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소한 군주의 눈물도 ‘양반’을 누르진 못했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45호] 20091219 입력
군주가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궁극적 길은 스스로 가난한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군주는 백성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잘못된 제도를 혁파하는 제도개혁에 앞장서는 것으로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다. 영조는 절검생활을 앞장서 실천하는 유학 군주였으나 백성들은 물론 시대도 그런 개인적 실천보다는 잘못된 제도의 개혁을 요구했다.
↑박문수 초상
흔히 뛰어난 암행어사로 알려진 박문수는 경주이씨 구천공 이세필(龜川公 李世弼)의 외손으로 이인좌의 봉기 토벌에 가담한 소론 온건파로서 고른 인재 등용과 군역제도 개혁에 앞장섰던 개혁정치가였다.
↑순무영진도
조선후기 군사들의 군진 모습을 그린 것이다. 조선은 양반 사대부는 군역의무가 없고 가난한 양인들만 군역의무가
있는 모순된 군역제도를 갖고 있었다.
선왕독살설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영조는 훨씬 성공한 군주가 될 자질이 있었다. 그는 절검을 솔선하는 애민군주였다. 재위 20년(1744) 5월 영조가 병이 들어 약원(藥院)의 진찰을 받을 때 신하들은 영조의 침실을 엿볼 수 있었다.
“이때 임금은 목면으로 만든 침의(寢衣:잠옷)를 입었으며…이불 하나 요 하나도 모두 명주로 만든 것이었으며 병장(屛障:병풍)도 진설하지 않았다. 또 기완(器玩)도 없어서…여항(閭巷:민간)의 호귀(豪貴)한 집에 견주어도 도리어 그만 못했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 나와 검소한 덕에 대해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영조실록』20년 5월 2일)”
영조의 침실이 민간의 부잣집만도 못했다는 이야기다.
‘영조행장’에도 “중의(中衣)·철릭(貼裏=군복) 따위는 이따금 빨고 기워 입고 겨울에 매우 춥더라도 갖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영조는 절검을 솔선함으로써 사대부들의 사치를 금지시키려 했다. 흉년과 전염병이 만연해 백성들이 죽어가는 가운데에서도 사대부들의 사치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재위 8~9년 가뭄과 전염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영조는 “필서(匹庶:서인)의 사치는 곧 조사(朝士:벼슬아치)를 본받은 것이고, 조사의 사치는 곧 귀척(貴戚:왕실의 외척)을 본받은 것이며, 귀척의 사치는 왕공(王公)에 근본을 두고 있다(『영조실록』 9년 12월 22일)”면서 왕실의 고급 비단 직조를 금지시켰다.
영조는 재위 32년(1756) 1월 사대부가(家) 부녀자들의 가체(加髢=어여머리)를 금지시키고 족두리(簇頭里)로 대신하도록 명했다. 『영조실록』은 이때 사대부가 부인들이 ‘서로 높고 큰 가체를 자랑하고 숭상했다’면서 “한번 가체를 하는 데 몇 백 금(金)을 썼다”고 전하고 있다.
영조는 금주령도 자주 내렸는데, 심지어 “갑자기 좋은 계책이 생각났으니 바로 예주(醴酒:식혜)인데, 아! 예주가 어찌 현주(玄酒:제사 때 술 대신 쓰는 맑은 찬물)보다 낫지 않겠는가? (『영조실록』 31년 9월 7일)”라면서 제사 때도 술 대신 식혜를 쓰라고 명했다. 영조부터 금주했음은 물론이다.
영조는 절검생활을 하는 것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한다고 여겼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도개혁이었다.
모순된 제도를 방치한 채 군주의 절검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때 백성들을 괴롭히는 가장 큰 문제는 군역(軍役:병역)의 폐단이었다. 그 핵심은 양반들이 군역에서 면제된 데 있었다. 개국 초에는 양반 사대부들도 군역의 의무가 있었으나 차차 사라지더니 중종 36년(1541)에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가 실시되면서 합법적으로 면제된 것이다.
양인(良人)들은 16세부터 60세까지 1년에 포 2필을 납부하는 것으로 군역 의무를 대신했는데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피지배층인 백성들은 군역의 의무가 있는 반면 지배층인 양반들은 면제된 것이다.
이후 군포를 내면 상놈으로 천대받고, 내지 않으면 양반으로 우대받는 가치관의 전도 현상이 발생했다.
성공한 농민 일부가 곡식을 헌납하고 공명첩(空名帖=이름을 적지 않은 관직 임명장)을 사들인 이유도 양반 신분을 획득하면 군역에서 면제되기 때문이었다.
재력 있는 양인들이 공명첩을 매입해 군역에서 면제되면서 군역은 돈 없고 힘없는 상놈들만의 의무로 전락했다.
여기에 양란 이후 군사 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이 문제를 악화시켰다. 임진왜란 때 훈련도감을 창설한 이래 이괄의 난을 계기로 어영청이, 경기 일대의 방위를 위해 총융청이, 정묘호란 뒤에는 남한산성에 수어청이, 17세기 말에는 수도 방위를 위해 금위영이 설치됨으로써 군영이 5개로 늘어났다.
군포(軍布)를 납부할 백성 수는 줄어드는데 국방비 수요는 늘어난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숙종 때 군사 숫자를 줄이자는 개혁안이 잠시 등장했다가 국왕 경호가 소홀해질 수도 있다는 반대론에 쑥 들어갔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그냥 방치할 수 없었기에 군역개혁론인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이 등장했다. 사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했다. 양반 사대부들도 군포를 내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반 사대부들이 격렬하게 반발했기 때문에 여러 방안이 속출했다.
양역변통론은 크게 유포론(遊布論), 호포론(戶布論), 구전론(口錢論), 결포론(結布論)의 네 가지가 있었다.
유포론은 군역 기피자를 색출해 군역 의무를 지우자는 것이고, 호포론은 수포(收布)의 기준을 인정(人丁: 사람)에서 호(戶)로 삼아 모든 가호(家戶)에 군포를 받자는 것이었고, 구전론은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받자는 것이었다.
결포론은 인정(人丁) 대신 전결(田結:토지면적)에 군포를 부과하자는 것으로서 대동법과 비슷한 발상이었다. 이 중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양반 집안도 군포를 내게 하자는 호포론과 양반 사대부 개개인을 징병 대상으로 삼아 돈을 받자는 구전론이었다.
이에 대해 사대부들은 중국 고대 위진 남북조 시대 송나라 왕구(王球)가 말한 “사대부와 서민의 구별은 국가의 헌법(士庶之別 國之章也)” 이라는 사대부 특권 의식에서 나온 숭유양사론(崇儒養士論)으로 반대했다. 군역 의무는 상놈만의 것이란 논리였다.
조정에서 가난한 백성들을 대변할 정치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양반 대다수가 반대하자 군제개혁론은 좌초 위기에 놓였다. 영조는 개인적인 절검을 실천할 의지는 있었지만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어가면서까지 군제개혁을 강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영조 26년(1750) 호조판서 박문수(朴文秀)가 호전론(戶錢論)을 제기하면서 다시 양역변통 논쟁에 불이 붙었다.
호전론은 호포론처럼 호를 단위로 돈을 받자는 방안이었다. 영조는 재위 26년 5월 홍화문(弘化門)에 나가 직접 백성들을 만나 군역에 관한 여론을 들었다.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은 영조는 “(백성들이) 부르짖고 원망하여 도탄 속에 있어도 구해내지 못하니,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 돌아가서 선조(先祖)의 영령을 대하겠는가?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멘다.(『영조실록』 26년 5월 19일)”라고 눈물을 흘렸지만 양반들은 영조의 눈물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영조가 타협안으로 마련한 것이 균역법(均役法)이었다. 균역법은 왕실과 양반 전주(田主:지주)가 조금씩 양보해 백성들의 군포 부담을 줄이자는 방안이었다. 백성들의 부담을 연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대신 줄어든 수입은 어염선세(漁鹽船稅)와 결작미(結作米), 은여결세(隱餘結稅),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등으로 보충하자는 방안이었다.
어염선세는 왕실에 속해 있던 수입을 정부 재정으로 돌린 것으로 왕실이 양보한 것이고, 결작미는 전결(田結) 1결당 쌀 2두(혹은 돈 2錢)를 부과 징수하는 것으로 양반 전주들이 조금 양보한 것이었다. 은여결세는 전국의 탈세전을 적발해 부과하자는 것이었고, 선무군관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군역에서 벗어난 양민들을 색출해 선무군관으로 편성한 것으로서 전국에서 2만4500여 명이 새로 편입되었다.
균역법은 군역개혁의 목표였던 양반계급의 과세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지배층의 부분적 양보를 명분 삼아 문제의 본질을 덮어버린 반쪽짜리 개혁안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균역법이 한계를 드러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양반 전주들은 결작미 부담을 전호(佃戶=소작농민)에게로 떠넘겼고, 농민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다. 균역법 시행 2년이 채 안 된 영조 28년(1752) 병조판서 홍계희(洪啓禧)가 대리청정하는 사도세자에게 올린 보고서는 반쪽짜리 개혁안이 휴지가 된 사실을 잘 보여준다. 홍계희는 가장 가난한 백성들만 군포 납부 의무를 진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세업(世業)도 없고 전토(田土)도 없어 모두 남의 전토를 경작하고 있기 때문에 1년에 수확하는 것이 대부분 10석을 넘지 못하는데, 그 가운데 반을 전토의 주인에게 주고 나면 남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비록 날마다 매질을 가하더라도 바칠 수 있는 계책이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지 않으면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영조실록』 28년 1월 13일)”
홍계희는 이 때문에 ‘죄수들이 감옥에 가득하게 되고 원통하여 울부짖는 것이 갈수록 심해졌다’고 보고하고 있다. 영조가 진정한 애민군주가 되려면 절검이라는 개인적 수신(修身)보다는 양반 과세(課稅)를 통한 신분제의 해체라는 제도개혁으로 나가야 했다. 그것이 시대적 요구였다.
그러나 경종독살설에 발목 잡힌 영조는 양반 사대부의 특권을 철폐할 권력도 의지도 없었다.
양반 사대부의 특권 속에 백성들은 계속 군역의 폐단에 시달렸다.
[출처]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검소한 군주의 눈물도 ‘양반’을 누르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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