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文風에 갇힌 사대부, 武人 군주의 꿈을 꺾다.

야촌(1) 2010. 9. 15. 01:57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4호] 20081227 입력

 

■ 文風에 갇힌 사대부, 武人 군주의 꿈을 꺾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

   ⑤ 崇武정책의 좌절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기 정체성과경제력과군사력이 삼박자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성리학에 몰두하면서 군사를 비천한 것으로 취급했다. 외적의 침략에 대해서도 군사적 응징이 아니라 국왕의 근신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산군과 문신은 군사 문제로 자주 충돌했다. 

연산군이 쫓겨나면서 국방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임진왜란의 전화(戰禍)는 더 커진다.

 

오른쪽 귀 부분을 관통하는 것을 중살이라고 하는데 빈객을 대접하는 데 썼다. 

임금의 사냥은 종묘에 천신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우승우(한국화가)

 

 

▲연산군 범사냥 - 상살이요(46Χ61cm)


상살(上殺)은 짐승을 쏠 때 왼쪽 표(어깨 뒤 넓적다리 앞의 살)를 쏘아 오른쪽 우
(어깻죽지 앞의 살)로 관통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말린 제물로 만들어 종묘에 천신했다. 

 

연산군 일기』와 『중종실록』은 연산군을 사냥광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연산군일기』는 “흥청 등을 거느리고 금표 안에 달려 나가 혹은 사냥하거나 혹은 술 마시며 가무(歌舞)하고 황망(荒亡)하였다”고 비난하고 있고,『중종실록』은 “도성(都城) 사방 100리 이내에 금표(禁標)를 세워 사냥하는 장소를 만들었다…

따로 응사군(鷹師軍) 1만여 명을 설치하여 사냥할 때 항상 따라다니게 하였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런 비난의 본질은 연산군의 숭무(崇武)정책에 대한 반발이었다. 연산군은 군사력 강화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연산군은 재위 2년(1496) 4월 친시(親試)에서 직접 낸 책문(策問)으로 “우리나라는 남쪽으로 섬 오랑캐와 이웃이고 북쪽으로는 야인(野人:여진족)과 접했다”면서 그 대책을 물었다. 조선은 여진족 추장들에게 벼슬을 주고 귀화하면 혼인을 시켜 주는 등의 회유책을 썼지만 이들은 변경에 틈만 보이면 습격했다.


연산군 5년(1499) 4, 5월에는 함경도 삼수군(三水郡)과 평안도 벽동진(碧潼鎭) 등 3개 지역을 습격해 군사와 백성을 살해하고 우마와 백성을 사로잡아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산군은 즉각 대신들과 의논해 정벌을 결정하고 5월 12일 우의정 성준(成俊)과 좌찬성 이극균을 서정장수(西征將帥)로 임명해 2만 병력을 준비시켰다. 

그러자 5월 14일 홍문관 부제학 최진(崔璡) 등이 반대하고 나섰다. 천문(天文:혜성 출현)이 변하는 변괴가 발생한 데다 가뭄 때문에 흉년이 들었으니 정벌에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최진 등은 전가의 보도를 꺼냈다. “하늘의 견고(譴告:경고)가 심한 것이므로 전하께서는 몸을 수행하면서 매일 근신해야 하는데 어찌 백성을 괴롭게 하고 군중을 동원해 멀리 떨어진 산하에서 소추(小醜:여진족)와 더불어 종사해서야 되겠습니까?”라는 것이다.

혜성과 가뭄은 모두 하늘이 임금에게 경고하는 것이므로 근신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연산군은 “서정의 거사는 진실로 농사의 풍흉을 보아야 하지만 죽고 사로잡힌 우리 백성이 너무 많으니 지금 만약 정벌하여 많이 참획(斬獲:목을 베고 사로잡음)하면 저들이 반드시 두려워하여 스스로 침략을 중지할 것이다(『연산군일기』 5년 5월 17일)”고 강행 의사를 밝혔다.

 

연산군은 다시 어서(御書)를 내려 “오직 변방 백성이 피살당하고 사로잡혀 간 것에 분한(忿恨)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지 못하기 때문에 서정에 나서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최진 등은 “서방의 도둑들도 하늘이 전하에게 경계하고 근신하라고 시킨 것이므로 마땅히 두려워하고 근신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도리어 병혁(兵革)의 일을 일으켜 천위(天威)를 모독하십니까(『연산군일기』5년 5월 29일)”라고 반대했다.

 

여진족이 습격한 것은 하늘이 연산군에게 경고한 것이므로 근신해야지 군사를 일으킬 때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습격에 대한 응징은 물론 사로잡혀 간 백성의 귀환 대책은 찾을 수 없었다. 변경에 사는 백성이 감내해야 할 일이라는 투였다.

 

연산군은 “지금 서정은 오직 백성을 사랑(愛民)하기 때문이다”고 재차 호소했으나 대간에서 극심하게 반대하자 대신들도 점차 주저하게 되면서 서정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해 9월 4일 여진족은 다시 평안도 이산(理山)의 산양회진(山羊會鎭)을 공격해 100여 명을 잡아가고, 또 벽동군 아이진(阿耳鎭)을 습격해 갑사(甲士) 김득광(金得光) 등 9인과 말 12필을 약탈해 갔다. 연산군은 통탄했다.

 

“지금 사변을 보니 진실로 근고(近古)에 없던 일이다. 전일 재상들의 의논을 구하자 ‘안으로 덕스러운 덕정(德政)을 닦는 것뿐입니다’고 했는데, 하늘의 재변이라면 하늘의 경계에 근신하면서 덕정을 닦아 없앨 수 있겠지만, 이런 완흉(頑凶)한 무리가 침략을 그치지 않는데 어찌 덕정으로 그치게 할 수 있겠는가?”(『연산군일기』 5년 9월 10일)


연산군은 “저들이 오늘 몇 사람을 잡아가고 내일도 몇 사람을 잡아갈 것이니 어찌 앉아서 구경하며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대신들과 의논한 끝에 내년에 정벌하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면서 그 전에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강무(講武)에 나서기로 했다. 강무는 군사훈련을 겸한 수렵이었다.


그러자 좌참찬 홍귀달(洪貴達)이 “이름을 강무라 하지만 실은 사냥하는 것입니다”면서 “선왕(先王)의 적자(赤子)들이 온통 적에게 살해되고 잡혀갔는데 그 자제들을 구휼(救恤)하지 않고 사냥해서 그 제물로 제사를 드리려 한다면 선왕·선후(先后)께서 어찌 안심하고 이를 흠향하겠습니까?(『연산군일기』 5년 9월 16일)”라고 반대했다.


홍문관 부제학 최진은 외적의 습격도 하늘의 경계라면서 그 대책으로는 “두려워하면서 몸을 닦아야(恐懼修省)할 뿐 강무를 정지하시기 바랍니다”고 말했다. 연산군은 “강무 역시 백성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연산군일기』 5년 9월 26일)”며 강행했다.


연산군은 재위 7년(1501) 10월 “근래 오랫동안 군사 사열(査閱)을 폐했기 때문에 군사들이 해이해질까 두려워 사냥(打圍)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훗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 황제들이 정기적으로 만주 지역으로 가 사냥한 것을 ‘사냥을 준비하며 무예를 연습한다’는 뜻의 ‘비렵습무(備獵習武)’라고 불렀던 것처럼 연산군에게 사냥은 군사훈련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문신들은 강무든 사냥이든 군사를 움직이는 것에 모두 반대하면서 오직 임금의 근신만 요구했다.
재위 6년이 되자 서정 반대가 잇따랐다. 대간뿐 아니라 좌의정 한치형(韓致亨) 같은 대신들과 도원수 성준까지 반대론에 가세했다.

 

연산군은 성준에게 “서정하기로 결정해놓고 토벌하지 않으면 그 기간에 적이 반드시 변경을 침범해 우리 백성을 많이 잡아갈 것이니 어찌해야 하겠는가?”라고 따졌다. 성준은 다시 명년까지 기다려 정벌하자며 연기론을 제시했는데, 말이 연기지 사실은 포기였다.


서정을 하지 않으려면 방어 태세라도 잘 갖추어야 했다. 연산군 7년(1501) 5월 평안도 절도사 김윤제(金允濟)가 “금년 도내가 약간 풍작이 들었으니, 청컨대 먼저 이산에 장성을 쌓아 오랑캐의 침략을 막아야 합니다”고 치계(馳啓)했다. 산양회진 등이 있어 여진족의 침범이 잦은 이산에 장성을 쌓자는 말이었다.


이때 장성 축성에 찬성하면서 좌의정 성준이 한 말은 대간들이 왜 축성에도 반대하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 조정 신하들은 남쪽 사람이 많은데, 인부를 뽑아 부역을 시키면 그 폐단을 받을 것을 꺼려 극력 저지하는 것입니다.”(『연산군일기』 7년 5월 25일)


성준의 말에 홍문관에서는 “성준이 ‘조정에는 남도 사람이 많아서 자기 집의 종이 부역에 나가는 것을 어렵게 생각해 정지할 것을 청한다’고 한 것은 이른바 ‘한마디 말로써 나라를 망치는 자’입니다”고 반박했다. 성준이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고 피혐하자 연산군은 사직하지 말라고 말리면서 오히려 홍문관원을 국문했다.

 

그 전에도 축성 이야기가 나오면 대간에서는 무조건 반대했는데 연산군은 “성을 쌓지 않았다가 후에 만약 일이 생기면 너희가 그 과실에 책임을 져야 한다(『연산군일기』5년 7월 12일)”고 꾸짖기도 했다. 연산군은 군사를 백안시하는 이런 문풍(文風)을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큰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중종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문신들은 병역의 의무 대신 군포(軍布)를 받는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를 실시해 조선의 국방력을 무력화했다. 임진왜란의 비극은 이때 예고된 것이었다.

 

연산군이 “만약 무사(武事)를 미리 연습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뜻하지 않은 변란이 발생하면 붓을 쥐고 대응하겠는가?(『연산군일기』7년 10월 2일)”라고 말한 것이 90여 년 후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