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09. 02
■ 강희맹(姜希孟)
[생졸년] 1424년(세종6)∼1483년(성종14).
[문과]세종(世宗) 29년(1447)정묘(丁卯)친시(親試)을과(乙科) 1[장원(壯元)]위
[문과] 세조(世祖) 12년(1466) 병술(丙戌) 발영시(拔英試) 일등(一等) 3위
[문과] 세조(世祖) 12년(1466) 병술(丙戌) 등준시(登俊試) 일등(一等)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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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字)는 경순(景醇), 호(號)는 사숙재(私淑齋)· 운송거사(雲松居士)· 국오(菊塢)· 만송강(萬松岡). 지돈령부사석덕(碩德)의 아들로, 인순부윤(仁順府尹)이었고 화가였던 희안(希顔)의 동생이며, 세종의 이질(姨姪)이다.
1447년(세종 29) 별시문과에 18세로 장원급제한 뒤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가 되었다.
1450년에 예조좌랑과 돈령판관을 역임하고,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그뒤 예조참의· 이조참의를 거쳐, 1463년 중추원부사로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에 부윤으로서 어제구현재시(御製求賢才試)에 2등으로 합격하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3등, 등준시(登俊試)에 2등으로 급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되었으며, 예조판서를 거쳐 1467년에는 형조판서로 특배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에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봉되어 진산군(晋山君)에 봉해지고, 1471년(성종 2)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봉되었다. 그해에 지춘추관사로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3년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 正二品)가 되고, 이어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 從一品)) · 이조판서(吏曹判書 : 正二品) ·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從一品) · 우찬성(右贊成 : 從一品) 을 역임한 뒤, 1482년에 좌찬성(左贊成 : 從一品) 에 이르렀다.
인품이 겸손하고 치밀하여 맡은 일을 잘 처리했으며, 또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한 당대에 뛰어난 문장가였다. 사대부로서의 관인적 취향과 섬세한 감각을 가진 문인이면서도 농촌사회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와 설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관인문학(官人文學)의 고답적인 자세를 스스로 파괴해버렸다.
그의 《농구십사장 農謳十四章》은 생활주변에서 채집한 농요를 모아 정리한 것으로 농민들의 애환과 당시 농정(農政)의 실상이 잘 묘사되었는데, 그의 시 중에서 그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의 시집인 《진산세고 晋山世稿》를 편찬하였으며, 세조 때 《신찬국조보감 新撰國朝寶鑑》·《경국대전》의 편찬과 사서삼경의 언해, 성종(成宗) 때는 《동문선》·《동국여지승람》·《국조오례의》·《국조오례의서례》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한,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를 특히 잘 그렸는데, 현재 일본의 오구라문화재단(小倉文化財團)에 소장되어 있는 〈독조도 獨釣圖〉는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원각사비(圓覺寺碑)의 액전(額篆)과 그의 아버지와 강지돈(姜知敦)의 묘표의 액서(額書), 합천홍류동체필암각(陜川紅流洞泚筆巖刻) 등을 썼다.
저서로는 성종(成宗 : 조선의 제9대왕)의 명에 따라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사숙재집 私淑齋集》 17권 이외에 《금양잡록 衿陽雜錄》·《촌담해이 村談解頤》 등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睿宗實錄 ◇成宗實錄 ◇秋江集 ◇海東雜錄 ◇新增東國輿地勝覽
◇慵齋叢話 ◇燃藜室記述 ◇國朝名臣錄 ◇私淑齋集 ◇海東名臣傳 ◇國朝人物考 ◇國朝人物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