1: 23세)변발(辨髮). 호복(胡服)등의 몽고풍(蒙古風)을 폐지했으며 1356년(27세)에는 몽고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로 복귀하는 한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쳐서 폐지하는 등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 했다.

 

1365년(36세)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그녀를 추모하여 불사(佛事)에만 전심하면서 정치를 신돈에게 맡겨 정치가 문란해 졌으며, 자제위(子第衛)를 설치하여 풍기도 문란 해졌다. 특히 홍윤(洪倫)이 익비(益妃)를 범하여 임신 시키자 이를 은폐할 의도로 홍윤. 최만생(崔萬生)등을 죽이려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고려 제32대 우왕(禑王, 1364~1389)

 

■ 우왕(禑王)

 

고려 제32대 우왕(禑王 : 재위 1375~1388), 아명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辛旽)의 시녀 반야(般若)의 소생.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미행(微行)하여 낳은 아들이라 하며 1371년 (공민왕 20)에 신돈이 처형된 다음 궁중에 들어가 1373년에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때를 같이 해서 명덕태후(明德太后)의 명으로 궁인(宮人)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발표하였으며,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의 후원으로 10세에 즉위 하였다.

 

처음에는 경연(經筵)을 열어 학문을 닦기에 힘썼고  명덕태후의 훈계를 받아 몸가짐을 바 로 하여 기대를 모았으나 명덕태후가 죽은 다음에는 사냥. 음주가무. 엽색 등 방탕에 빠져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다.

 

여기에다 국왕을 믿고 권력을 휘두르던 이인임이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등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유배됨으로서 우왕은 정치적 지지 기반을 잃고 1388년(우왕 14) 6월에 왕족의 혈통이 아니고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성계의 주장에 따라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에 유배 되었다가 강릉(江陵)으로 옮겨져 1389년 12월 그의 아들 창왕(昌王)과 함께 이성계에 의해 살해되었다.

 

 

↑ 고려 제33대 창왕(昌王, 1380~1389 )

 

■ 창 왕(昌王)

 

고려 제33대 창왕(昌王 : 재위 1388~1389)의 이름은 창(昌)으로, 우왕(禑王)과 시중(侍中) 이임(李林)의 딸 근비(謹妃) 사이에서 태어났다., 1388년(우왕 14) 우왕이 왕씨(王氏)의 혈통이 아니고 신돈(辛旽)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성계(李成桂) 등에게 폐위당하고 정도전(鄭道傳)등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들을 왕 씨 중에서 왕을 추대하기를 주장 하였으나 이색(李穡), 조민수(曺敏修)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우왕의 뒤를 이어 즉위 하였다.

 

그러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이성계 일파는 조민수등을 축출하고 권문세가(權門世家)인 구세력을 배제하여 군사 정치상 최고 권력을 장악하게 돠자, 재위 1년 만에 왕을 폐(廢)하여 강화(江華)에 유배하였다가 그곳에서 유순에게 살해 되었다.

 

 

 ↑고려 제34대 공양왕(恭讓王, 1345~1394)

 

■ 공양왕(恭讓王)

고려 34대 공양왕(恭讓王 : 제위 1389~1392)은,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이름은 요(瑤), 고려 제20대 국왕인 신종(神宗)의 둘째 아들 양양공의 6대손이며 정원부원군 왕균과 충렬왕의 서 장자 강양공 자(滋)의 손녀 국대비 왕씨(國大妃 王氏)의 차남이다.

 

비는 교하(交河) 사람인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노진의 여식인 근비 노 씨이다.

어려서 정창군(定昌君)에 봉해졌고, 그의 형 정양군 왕우의 딸이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아들 방번과 결혼하여 사돈인 관계로 이성계 일파의 추대를 받아 폐가입진(廢假入眞)이라는 명분으로 왕위 계승자로 천거되었다.

 

친명(親明)의 이성계와 그 일당이 1389(창왕 1년)년에 창왕을 폐위시킨 직후에 그를 옹립하였다. 정몽주(鄭夢周) 등의 고려의 충신들은 국왕을 보필하며 고려를 재건하려는 필사의 노력을 하였으나, 이성계의 5남인 태종 이방원(李芳遠)에게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육당하자, 고려의 신료들의 응집력이 약화되어 조정은 와해되었다.

 

 그리고 1392년(공양왕 4년) 이성계와 이방원, 정도전(鄭道傳) 등은 공양왕을 폐하고 황위를 찬탈하여, 고려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그리고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봉(降封)되었으며, 7월 11일에 폐위된 공양왕은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8월에 공양군으로 강등돼 강원도 간성으로 쫓겨났다.

 

그 후 공양왕은 1394년(태조 3년) 3월 14일에 삼척 궁촌리로 유배지가 옮겨진다. 4월 17일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고돌산의 살해재에서 왕태자 석(奭), 우(瑀)와 함께 교살되었다. 공양왕의 능은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와 고양시 원당동 두 곳에 있다. 삼척 묘는 처음 묻힌 곳이고, 고양에 위치한 묘는 조선 왕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 올린 뒤에 묻은 곳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왕비인 순비 노씨(順妃 盧氏)와 합장되어 있으며 조선 태조의 재위 3년 만인 1394년에 고릉(高陵)의 능호가 붙여졌다. 1416년에 조선 태종은 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을 하고, 사신을 보내 그의 능에 제사를 지내었다.

 

자료출처 : 대한민국5000년사 역대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