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윤증(尹拯)

야촌(1) 2010. 9. 11. 23:51

■ 윤증(尹拯)

 

   [생졸년] 1629년(인조 7)∼1714년(숙종 40).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字)는 자인(子仁), 호(號)는 명재(明齋). 아버지는 선거(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로 장백(長白)의 딸이다.

 

1. 가계와 사승

선거(宣擧)가 성혼(成渾)의 외손(外孫)이므로 가학(家學)이 성리학이었다.

이성(尼城: 충청남도 논산군)의 유봉(酉峰)아래 살았으므로 호(號)를 「유봉」이라고도 하였다.

1642년(인조 20) 14세 때 아버지 선거(宣擧)가 유계[兪棨 : 1607년(선조 40)∼1664년(현종 5)]와 함께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하였는데, 그때 공부하면서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9세에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그를 사사(師事)하기도 하였다. 그전에 주자(朱子)에 관한 책을 김집(金集)에게 배웠는데, 김집은 송시열(宋時烈)이 주자학에 정통하므로 그에게 배우라고 하였다. 당시 송시열은 회천(懷川)에 살고 있었는데, 29세 되던 해에 송시열에게 가서 사사(師事)하여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35세에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였으며,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로부터 공조랑·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 正五品) 에 계속하여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 1682년(숙종 8) 호조참의(戶曹參議 : 正三品) , 1684년 대사헌(大司憲 : 從二品) , 1695년 우참찬(右參贊 : 正二品) , 1701년 좌찬성(左贊成 : 從一品) , 1709년 우의정(右議政 : 正一品) , 1711년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從一品)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2. 출사거절

41세(1699년 숙종 25) 되던 해 아버지가 죽었는데,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그즈음 그의 이름을 듣고 공부를 청하는 자가 많았는데, 그는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 : 朱子가 어머니 묘소 곁에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세우고 학자들과 담론하기도 하며, 여동래(呂東萊)와 함께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한 일을 말함.)를 모방하여 거상중에 강학(講學)하기도 하였다.

 

거상이 끝나자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추모하여 종약(宗約)을 만들고 모임을 결성하여 학사(學事)를 부과하기 1680년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이 숙종에게 상주하여 그를 경연(經筵)에 부르도록 청하였으며, 나중에는 별유(別諭)를 내려 부르기도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때 박세채(朴世采)가 그를 초치하여 같이 국사를 논할 것을 청하고, 부제학 조지겸(趙持謙) 역시 성의를 다하여 올라오도록 전하였는데, 이로부터 초치가 여러 번 있어 박세채가 몸소 내려와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 사정 이외에 나가서는 안 되는 명분이 있다. 오늘날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면 모르되 나간다면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옹(尤翁 : 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되고, 삼척(三戚 : 金錫胄· 金萬基· 閔鼎重의 집안)의 문호(文戶)는 닫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역량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할 수 없을 것 같으므로 조정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세채는 이 말을 듣고 더 강권하지 못하였다.

 

3. 노론· 소론의 분열

이 송시열을 변무(辨誣)하는 것을 가탁하여 그의 사서(私書)를 공개하면서 그가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상신 김수항· 민정중 등도 그가 사각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상주하였다.

 

이로부터 선비간에 논의가 비등하게 일어나 서인이 노·소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송시열을 지지하는 자가 노론이 되고 그를 지지하는 자가 소론이 되었다.

그가 송시열을 사사할 때, 아버지 선거가 그에게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을 따라가기 힘드니 그의 장점만 배우되 단점도 알아두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있다. 선거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송시열의 단점으로 보고,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깨우쳐주려 하였다.

또 윤휴(尹鑴)와 예송문제(禮訟問題)로 원수지간이 되자 송시열과 화해시키려고 하였는데, 송시열은 선거가 자기에게 두 마음을 가진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선거가 죽고 1673년(현종 14) 그는 아버지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에게 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때 송시열은 강도(江都)의 일(병자호란 때 선거가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胡兵이 입성하자 처자와 친구는 죽고 자기만 珍原君의 從者가 되어 성을 탈출한 사실)과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일을 들먹이며, 묘지명을 짓는데 자기는 선거에 대하여 잘 모르고 오직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하여 말할 뿐이라는 식으로 소홀히 하였다.

죽은 이에 대한 정리가 아니라고 하여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자구수정에 그쳤을 뿐 글자에 대해서는 고쳐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사제지간의 의리가 끊어지고 그는 송시열의 인격 자체를 의심,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송시열을 ‘의리쌍행 왕패병용(義利雙行 王覇幷用)’이라고 비난하였다.

 

4. 선고변무

또 그는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초년에 불교에 입문한 사실을 인용,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생들이 궐기하여 선현을 모독하였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의 태반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교명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을 전후하여 사림과 간관 사이에는 비난과 변무의 상소가 계속되고, 양파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집의(執義 : 從三品) 김일기(金一夔) 등의 상소로 관작이 일시 삭탈되었다가 중전 복위를 즈음하여 숙종(肅宗 : 조선 제19대왕)의 특명으로 이조참판(吏曺參判 : 從二品)을 제수하고 군신간의 상면을 촉구하였다. 사간(司諫 : 從三品)) 정호(鄭澔) 등이 다시 상소하여 그가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헐뜯었으나 숙종은 정호를 벌주며, “아버지와 스승 중 어느 쪽이 더 중한가. 그 아버지의 욕됨을 받는 그 아들의 마음이 편하겠는가.”라고 꾸짖었다.

 

5. 복작

그가 죽은 뒤 1년이 지나서, 유계[兪棨)가 저술한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발문을 정호가 쓰면서 그를 비난하여 다시 노론·소론간의 당쟁이 치열하여졌다. 결국, 소론일파가 거세되고 그와 그의 아버지의 관직이 추탈되었는데, 1722년(경종 2)에 소론파 유생 김수구(金壽龜)· 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하여 복작되었다.

그뒤 문성(文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지방유림들의 합의로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江書院), 영광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景宗實錄 ◇明齋年譜 ◇誌狀 ◇黨議通略(李建昌)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49)

 

윤증 고택 정면 모습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있는 윤증 고택의 정면 모습이다.

조선 숙종 때,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조선시대 상류 양반 가정의 전형적인 주택이다.

매우 안정감 있게 지어진 이 집에는 지금도 종손이 기거하고 있디.

 

 

윤증 초상화

'■ 인물 > 조선시대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공필(盧公弼)  (0) 2010.09.26
이이명 (李頤命, 1658~1722)  (0) 2010.09.24
박팽년(朴彭年)  (0) 2010.09.02
강희맹(姜希孟)  (0) 2010.09.02
이중발(李重發)  (0) 2010.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