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7호] 20090118 입력
■ 서른세살 ‘준비된 임금’ 두살 적자와 후계를 겨루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광해군
②적자(嫡子)옹립 세력들
광해군의 왕위 즉위 길은 험난했다.
안으로는 적자 계승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선조와 권력의 독점을 원하는 소북(小北)이 흔들었다.
밖으로는 원군(援軍) 파견을 계기로 그간의 형식적 조공관계를 실질적 지배관계로 전환시키려는 명나라가 흔들었다. 광해군은 피를 토하며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그것은 새로운 군주상의 탄생 과정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시행해 민생 개혁의 시동을 걸었다. 큰 사진은 경기도 평택시에 있
는 대동법 시행비. 작은 사진은 대동법 시행세칙을 담은 호서(충청) 대동사목. <사진가 권태균>
재위 33년(1600)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2년 후 김제남의 딸을 계비(繼妃)로 맞아들였으니 인목왕후였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의인왕후가 승하했을 때 예관(禮官)이 명나라에 다시 세자 책봉을 주청하자고 건의하자 “왕비 책봉은 청하지 않고 세자 책봉만 청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꾸짖었다고 전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목왕후는 선조 39년(1606년) 3월 영창대군을 낳았다.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선조는 서른두 살의 광해군 대신 강보에 싸인 어린 적자(嫡子)에게 자꾸 눈길을 주었다.
영창대군이 탄생하자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은 세종 때 소헌왕후 심씨가 임영대군 등을 낳았을 때 백관들이 하례한 전례를 들어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進賀)하겠다고 요청했다.
『선조실록』은 선조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유영경의 사주를 받은 예조에서 거듭 권하자 허락했다고 전하지만『당의통략』은 좌의정 허욱(許頊)과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이 ‘대군 한 명 낳았다고 백관이 진하할 것까지야 있느냐’고 반대해 중지되었다고 전한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 예부(禮部)는 선조 37년(1604) 11월 “조선의 세자를 세우는 의논을 단연코 따를 수 없다”는 자문(咨文)을 보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다시 거부했다. 장남 임해군이 있다는 명분이었지만 원군 파견을 계기로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이었다.
원임 영의정 이항복(李恒福) 등이 선조 39년(1606) 4월 명 사신에게 “적장자(嫡長子)를 세우는 것이 상경(常經)이긴 하지만 공을 우선하고 현인을 택하는 것도 예법의 권도(權道)”라고 말한 것처럼 광해군은 현명했으며 임란 극복에 공이 있었다.
또한 책봉 주청사 이호민(李好閔)이 훗날 북경에 가서 광해군은 “성지(聖旨:명 임금의 지시)를 받고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적을 막은 공로가 있었다”고 말한 것처럼 명 신종(神宗)의 직접 지시를 받은 적도 있었다.
임란 때 백성들에게 체포돼 일본군에게 넘겨졌던 임해군은 선조 35년(1602) 전 주부(主簿) 소충한(蘇忠漢)을 궁궐 담장 밖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 그 노복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수없이 빼앗아 원성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명에서 세자 책봉을 거부하고 선조도 적자(嫡子)에게 관심을 갖자 갓난아이에게 줄을 서는 인물들이 생겨났다. 차기 임금을 두고 집권 북인은 둘로 갈라졌다.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대북(大北)은 광해군을 지지했고, 유영경을 중심으로 한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14년 동안 세자였던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바라보는 정치세력이 있다는 것 자체가 광해군에게 타격이었다. 『선조실록』은 유영경의 대군 탄생 진하 소동이 일어난 선조 39년 3월 이후 광해군의 심적 불안을 보여주는 기사를 싣고 있다.
그 전까지 광해군은 대략 2~3일에 한 번 정도 선조에게 문안했다.
그러나 진하 소동 이후 거의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했던 것이다. 갓난아이와 다투는 형국이 된 것이다.
『당의통략』은 선조가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광해군이 문안하면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 행세를 하는가? 다음부터는 문안하지 말라”고 꾸짖어 광해군이 땅에 엎드려 피를 토했다고 전한다.
선조는 말할 것도 없고 소북도 문제였다. 서인·남인보다 소수당이었던 북인의 처지에서 내부가 갈라져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 근왕병 모집에 단 한 명도 응모하지 않는 민심의 이반을 겪었던 나라 집권당의 처신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왕위 계승 정쟁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뼈아픈 자기반성이었다.
사대부 중심의 정치체제 자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때였다.
선조가 조금 더 살았다면 광해군의 운명은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영창대군이 탄생한 이듬해(1607) 3월부터 병석에 누웠다.
그해 10월 9일 미명(未明)에 선조는 기침하며 밖으로 나가다가 기가 막혀 넘어졌고 자리에 누워 “이게 무슨 일인가”라고 반복해 소리 질렀다. 회복될 가망이 없자 만 두 살짜리 아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다고 판단한 선조는 이틀 후 원·시임(原時任:전·현직 관리) 대신들을 불러 “세자가 장성했으니 고사에 따라 전위(傳位)하는 것이 좋다.
만일 전위가 어렵다면 섭정(攝政)도 가하다”라고 광해군에게 왕위 계승을 명했다.
그러나 영의정 유영경, 좌의정 허욱, 우의정 한응인은 전교를 거두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유영경이 주도한 것이었다.
그러자 인목왕후가 삼공(三公:삼정승)을 빈청으로 불러 선조의 병세를 설명하면서 “지금 이 전교를 따르지 않는다면 심기가 더욱 손상돼 더욱 심해지실까 우려된다. 대신은 상의 명을 순순히 따르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내지(內旨)를 내렸다.
전위까지는 몰라도 섭정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영경은 영창대군에 대한 미련을 접지 않았다.
이때 일을 기록한 박정현(朴鼎賢)의『응천일록(凝川日錄)』은 유영경이 선조의 비망기를 감추어두고 조보(朝報)에도 게재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같은 소북인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과 공모해 군사를 동원, 대궐을 에워쌌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 41년(1603) 정월 전 참판 정인홍(鄭仁弘)이 상소를 올려 유영경을 공격해 전세 반전을 꾀했다. 정인홍은“신이 보기에 전하의 부자(父子)를 해칠 자도 유영경이고, 전하의 종사(宗社)를 망칠 자도 유영경이고, 전하의 국가와 신민에게 화를 끼칠 자도 유영경입니다”라고 거친 공세를 펼쳤다.
유영경이 그해 정월 24일 사직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정인홍을 ‘무군반역(無君叛逆)의 무리’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안심하고 출사하라’고 유영경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선조는 열흘 후인 재위 41년 2월 1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선조가 사망하자 유영경은 인목왕후를 찾아가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했으나 인목대비는 16년 동안이나 세자 자리에 있었던 33세의 광해군 대신 두 살짜리 아기를 임금으로 삼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결정하면서 선조의 유서를 공개했다.
“동기(同氣)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이를 너에게 부탁하니 모름지기 내 뜻을 몸으로 따르라”라는 내용으로서 영창대군을 부탁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린 영창대군을 위험에 빠뜨린 인물은 선조 자신이었다.
이렇게 광해군은 험난한 길을 걸어 즉위에 성공했다. 준비된 임금인 광해군은 즉위 석 달 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건의를 받아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범 실시했다.
『광해군일기』는 이에 대해 “기전(畿甸:경기) 백성들의 전결(田結)의 역이 이후부터 조금 나아졌다”고 박하게 평가했지만 대동법은 백성들의 삶을 크게 향상시키는 선정으로서 민생을 위한 새로운 개혁 정치가 시작될 것임을 선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난관이 남아 있었다. 명나라에서 광해군의 왕위 계승 승인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이호민을 사신으로 보내 왕위 승인을 요구했으나 명나라는 다시 거부하고 그해 6월 차관(差官) 엄일괴(嚴一魁)·만애민(萬愛民)을 파견해 왕위 계승이 정당한지 조사하게 했다.
당시 생존했던 윤국형(尹國馨:1543~1611)은『갑진만록(甲辰漫錄)』에서 명 사신이 입국할 때 “의주에서 벽제까지 인민이 길을 막고 전하(殿下:광해군)의 현명함을 노래하며 이진(李진:임해군)의 무상한 역절(逆節)을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두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는 날에는 “근기(近畿:경기도)의 사대부부터 아래로는 선비, 노소 백성이 무려 수만 명이나 몰려 서교(西郊)를 메웠다”고 전하고 있다. 광해군에 대한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명 사신은 그해 6월 20일 서강(西江)에서 임해군을 만나고 귀국했다.
명의 두 사신은 수만 냥에 달하는 은화(銀貨)를 이미 챙긴 후였다.
이 사건은 광해군의 명에 대한 신뢰를 근본에서부터 흔들었다. 이런 자각은 동아시아 격변기 조선의 국왕으로서 바람직한 것이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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