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경종의 충신’ 김일경은 뻣뻣했다.
이덕일 [제142호] 20091129 입력
절반의 성공 영조
①소론 강경파 숙청
격렬한 투쟁 끝에 정권을 장악하면 반대 당파의 재기를 막기 위한 정치 보복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정치 보복은 권력 강화가 아니라 권력 약화의 길이었다.
진정한 권력 강화는 반대 당파의 탄압이 아니라 반대 당파를 인정하면서 이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타협과 화해를 통해 권력 강화의 길을 선택한 정치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재위 4년(1724) 8월 25일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세상을 떠났다.
↑연잉군의 세제 시절 초상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로 세제가 되고 왕위에 올랐지만 소론 강경파는 경종 독살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
를 거두지 않았다. 사진가 권태균
닷새 후인 8월 30일 장희빈의 연적(戀敵)이자 정적(政敵)이었던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이 인정문(仁政門)에서 삼십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 앞길이 순탄할 수는 없었다.
'영조실록'에 “성상께서 대위(大位: 왕위)에 광림(光臨)하시자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떼를 지어 저주하고 과장하며 그릇된 이야기를 선동해서 사방을 미혹하게 했다(1년 1월 17일)”고 전하는 것처럼 ‘경종 독살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과제는 경종 독살설을 믿는 소론 강경파(埈少)와 남인들, 그리고 백성들의 의구심을 불식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반대 당파와의 대타협에 의한 화해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대타협을 할 생각이 없었고, 노론도 마찬가지였다.
영조 즉위년 11월 6일 유학(幼學) 이의연(李義淵)이 “신축년(경종 1년) 이후의 일은 모두 선대왕(先大王: 경종)의 뜻이 아니었다”면서 “교목세가(喬木世家: 명가)를 주륙한 무리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경종 1년(1721) 김일경의 신축소로 소론이 정권을 잡은 신축환국 이후의 일들은 모두 소론 강경파가 주도했다는 주장이었다. 소론 계열의 사헌부·사간원이 이의연의 국문을 요청했으나 영조는 거부했다.
그러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와 좌의정 유봉휘(柳鳳輝)가 이의연의 처벌을 주장하며 사퇴하고, 우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청대해 “이의연의 상소는 선왕을 무욕(誣辱)한것”이라고 주장해 영조도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이의연은 당(黨)을 위해 죽기로 달게 마음을 먹은 무리”라면서 절도(絶島) 유배를 명했다. 그러나 영조의 속마음은 이의연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11월 9일에는 동학 훈도(東學訓導) 이봉명(李鳳鳴)이 소론 강경파의 영수 김일경을 역적이라고 공격했다.
영조는 “지금 이후로는 당론(黨論)과 관계되는 것들은 응지상소(應旨上疏: 임금의 구언에 응하는 상소)라도 봉입하지 말라”고 이봉명을 꾸짖었다. 그러면서 김일경도 삭출(削黜)시켰다. 영조의 속뜻이 다시 드러난 셈이었다.
소론은 강경파(埈少)와 온건파(緩少)로 갈라졌다. 영조와 공존을 추구했던 소론 온건파(緩少)는 김일경 같은 소론 강경파(埈少)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했다.
영조실록의 “영의정 이광좌가 청대하여 김일경과 서로 친밀하지 않았던 일을 스스로 진달했다(즉위년 11월 19일)”는 기록은 강경파를 희생양 삼아 살아남으려는 온건파의 전략을 말해준다.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소론 강경파는 같은 당내에서도 고립되었으나 공세의 칼날에 굴하는 대신 죽음을 각오했다.
↑소령원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가 묻혀 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이 묘는
지관 목호룡이 잡아주었다. 그러나 목호룡은 영조 즉위 후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사진가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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