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박팽년(朴彭年)

야촌(1) 2010. 9. 2. 00:44

■ 박팽년(朴彭年)

 

[생졸년] 1417년(태종 17)∼1456년(세조 2).

[문과] 세종(世宗) 16년(1434) 갑인(甲寅) 알성시(謁聖試) 을과(乙科) 2위

[문과] 세종(世宗) 29년(1447) 정묘(丁卯) 중시(重試) 을과(乙科)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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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문신. 단종복위운동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회덕(懷德) 출신. 안생(安生)의 손자이며, 중림(仲林)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 우승지(右承旨 : 正三品) 를 거쳐 이듬해는 형조참판(刑曹參判 : 從二品) 이 되었다.

 

그 뒤 1455년(세조 1)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 從二品) 를 거쳐 다음해에 다시 형조참판(刑曹參判 : 從二品) 이 되었다. 세종(世宗) 때 신숙주(申叔舟)· 최항(崔恒)·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이들 학사들은 모두 그 시대의 이름높은 선비들이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경술(經術)과 문장·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45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 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으나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는 성삼문(成三問)의 만류로 단념하였는데, 이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 복위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 從二品) 로 나가 있는 동안 세조에게 올리는 일체의 문서에는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김질(金礩)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해 6월 1일 세조(世祖)가 상왕인 단종(端宗)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昌德宮)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즉, 왕의 호위역인 운검(雲劍)으로 성승(成勝)· 유응부(兪應孚)· 박정(朴崝)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그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端宗)을 복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날 아침 세조(世祖)는 연회장소인 전내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兪應孚)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일을 미루자고 하여 뒷날 관가(觀稼: 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의식) 때로 다시 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金礩)이 세조에게 밀고하였으므로 성삼문(成三問)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이에 그는 이미 성삼문(成三問)이 잡혀가 모의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세조(世祖)는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자신에게 귀부하여 모의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었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라 하고 상감(上監: 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하였는데도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上王: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忠淸道 監司 : 從二品)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그는 서슴없이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이개· 김문기(金文起)· 성승· 박정· 유응부· 권자신(權自愼)· 송석동(宋石同)· 윤영손(尹令孫)· 이휘(李徽)와 자신의 아비 중림이라 대답하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憲)·순(珣)·분(奮)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이와 함께 그의 어머니·처·제수(弟嫂)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가족이라 하여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이 단종복위운동이 있을 때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南孝溫)이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골라 그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기니, 이것이 《추강집 秋江集》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


그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1691년(숙종 17)에 이르러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 그뒤 1758년(영조 34)에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삼대가 화를 입은 멸문(滅門)으로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추강집》의 사육신전이나 다른 서에 간헐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경술과 문장·필법에 뛰어난 존재로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명문(名文)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나 이와같은 문집이 전하지 않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종이 왕위를 잃게 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하여 눈앞에 기약된 영화와 세조의 회유책을 감연히 거절하고 죽음과 멸문의 길을 서슴없이 걸어왔으니, 이와같은 높은 절의는 오늘날까지 온 국민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그의 묘에는 그저 박씨지묘(朴氏之墓)라고 새겨진 표석(表石)이 새겨져 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허적(許積)은  “성삼문 등 육신이 죽은 뒤에 한 의사(義士)가 그들의 시신(屍身)을 거둬 이곳 강남(노량진) 기슭에 묻었으며, 그 무덤 앞에 돌을 세우되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저 ‘아무개 성의 묘’라고만 새겨놓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는데, 특히 필법에 뛰어나 남북조시대의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간다 하였다. 

이 묘역은 1978년 사육신공원으로 단장되었으며,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또한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肅宗實錄  ◇正祖實錄  ◇莊陵誌  ◇尤菴集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槿域書畵徵(吳世昌, 啓明俱樂部, 1928)  ◇韓國繪畵大觀(劉後烈, 文敎院, 1969)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선생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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