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비 윤씨 「권력남용」 벽서 나붙자 권력이양 결심.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54호| 20100220 입력
한 체제가 아무리 부도덕하고 부패했더라도 당위성만으로 그 체제를 극복할 수는 없다.
그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이념과 그 이념을 실천할 세력이 존재해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세조 때 비대해진 공신집단을 대체하려면 왕권만으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왕권을 보좌하며 공신집단과 맞서 싸울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재야에서 그런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절반의 성공 성종
③승정원 벽서 사건
▲성종 어진 열두 살에 왕위에 오른 성종은 공신집단보다 왕권이
미약한 현정하고 학문을 연마하며 때를 기다렸다. <우승우 화백>
성종 즉위 초는 공신들의 천국이었다. 성종 1년(1470) 1월 11일 한명회와 신숙주는 분경(奔競: 엽관운동) 금지령을 철폐해 달라고 요구했다. “분경 금령(禁令)이 너무 엄해서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사람과도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태평시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라는 주장이었다.
성종은 “세조조의 고사(故事)에 의거하게 하라”고 전교했다. 세조는 재위 14년(1468) 3월 “금후로 재상가에는 종적을 비밀히 속이는 자 외에는 금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면서 사실상 재상가의 분경을 허용했다.
예종은 즉위 직후 분경을 엄금해 공신들의 반발을 샀는데 ‘세조조의 고사에 의거한다’는 것은 분경을 허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원상들에게 관직 매매를 허용하는 것이어서 사헌부는 “원상의 권세가 무거운데, 그 집에 분경을 금지시키지 않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니 이를 금지시키소서”라고 주청했다.
성종은 사헌부의 청을 좇는 형식으로 다시 원상가의 분경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래갈 수 없었다. 성종은 재위 2년(1471) 12월 사헌부에 전교를 내려 “이조·병조의 당상관과 여러 장수 외에는 분경을 금하지 말고, 이조·병조 겸판서(兼判書)의 집도 금하지 말라”고 명했다.
이조·병조의 당상관과 여러 장수만 분경 금지 대상이지 원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조·병조 겸판서를 분경 금지 대상에서 제외한 것도 원상들을 위한 것이었다. 세조 때 활성화된 겸판서는 공신들에게 행정권까지 주기 위한 것으로서 원상들이 겸판서를 맡으면 실제 판서는 허수아비가 되게 마련이었다.
예종은 즉위 다음 달 좌찬성 겸 병조 겸판서 김국광(金國光)의 겸판서 지위를 해임했다. 그러나 예종이 의문사하자마자 대왕대비는 성종 즉위년(1469) 12월 1일 전교를 내려 겸판서 재설치를 지시했다.
“세조조(世祖朝)에 특별히 겸판서를 설치했으나 대행왕(大行王: 예종)이 자신이 모두 장악하기 위해 없애 버렸다.
지금 사왕(嗣王)의 나이가 어리니 겸판서를 없앨 수가 없다. 한명회를 병조 겸판서로, 한계미를 이조 겸판서로 삼으라.(『성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
성종 1년 이조 겸판서는 원상 조석문으로 대치되고 구치관이 호조 겸판서, 신숙주가 예조 겸판서가 되어 주요 부서의 행정권을 원상들이 모두 장악했다. 나라는 겸판서까지 장악한 원상들의 것이었다. 성종 5년(1474) 1월 사헌부에서 ‘원상의 권력이 막강한데도 분경을 금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원상의 집에도 분경을 금하여 사알(私謁: 사적으로 만남)의 길을 막으소서”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성종은 “원상은 정사에 관여하지 않으니 그것을 말하지 말라”는 궁색한 논리로 거부했다.
대비 윤씨와 원상들의 연합권력에 맞서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무력화된 왕권은 한명회의 차지였다.
성종 5년(1474) 윤6월 대사헌 정괄(鄭括)은 병조판서가 이조판서의 권한인 ‘여러 도의 연변(沿邊) 수령직도 제수한다’며 병조 겸판서 한명회가 이조판서의 업무까지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이때 성종의 나이 만 17세의 성인으로 친정할 때가 지난 지 오래였다. 대비와 원상 연합권력은 성종에게 정권을 넘길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 문제를 제기할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생각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성종 6년(1475) 11월 18일 승정원에 익명서(匿名書)가 붙은 것이다.
승정원에선 익명서 가운데 ‘강자평(姜子平)이 진주 목사가 된 것은 대왕대비의 특명이다’라는 내용과 ‘윤사흔(尹士昕)·윤계겸(尹繼謙)·이철견(李鐵堅) 등 여러 대신들에 대한 악한 말이 쓰여 있었다’고 보고했다.
승정원은 “익명서는 국사(國事)에 관계되는 일이어도 부자 사이에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불태워버렸습니다”라고 보고했다.성종도 “보아서 쓸데없는 것은 불태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칭찬했다. 윤사흔·윤계겸은 대비 윤씨의 동생 부자이고, 이철견의 모친은 대비의 동생이란 점에서 익명서는 대비를 겨냥한 것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익명서는 비록 국사에 관계된다 해도 옮겨 말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리고 『대명률(大明律)』에는 ‘익명서를 발견한 자는 즉시 소각하라’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익명서를 불태운 승정원의 처리는 적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익명서의 내용은 입에서 입으로 널리 전해졌다.
익명서에 거론된 우의정 윤사흔, 대사헌 윤계겸, 월성군(月城君) 이철견 등은 조정에 나와, “익명서는 비록 국문할 수 없는 법이지만 만약 현상(懸賞)하여 체포하려 하면 혹 고발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라면서 현상금을 내걸고 체포하자고 주장했다.
성종은 불문에 부치려 했으나 이들이 계속 범인 색출을 주장하자 성종은 할 수 없이 형조에 전지를 내려 ‘익명서의 범인을 고발하는 자는 천인이면 양인(良人)으로, 양인이면 실직(實職: 실제 벼슬)에 임명하고 면포(綿布) 400필과 범인의 재산을 주겠다’는 전지를 내렸다.
그러자 친군위(親軍衛) 권즙(權緝)이 최개지(崔蓋地)가 의심스럽다고 고발했다. 최개지가 노비 소유권을 두고 소송을 했는데 대비 윤씨 집안이 개입해서 졌다고 말했다는 혐의였다. 윤사흔은 최개지를 국문하자고 주장했으나 성종은 ‘익명서를 불살랐기 때문에 (글씨체를) 고증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익명서의 내용에 동조하는 듯한 행위였다. 익명서로 직접적인 비난을 받은 대비 윤씨는 성종 7년(1476) 1월 13일 내시 안중경(安仲敬)을 시켜 한글(諺文) 편지를 원상에게 전했다. 대비는 “내가 본래 지식이 없는데도 여러 대신들이 굳게 청하고 주상께서 어리시기 때문에 마지못해 정사를 청단했는데, 지금 주상이 장성하고 학문도 성취되어 모든 정무를 재결하는 것이 합당하게 되었다”면서 성종에게 정사를 넘기겠다고 말했다.
대비는 익명서에 대해서 변명했다.
“지금 익명서의 말은 모두 내 몸을 지칭했는데 최개지에 대한 말을 듣고는 마음이 실로 편안하지 못하다...부모가 일찍 돌아가셨으므로 내가 끊임없이 형제들을 보고 싶어 했지만 서로 만날 때는 옛날 친정에 있을 때 희롱한 일을 말한데 불과하니 비록 사적인 청이 있더라도 내가 어찌 감히 주상에게 알리겠는가?(『성종실록』 7년 1월 13일)”
이외에도 대비는 여러 말로 자신을 변명했지만 성인이 된 성종에게 정사를 넘기지 않은 자체가 불러온 비방이었다.
다급해진 것은 원상들이었다. 원상 한명회와 김국광은 대비가 물러나는 데 반대하며 “동방의 종묘·사직과 억만 창생(蒼生: 백성)이 어찌되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
성종도 기다렸다는 듯이 받을 수는 없었기에 승지 등을 불러 정권을 받을 수 없다고 아뢰게 했다. 한명회는 여러 차례 ‘친정 불가’를 주청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상천외한 논리까지 등장했다.
“만약 지금 정사를 사양하신다면 이는 동방의 창생(蒼生)을 버리는 것입니다. 또 신 등이 항상 대궐에 나와서 안심하고 술을 마시는데,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는 안심하고 술을 마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성종실록』 7년 1월 13일)”
권력이 극도에 달하다 보니 군신 사이의 분별마저 사라진 것이었다. 성종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일 의정부에 전지를 내려 자신이 여러 번 사양했음을 상기시킨 후 정권을 받겠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온 나라의 번거로운 사무로 성체(聖體: 대비의 몸)를 수고스럽게 하는 것도 편안히 봉양하는 도리는 아니므로 부득이 지금부터 국가의 모든 정사는 내 뜻으로 결단하고 대왕대비에게 아뢰어 처결(處決)하지 않을 것이다.(『성종실록』 7년 1월 13일)”
성종의 결단에 다들 놀랐다. 대비가 물러나겠다고 한 그날 정권을 받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성종 친정 시대의 개막이었다. 다음 날부터 한명회에 대한 대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성종의 친정을 반대한 행위를 국문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종은 국문 요청을 거부하고 한명회에게 음식을 내렸다.
한명회는 무사했지만 이제 권력은 자신의 손을 떠나 성종에게로 돌아가고 있음을 절감해야 했다.
미래를 기약한 성종의 ‘기다림의 정치’가 결실을 거두는 것이었다. 성종은 서두르지 않았다.
재위 7년째지만 그의 나이 겨우 만 19세였다. 공신들은 속속 관(棺)으로 들어갔다.
성종 원년에 구치관이 사망한 것을 필두로 성종 5년에는 최항·한백륜·성봉조가, 성종 6년에는 권신 신숙주와 홍윤성이 떠났다. 친정 이듬해인 재위 8년(1477)에는 조석문이, 이듬해에는 정인지가 사망했다.
한명회와 정창손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신들이 죽은 것이다.
그 공백을 성종은 자신의 왕권과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메우려 했다. 바로 신진 사림이었다.
[출처]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절반의 성공 성종③ 승정원 벽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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