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95호] 20090103 입력
■ 뜻이 옳아도, 고립된 권력은 실패한다.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 연산군
⑥友軍 없는 군주
정치는 기본적으로 세력관계다. 연산군은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공신들의 빈자리에 좋든 싫든 공신세력의 정적인 사림을 배치해 우군으로 삼아야 했으나 갑자사화 와중에 사림까지 제거하는 우를 범했다. 공신들은 군사를 일으켜 그를 쫓아냈고 사림들은 붓으로 쿠데타를 합리화했다.
▲이 귀양 가서 죽은 강화도 교동도에는 그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이곳엔 연산군 부부상이 걸려 있다. 연산군이 민간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됐음을 말해 준다.
<사진가 >
‘낮에는 요순(堯舜)이요 밤에는 걸주(桀紂)’라는 평을 들었던 성종이 재위 8년(1477) 대비들과 짜고 왕비 윤씨를 폐위하려 할 때 대신들이 우려한 것은 원자(元子:연산군)였다. 왕비를 폐했다가 원자가 장성하면 “그때는 후회해도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성종실록』8년 3월 29일)”라는 우려였다.
그러나 성종은 “큰일을 당했는데 어찌 뒷날을 생각하겠는가”라고 반박했다.
대부분의 신하가 반대했으나 성종은 윤씨를 빈(嬪)으로 강등시킨 후 재위 10년(1479)에는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13년(1482)에는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사약을 내려 죽이게 했다.
모친을 죽였으면 그 아들을 폐하는 것이 훗날의 비극을 방지할 수 있는 차선책이었지만 성종은 이듬해 14년(1483) 정월 원자를 왕세자로 책립해 원자의 지위는 흔들지 않겠다는 뜻을 확고히 했다.
연산군은 언제 모친의 비극을 알았을까? 조선 중기 김육(金堉)이 편찬한『기묘록(己卯錄)』은 연산군이 성종의 계비(繼妃) 정현왕후 윤씨를 생모로 알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 후 임사홍을 통해 모친의 비극을 알았다는 것이다.
『연산군일기』12년(1506) 4월조는 연산군이 미복(微服)으로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성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가 참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썼으며, 조선 후기 안정복(安鼎福)도 ‘열조통기(列朝通紀)’에서 연산군이 임사홍을 통해 모친의 비극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연산군은 재위 1년(1495) 4월 승정원에 “선왕 때 폐비의 묘에 어떻게 묘지기를 정해 지키게 했는가?”라고 물어서 이미 모친의 비극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해 9월에는13년째 전라도 장흥에 유배되어 있던 외삼촌 윤구와 외할머니 신씨를 석방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임사홍을 통해 모친의 비극을 알고 나서 복수에 나선 사건이 아니었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조선 정치구조를 바꾸려는 의도로 시작된 사건이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재위 10년(1504) 3월 엄씨와 정씨를 타살한 것이 시발로 알려져 있었지만 재위 9년 9월 인정전에서 베푼 양로연 때 예조판서 이세좌가 연산군이 내린 회배주(回盃酒)를 반 이상 엎질러 연산군의 옷을 적신 작은 사건이 시작이었다.
이세좌는 술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으나 국문 끝에 유배형에 처해졌다. 연산군은 이세좌를 이듬해 3월 석방했으나 그달 11일 경기관찰사 홍귀달(洪貴達)이 세자빈 간택을 위한 간택령 때 손녀가 병이 있다면서 “지금 비록 입궐하라는 명이 있어도 입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항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연산군은 이세좌와 홍귀달을 불경죄로 모는 한편 그해 3월 24일 승정원에 폐비 사건과 관련된 신하들을『승정원일기』를 상고해 보고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연산군은 두 사건을 병합해 거대한 폭풍을 일으켜 공신세력을 무너뜨릴 계획이었으나 아무도 그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3월 30일 “위를 업신여기는 풍조를 개혁하여 없애는 일이 끝나지 않았다”면서 “이세좌는 선왕조 때 큰일을 당했을 때 극력 간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약을 내리고 홍귀달도 그해 6월 교수형에 처했다.
‘선왕조 때 큰일’이란 물론 모후(母后)에게 사약을 들고 간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세좌는 부친 이극감(李克堪)뿐만 아니라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극배·극감·극증·극돈·극균 등의 백·숙부가 모두 봉군(封君)된 거대 공신 가문이었다. 연산군은 나아가 공신들의 세력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기로 결심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 5월 7일 공신들이 노비를 마음대로 차지했다고 비판한 것을 시작으로 다음 날 “국조(國朝) 공신 중에 자신이 스스로 공을 이룬 자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공으로 얻은 자도 있다”면서 ‘개국 이후 여러 공신의 공적을 경중으로 나누어 아뢰라’고 명했다.
사관은 연산군이 연락(宴樂)에 빠져 돈이 부족해지자 ‘여러 공신의 노비·전지를 도로 거두려 하였다’고 비판하는데 연락 때문에 돈이 부족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공신들의 물적 기반을 해체하려 한 것은 사실이었다.
연산군은 5월 10일 여러 『공신초록(功臣抄錄)』을 내리면서 “내 생각으로는 연대가 오래된 공신들은 그 노비와 전토를 회수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공신들의 세습 노비와 토지들을 기한을 정해 환수하겠다는 뜻이었다.
연산군의 말이라면 ‘지당하옵니다’만 읊조리던 지당정승 유순(柳洵)도 이 조치에는 반대했다. 태종도 신하들의 보필로 개국했기 때문에 공신을 책봉하고 노비·전토를 하사해 “영원히 상속하도록 하셨다”면서 “지금 다시 환수하려면 7, 8대나 전해져 온 자손들을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반드시 인심이 소란하고 우려할 것입니다(『연산군일기』10년 5월 10일)”라는 것이었다.
지당정승 유순까지 반대하자 “연대가 오래된 공신들의 것도 환수하지 말라”고 한발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법 제정을 통한 일괄 환수가 불가능해지자 연산군이 선택한 것이 개별적 재산 몰수였다.
연산군은 폐비 사건의 책임을 물어 윤필상·이극균·성준·권주 등 생존 대신들을 사형시키고, 한치형·한명회·정창손·어세겸·심회 등 사망한 대신들은 부관참시했는데, 이들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재산 몰수가 뒤따랐다.
적개·좌리공신이었던 윤필상의 재산에 대해 호조에서 “집이 다섯 채인데, 재물이 매우 많으니 한성부와 의논하여 몰수하고 역군(役軍) 20명을 정하여 옮기게 하소서”라고 청할 정도였다. 연산군의 재산 몰수는 내관들도 비켜가지 않아서 술에 취해 자신을 꾸짖은 김처선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
이보다 앞선 재위 9년(1503) 6월에는 환관 전균(田畇)이 죽자 그의 노비 109명을 내수사(內需司)에 속하게 하고 20명은 본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으로 세조에게서 받은 것이었으나 사패(賜牌)에 ‘영원히 상속한다’는 말이 없었다고 관청(公)에 귀속시킨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렇게 몰수한 재산 처리에 대한 확고한 방침을 갖고 있었다.
재위 10년 5월 9일 “전일 적몰한 노비를 3등분으로 나누어 2분은 내수사에서 가려 차지하고, 1분은 각 관사에 나누어 주라”는 하교가 이를 말해 준다.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에서 3분의 2를 차지하라는 것은 결국 연산군이 그만큼 갖겠다는 뜻이었다.
신하들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옥사를 확대한다는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명회나 정창손처럼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느닷없이 부관참시당하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 가족들의 원한이 하늘을 찌를 것은 당연지사였다.
『연려실기술』은 연산군이 쫓겨나던 날 우의정 김수동이 “전하께서는 너무 인심을 잃었으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하는데 인심을 잃은 결정적 이유가 재산 몰수에 있었다.
세조나 예종은 정적(政敵)들에게 빼앗은 재산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연산군은 자신이 차지했다.
세조라고 공신들이 무조건 예뻐서 노비·전토를 하사하고 전횡을 눈감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산군은 사대부 전체를 적으로 만들었다.
공신 집단을 해체하기로 결심했다면 그 대체세력을 찾아야 했는데 이 경우 공신세력의 정적인 사림이 대안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재위 10년 9월 느닷없이 무오사화 때 귀양 간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이 무리들을 두었다가 어디 쓰겠는가? 모두 잡아오도록 하라”고 명했다. 연산군에게는 성리학에 입각해 간쟁하는 사림도 왕권에 항거하는 제거 대상일 뿐이었다.
미리 몸을 피한 정희량(鄭希良)을 제외하고 수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다. 종친 이심원이 능지처참당하고 귀양 갔던 김굉필·박한주·이수공·강백진·최부·이원·이주·강겸·이총 등이 사형당했다. 공신들은 물론 사림까지 적으로 돌렸으니 그를 보호할 세력이 없었다.
연산군이 공신들의 자리에 사림을 배치하고 공신들에게서 빼앗은 재산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역사상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림마저 적으로 삼은 그가 역사상 최고의 폭군으로 기록될 것은 사림이 사필(史筆)을 쥔 이상 필연적인 결과였다. <다음 호부터는 광해군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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