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국왕 장례 예법 둘러싼 사대부 싸움, 王權만 추락하다.

야촌(1) 2010. 9. 15. 17:14

■국왕 장례 예법 둘러싼 사대부 싸움, 王權만 추락하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18호 | 20090613 입력]

 

집권 서인들은 겉으로는 효종을 국왕으로 여겼으나 속으로는 차자(次子)로 낮춰 보았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정당이 집권하면 불필요한 정쟁이 빈발한다.

 

겉과 속이 다르니 논리의 모순이 생기고 반대편이 이를 지적하면 정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송 논쟁은 일인(日人)들의 주장처럼 무의미한 당쟁이 아니라 효종의 종통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기에 치열했던 것이다.

 

 

전남 해남군 해남읍에 있는 윤선도 사당. 윤선도는 효종의 사부였으나 격정적 성격 때문에 자주 논란에 휩싸

였다예송 논쟁 때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끝내 함경도 삼수로 귀양가게 된다.   

<사진가권태균>

 

국란을 겪은 임금들 현종

②예송 논쟁의 칼날

 

왕조국가에서 왕위를 계승한 국왕에게 장자니 차자니 따지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집권 서인은 송시열·송준길의 예론에 따라 효종을 차자로 여겨 1년복으로 의정했으나 겉으로는 국제(國制:경국대전)에 따른 것처럼 위장했다.

 

 

▲강원도 삼척시 정상동에 있는허목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삼척부사 시절 동해를 예찬하는 동해송(東海頌)

    을 짓고, 전서체(篆書體)로 이 비를 세워 바다를 달래자 범람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남인 윤휴가 “무릇 제왕가의 사체는 사가(私家)와 아주 다르므로 대비가 대행대왕(효종)에 대해 참최복(3년복)을 입는 것이 옳다(『현종개수실록』 즉위년 5월 5일)”고 반발한 것처럼 이 문제는 윤휴처럼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느냐, 송시열처럼 왕가 역시 사대부가(家)와 같다고 보느냐의 문제였다.

복제뿐만 아니라 효종의 장지(葬地)도 문제였다.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총호사(摠護使)인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장지를 간심(看審)하러 가면서 효종 말년에 파직된 윤선도(尹善道)를 대동하게 해 달라고 요청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윤선도는 풍수에 밝았다.


『현종실록』은 윤선도가 효종의 대군 시절 스승이었으므로 현종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전하는데 그런 윤선도가 천거한 곳은 수원이었다. 서울 홍제동도 유력 후보였으나 현종은 효종이 생전에 홍제동이 멀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윤선도의 주장대로 수원으로 결정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현종 즉위년조는 ‘당초 수원부에 석물(石物)을 세우는 일까지 진행했다’고 전하는데 송시열이 계속 홍제동을 고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송시열은 수원이 오환(五患)의 염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례편람(四禮便覽)』 상례(喪禮)조는 장지를 가릴 때 피해야 하는 오환(五患)으로 앞으로 도로·성곽·연못이 되거나 세력가에게 빼앗기거나 농지가 될 곳이라고 적고 있다. 그래서 현종은 부왕을 즉위년(1659) 10월 홍제동에 안장했으니 영릉(寧陵)이었다.


그러나 현종 14년(1673) 석물에 빗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으로 천장(遷葬)하는 것처럼 문제 있는 자리였다.

 

 

 

▲송준길의 별당인 동춘당.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에 있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양송(兩宋)으로 불리며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는 송시열과 함께 1년 복설을 지지했다. 자의대비의 복상이 거의 끝나가는 현종 1년(1660) 3월 16일. 사헌부 장령 허목이 상복 문제를 다시 제기하면서 예송 논쟁이 재연되었다.

 

남인 허목은 상소문 서두에서 대비가 당연히 3년복을 입는 줄 알고 있다가 시골로 내려온 후 기년복을 입는 줄 알게 되었다면서 “당초 상사 때 너무 황급한 나머지 예를 의논한 여러 신하가 혹시 자세히 다 살피지 못해 이런 실수가 있었던 것입니까?”라고 추측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는 후한(後漢) 정현(鄭玄)이 지은 『의례주소(儀禮注疏)』의 「상복 참최장(喪服斬衰章)」을 근거로 삼았는데 핵심은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대신 세우고 역시 장자(長子)라 이름한다”는 구절이었다. 이 경우 효종은 장자가 되므로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어야 했다.

 

“소현(昭顯)이 일찍 세상을 뜨고 효종이 인조의 제2장자로서 이미 종묘를 이었으니...대왕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이고 또 임금의 자리에 오르셨으니 당연히 존엄한 정체(正體)인데도 그 복제는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3년을 입을 수 없는 자와 같게 했으니 신은 그 근거를 모르겠습니다.(『현종실록』1년 3월 16일)”

 

허목의 말에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 현종이 대신들에게 다시 의논하게 하자 송준길이 나섰다.

“만약 허목의 말대로라면 가령 사대부의 적처(適妻) 소생이 10여 명인데,

첫째 아들이 죽어 그 아비가 3년복을 입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죽으면 그 아비가 또 3년복을 입고 불행히

셋째가 죽고

넷째·다섯째·여섯째가 차례로 죽을 경우 그 아비가 다 3년을 입어야 하는 데, 아마 예의 뜻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현종실록』1년 3월 20일)”

 

송준길이 자식이 모두 먼저 죽는 극단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논리가 부족했다.

허목은 재차 상소를 올려 송준길이 자신의 뜻을 곡해했다고 주장했다. “신의 말은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立嫡以長)’는 뜻입니다…중요한 것은 할아버지·아버지의 뒤를 이은 ‘정체(正體)’라는 것이지 첫째 아들이기 때문에 참최복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현종실록』1년 4월 10일)”

 

먼저 죽은 아들이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정체이기 때문에 3년복을 입는 것이지 장자냐 차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허목은 “효종은 인조의 체(體)를 계승한 적자이고 종묘를 이어받아 일국의 임금이 되었는데 지금 그의 상에 3년 복제를 쓰지 않고 강등해서 기년(期年)으로 한다면, 체이부정(體而不正: 서자가 후계자가 된 경우)의 복제입니까?

 

정이불체(正而不體:손자가 후계자가 된 경우)의 복제입니까?(『현종실록』1년 4월 10일)”라며 효종을 둘째로 대우하려는 서인들의 아픈 속내를 찔렀다. 『당의통략』이 ‘처음에는 사람들이 윤휴의 설을 더 지지했으나 서인들이 송시열을 높이 받들고 숭상하므로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라고 쓴 것처럼 예론에 따르면 윤휴와 허목이 맞았다.

 

남인들이 작성한 『현종실록』의 사관은 허목의 상소에 대해 ‘그때 군신(群臣)들은 다 허목의 말이 정론이라면서도 시의(時議)에 저촉될까 두려워 한 사람도 변론하는 자가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윤선도가 송시열을 직접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파란을 일으켰다.

 

“성인이 상례(喪禮)에 있어 오복(五服)의 제도를 정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라고 시작하는 윤선도의 상소문은 송시열을 직접 지목하고 있었다. “송시열은...(장자가) 성인이 돼 죽으면 적통이 거기에 있어 차장자가 비록 동모제(同母弟)이나 이미 할아버지와 체(體)가 되었고, 이미 왕위에 올라 종묘를 이어받았더라도 끝까지 적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니 그 말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효종의 장지 선정 싸움에서 패한 윤선도의 언사는 거칠었다. “차장자가 부친과 하늘의 명을 받아 할아버지의 체(體)로서 후사가 된 후에도 적통이 되지 못하고 적통은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한다면, 이는 가짜 세자(假世子)란 말입니까? 섭정 황제(攝皇帝)란 말입니까?(『현종실록』 1년 4월 18일)”

 

서인들이 세운 논리의 모순을 정확히 뚫어본 말이지만 ‘가세자·섭황제’ 운운한 것은 역공을 받을 소지가 충분했다. 먼저 김수항(金壽恒)을 비롯한 승지들이 윤선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자 현종은 “윤선도의 심술이 바르지 못하다”며 관작을 삭탈하고 향리로 쫓아냈다.

 

그러나 서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가형(加刑)을 요구했다.

『당의통략』이 “윤선도의 상소를 보고 남인들이 이를 빌미로 송시열을 죽이고 서인들을 축출하려는 것을 알았다”고 적고 있듯이 이 문제는 이제 예송 논쟁이 아니라 직접적인 권력투쟁이었다.

 

부제학 유계(兪棨)와 사간원은 윤선도에게 반좌율(反坐律)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을 무고하면 해당 형벌을 자신이 받는 게 반좌율인데 사간원에서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했다는 죄를 송시열 등에게 씌우려 했다’고 공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반좌율이 적용되면 사형이었다. 서인들의 치열한 공세로 윤선도가 위기에 빠지자 우윤(右尹) 권시(權<8AF0>)가 옹호하고 나섰다.

 

“항간에서도 송시열·송준길의 잘못에 대해 말하고 싶어도 감히 못하고 뱃속으로는 비방하면서도 입으로는 말을 못하는데, 이것이 태평성대의 기상입니까? 신은 성조(聖朝)를 위하여 걱정하고 그 두 사람을 위해서도 걱정하고 있습니다.(『현종실록』 1년 4월 24일)”

 

권시는 “대왕대비 복제가 당연히 3년이어야 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며 “윤선도가 남을 꾸짖고 참소한 것은 매우 나쁜 짓임에 틀림없으나, 자기 몸에 반드시 화가 닥치리라는 것도 계산하지 않고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했는 데 역시 감히 할 말을 하는 선비입니다.(『현종실록』 1년 4월 24일)”라고 옹호했다.

 

서인들은 일제히 권시를 비난했고, 그는 벼슬을 내놓고 낙향했다.

윤선도는 상소가 불태워지고 극변인 함경도 삼수로 유배됐다.

 

그래도 진사 이혜(李혜) 등 142명이 다시 윤선도를 공격하자 현종은 드디어 예송 자체를 금지시켰다.

기년복제는 국제(國制)에 따른 것이지 차자로 대우한 고례(古禮)를 따른 것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1차 예송은 외견상 송시열과 서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현종은 ‘만일 다시 복제를 갖고 서로 모함하는 자가 있으면 중형을 쓰겠다’며 거론 자체를 금지시켰으나 왕권은 이미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국왕의 복제를 두고 신하들이 싸운다는 것 자체가 왕권의 추락이었다. 게다가 서인들은 효종을 차자로 본 속내를 국제로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포장과 내용물이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15년 후의 2차 예송 논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