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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려(草廬)에게 올리다. - 명재 윤증(明齋 尹拯)

야촌(1) 2010. 9. 10. 23:03

옮긴일 : 2010. 09. 10

 

명재유고 제9권>서

명재 윤증(明齋 尹拯) 생몰년 : 1629(인조 7)~1714(숙종 40)

 

■ 초려(草廬)에게 올리다. - 명재 윤증(明齋 尹拯)

 

화창하고 따뜻한 봄에 삼가 조용히 수양하고 조섭하며 늘 백복(百福)을 누리시는 것을 생각하니 구구한 정성으로 우러르는 마음 그지없이 위안이 됩니다. 저는 질병을 앓는 중에 조심하지 못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삼가 여러 선생님들께서 염려하고 돌봐 주신 덕택으로 소생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신이 사라진 듯하고 저승길이 어른거려 이제부터 다시는 온전한 사람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스스로 가엾어 한들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병으로 신음하는 가운데 보내 주신 서신을 받고 펴서 읽으니 가슴이 활짝 열려 잠시나마 흔쾌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백첨(伯瞻)이 찾아올 때 거듭 안부를 하문하는 가운데 돌보고 사랑함이 정중하시니 마음속에 감복함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지난번 병이 심했을 때는 죽을 것같이 생각되어 온갖 의욕이 사라지고 오직 뜻이 조금도 성취되지 못하였음을 스스로 못내 슬퍼하였습니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자 비로소 이러한 마음 역시 사사로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으며, 제가 애초부터 공부에 힘써 얻은 것이 털끝만큼도 없었다는 점에 대해 스스로 비웃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력이 다하여 성대한 정의(情誼)에 몸소 사례할 길이 없는 나머지 훌륭한 가르침을 받지 못한 지가 어느덧 1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편지를 쓰려고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슬퍼지고 답답하여 달려가 뵙고 싶은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가친께서는 성상의 온화한 유지를 받고 이제 막 몇 글자 지어 올리면서 조심스럽고 황공한 마음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장인(丈人)께서는 벼슬이 높아졌으나 병이 깊어졌으니, 끝내 어떻게 수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동춘(同春) 함장(函丈)께서는 이미 고향집에 이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약속을 지킬 것을 당부하신다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는 수고로움을 면하지 못할 듯합니다. - 무술년(1658, 효종9) -


초라한 오두막집에서 답답함이 심했는데 심부름하는 사람이 비를 맞으며 찾아와서 선생님의 서신을 전해 주어 급히 펴서 읽으니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하였습니다. 삼가 행차가 이미 형문(衡門)에 도착하여 조섭을 잘하고 신명이 위로하듯 만복을 누리심을 알고는 구구한 마음에 간절하게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가친의 편지를 인편이 막혀서 걱정하는 가운데 받게 되니 다행스런 마음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보내 주신 글에 보여 준 성상의 하교와 성상께 올린 말씀은 3번이나 반복하여 읽고 감탄하였습니다.

 

다만 삼가 우옹(尤翁)께서 오랫동안 벼슬에 머무를 의향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 떠날 만한 연유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성상께서 예(禮)로 대하는 마음에 지극하지 못함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우는 쇠하지 않았지만 큰 뜻이 굳건하지 못하기 때문인가요?

 

이 두 가지가 아니라면 옛사람이 말한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랏일에 힘쓰고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

「鞠躬盡瘁 死而後已」”라는 여덟 글자가 바로 오늘 우옹께서 지켜야 할 의리일 것입니다.

 

처음 벼슬길에 나설 때에 진실로 일의 성공과 실패, 유리함과 불리함을 따질 겨를이 없었는데, 하물며 비난하는 자들의 시끄러운 말들로 인해 어찌 자신의 거취를 결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우연히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보니 악의(樂毅)는 연(燕)나라에 벼슬한 지 30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제(齊)나라를 정벌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연나라와 제나라의 강함과 약함은 단지 나라의 크기가 같지 않은 것일 뿐인데도 이렇게 오래 걸렸는데 하물며 오늘날의 일은 얼마나 큰일인데 짧은 기간 안에 이루기를 기필할 수 있겠습니까.

 

정(鄭)나라의 자산(子産)도 재상이 된 지 1년 동안은 백성들이 모두 그를 죽이려고 했으니, 그 당시의 인심은 진정시키기가 지극히 어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백성들의 마음을 화합시켜 안정시켰으니, 어찌 일을 맡은 자가 굳은 의지로 책임지고 곧바로 나아간 결과 공업이 날로 일어나는 것을 가릴 수 없어서 결국 저 근거 없이 선동하는 자들도 자연히 승복하고 물러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정말로 성상께서 선왕이 말년에 품었던 뜻을 이어받으신다면 비단 우옹께서 물러날 만한 의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고향집에서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하며 태평성대의 일개 여유로운 백성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등의 문하(門下)의 말씀도 단지 한가로이 하는 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옹께서 물러나려고 하는 계획은 쉽게 실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망녕된 근심이 이에 이르러 참람되게 말을 늘어놓았으나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우옹께 말씀드리려 하는데 만약 위의 두 가지 이유에서라면 함부로 지껄일 수 없을 것이기에 감히 먼저 선생님께 여쭙는 것이니 인편을 통해 가르침을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서늘한 초가을에 사문(斯文)의 도(道)를 위해 더욱 보중하셔서 우러르는 정성에 위안이 되어 주기를 축원합니다. 요즘 들리는 소문에 봄이 되면 북쪽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때에 이미 벼슬길에 나가 직무를 담당하고 계신 여러 선생님들은 장차 어떻게 대처하실 요량인지요? 미천하여 지위가 낮은 사람은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지만 전장(銓長)이나 헌장(憲長)은 중간에 숨을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만약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나아가 사신을 맞이한다면 스스로 평소의 마음을 어기게 될 것이고 잠시 피해 있다가 조정에 들어온다면 행적이 너무 구차할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당면한 일 밖에서 맴도는 것은 결코 착실하게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문하께서 우암(尤庵) 어른과 평소 강론할 때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시기로 결정하였는지요?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무엇인가를 해보고자 한다면 이런 일에 대처할 때, 문종(文種)과 범려(范蠡)가 오(吳)나라를 위해 이익을 꾀해 주었던 것처럼 해야만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깊이 숨어서 나오지 않는 것만 못하며 비록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나오게 되더라도 벼슬과 직책을 사양하고 항상 무위(無位)의 자리를 지켜야만 초연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런 생각을 말씀드리지 못하다가 이제 우암 어른께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혹 눈과 귀를 번거롭게 할까 봐 감히 못 하고 있습니다. 삼가 평소에 서로 의논하여 결론 내린 의리를 상세히 가르쳐 주어 의혹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기해년(1659, 현종 즉위년) -

 

탄옹(炭翁)께서 근래에 하신 일은 두 가지 잘못이 있으니 하나는 예론(禮論)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을 제외하지 않고 강경하게 주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선도(尹善道)가 간교한 사람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잘못이 있으면서 말한 시기는 때마침 길흉이 엇갈리는 때이며 처한 곳은 마침 사벽하고 음험하며 시사를 위태롭게 동요시키는 측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한마디 말로 간사하고 참람된 구덩이에 빠져 자신은 피할 수 없고 남들은 구원할 수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본심은 결코 윤선도를 위해 유세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마음속으로 진실로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친구들을 위한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평소에 그분의 지론은, 군신 간의 정분과 의리가 두터우면 임금의 과실을 말하는 자가 날마다 앞에 이르게 해야 하니 그런 연후에야 천하의 선(善)이 다 이르게 할 수 있어서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 여유가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또 말씀하기를, “남을 사랑하면서 굳이 같기를 기필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으니, 두 송공(宋公)과 굳이 같기를 기필하지 않는 사람은 오직 권모(權某)뿐이다. 두 송공께서 요직에 있으면 두 송공을 위해 도성에 머물면서 같지 않은 일을 많이 하여 천하의 모든 선인(善人)들을 오도록 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한 항목은 저에게 준 서신에 있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는 그 의견의 잘잘못을 논하기 전에 그의 가슴속에 본래부터 품고 있었던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상소 중에 있는 비방지목(誹謗之木) 등의 말도 역시 평소에 하시던 말입니다.

 

몇 해 전에 정개청(鄭介淸)의 일이 있을 때 저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윤선도의 상소는 방목에 해당한다.”라고 하시므로, 저는 “《대학(大學)》에 ‘어진 사람만이 악한 자를 사방 오랑캐 땅으로 추방하여 중원에 함께 살지 못하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어느 정도의 소인이라야 이에 해당시키려 하십니까?”라고 하면서 탄옹과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못한 채 논쟁을 끝냈습니다.

 

금일에 이르러 참소하는 사람들이 남을 해치려는 날카로운 창끝을 멋대로 휘두르는데 아직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말을 하고 있으니, 이는 매우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굳이 같기를 기필하지 않는 일을 많이 하여서 천하의 모든 선인을 오도록 하겠다.”라고 한 것은 단순하여 그 하나만 보고 둘은 생각지 못한 것이니, 차분히 강론하며 각자의 의견을 밝히는 것은 괜찮지만 맞지 않는 말을 가지고 선류를 참소하는 자들에게 영합한다면, 자신은 비록 굳이 같기를 기필하지 않는 공변된 마음을 믿더라도 어진 사람을 해치는 효시(嚆矢)가 된 죄는 클 것입니다.

 

그런 즉 위의 두 가지 이야기는 의리로 보아 마땅하지 못한 점이 있으나, 지금 상소한 본래 뜻도 오직 이런 내용이기 때문에 일일이 나열하여 말씀드립니다.- 이 두 가지가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데다 또 성상께서 홀로 근심하며 의지할 데가 없는 것을 보고는 두 선생님께서 전후로 결연하게 귀향하신 일은 지나치다고 여겼기 때문에 우려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었고, 또 자신의 마음에 다른 마음이 없었음을 믿고 성상과 여러 선생님들의 서로 알아줌이 깊다고 믿었기 때문에, 갑자기 이와 같이 하면서도 혐의쩍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의 망녕된 견해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오로지 이와 같을 뿐입니다.

탄옹의 입장에서는 두 가지 잘못이 있는 데다 또 가볍게 처신하여 무너뜨린 허물도 있습니다.

 

-상소가 올라가서 마침내 성상의 마음에 의혹이 생기게 되면, 흉인(凶人)들이 기세를 올리고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처음에는 악한 자의 편이 되어 어진 이를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다고 해도 남에게 속마음을 헤집어 보여 줄 수 없어서, 비록 공문중(孔文仲)같이 피를 토하고 죽는다 하더라도 속죄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 따라서 오직 마땅히 문을 닫고 들어앉아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달게 받으면서 아직 미진한 점을 더욱 강구하며 세한(歲寒)을 기약하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들이 본심을 가엾게 여겨 주기를 바라야 합니다. 탄옹께는 이러한 뜻으로 이미 권해 드렸습니다. 참람된 제 생각으로는 여러 선생님들의 입장에서 마땅히 탄옹의 이번 행적은 배척하되 그 마음은 알아주어

 

-율곡(栗谷) 선생도 “행적에 집착하지 말고 천천히 그 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 40년 오랜 친구의 의리를 온전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면 탄옹이 후세에 화를 모면하는 천만다

  행이 될 뿐만 아니라 두 분 선생님께서도 성대한 덕이 더욱 빛나지 않겠습니까.

 

처음 이번 일에 대해 듣고 저는 본디 세상 사람들이 탄옹을 곧장 간교하고 음흉한 무리인 양 몰아갈 줄을 알았습니다만, 서로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그 행적만 보고 배척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 원외(李員外)의 상소에서 극렬하게 공격했을 때에도 저는 오직 서로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하가 임금께 나아가 말씀한 것을 보고 또 숙부가 오셔서 문하의 주장을 자세하게 말씀해 준 연후에 비로소 크게 놀라고 두려웠으며 종일토록 스스로 의혹됨을 풀 수 없었습니다.

 

문하께서 탄옹과 서로 마음을 알아줌이 깊고도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극렬하게 배척하는 데에 이르게 된 것은, 진실로 탄옹이 악인들의 편이 되어 어진 이를 해쳤으며 그것은 참으로 간악하고 음흉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제 마음에서 구하여 볼 때 끝내 이런 것으로 탄옹을 차마 의심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거꾸로 문하의 말씀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컨대 우암(尤庵)과 동춘당(同春堂) 두 선생님께 여쭌 내용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가령 참소하는 자들이 뜻을 얻어 사림을 해치기를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처럼 하는 때를 당했다면, 탄옹은 반드시 그들의 편이 되지 않고 유종룡(柳從龍)과 이희순(李希醇)이 했던 것처럼 사림을 구하다가 함께 그 죄를 당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동춘 어른께서는 제 말을 듣고서 그렇다고 하셨으며 우암 선생께서는 “사성(思誠)이 아무리 소인이라 해도 끌어들여 자신의 무리로 삼으려고 하면 반드시 벗어나 그 무리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하니 오늘날 참소하는 자들과 편이 되어 사림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이런 마음이 없으니 오늘 하는 일은 비록 용서할 수 없는 큰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위의 잘못에 불과하며, 그 근본은 진실로 옛날의 탄옹 그대로일 뿐입니다.

 

그 행적을 처벌하고 그 관직을 파한다면 법을 집행하는 논의가 마땅함을 얻었다고 할 만하며, 그 마음을 밝히고 그분이 군자들의 벗이지 소인들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분별한다면 지인(知人)ㆍ논인(論人)이 실로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두 가지 모두 아름답고 온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 본심이 사실 악한 자들의 편이 되어 현인을 해치려는 데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천천히 살피지 않고 바로 음흉하고 부정한 곳으로 떠밀어 넣으면서 조금도 애석하게 여기지 않으니, 저는 그래서 문하의 지론이 너무 강하고 공격이 너무 준엄하며 그 지인ㆍ논인의 도(道)에 대하여 혹 미진한 바가 있지 않는가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문하께서 회옹(晦翁)이 군자와 소인을 분별한 가르침을 들어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여기에서의 소인은 오로지 검은 것을 가리킨 듯합니다. 만약 흰 바탕 위에 검은 꽃을 올려놓고 검다고 한다면 검은 바탕 위에 흰 꽃을 올려놓았을 때에는 희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마도 회옹의 본래 취지와 십분 합치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어떻게 여기시는지요?-

 

문하께서 지난날 가르치기를 “과감하게 나아갈지언정 기죽지는 말라.”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고 잊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 오늘날 이 일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그 지나침을 깨닫지 못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저같이 무기력하여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자는 실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하지만 중정(中正)의 도를 가진 사람에게는 한편으로 치우침을 면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비록 저 탄옹은 걱정할 것이 없지만 자신의 말과 행동이 지나쳐서 못 미치는 것과 똑같이 잘못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의 망녕된 견해가 이러하니 마음속으로 문하의 마음을 추측하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끝내 침묵하지 못하고 이렇게 참람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살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혹시 사사로움에 가려 시비를 가릴 수 있는 본심을 잃었다면 삼가 바라건대 하나하나 지적하여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고, 혹시 문하의 뜻에 부합한다고 여기시면 더러운 부분을 씻어 내고 지란(芝蘭)의 향기를 쏘이게 하는 것은 오직 여러 선생님의 귀중한 한마디 말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지금 만약 “당초 배척한 것은 간사함과 바름, 나아감과 물러남의 기미에 관한 것이기에 힘을 다해 막고 준엄하게 공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나, 사실 그에게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는가.”라고 말씀하신다면 그의 본심과 행적이 세상에 밝혀질 것이고, 이쪽의 선을 선이라고 여기고 악을 악이라고 여기는 실상도 아울러 드러나 서로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미혹하다 여기지 말고 밝게 가르침을 내려 주시기를 저는 두 손을 모으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들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어서 감히 여쭙지 않을 수 없었으나 경솔하게 망언을 늘어놓았으니 참람되고 외람됨이 지극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제가 올린 편지 뒷면에 답장을 써서 가르침을 주고 주위의 사람들은 보지 않게 해서 저의 죄가 퍼지지 않게 해 주시면 크게 다행스런 일일 것입니다. 천만번 헤아려 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저는 천성이 막혀 있고 식견이 어두워 하나를 듣고서 반우(反隅)하지 못하여, 지난날 문하께서 가르쳐 주려고 서두를 꺼낼 적마다 더 말씀해 주시기를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뒤 물러나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야 비로소 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것을 일러 주려고 간절히 가리켜 보여 주신 점이 있음을 깨닫고 항상 자책하곤 하였습니다.

 

지금 다행히 하교해 주신다면 이런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 양면을 다 상세하게 밝혀 주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경자년(1660, 현종 1)

 

-삼가 종이 끝에 써 보내 주신 서신을 받고 말씀한 뜻을 살펴보니 한없이 위로가 됩니다. 성상께서 살피심이 매우 밝아 간사한 무리들이 모두 흩어졌으니 사문(斯文)의 행운일 뿐만 아니라 실로 사직(社稷)의 복입니다.

 

더구나 춘옹(春翁)과 집사는 우옹(尤翁)과 입장이 다르지 않은 듯하니 성상께서 부르는 하명이 내려왔을 때 한 번 상소하여 혐의를 피하는 일은 없을 수 없겠으나 끝내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는 일은 아마도 적당한 구실이 없을 듯합니다. 저의 참람한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는데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영남의 상소는 이미 성상께서 살피고 배척하셨으니 그것에 대하여 해명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은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합니다만 유학자들이 논의를 이미 시작한지라 중지할 수 없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상소에는 전후의 여러 가지 설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므로 한 번 논파하는 것도 또한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이곳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글쓰기를 어렵게 여겨서 저에게 부탁하나 움츠린 채 지내야 하는 저의 처지로서는 밖의 일에 가볍게 참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문(師門)과 관계되고 또 자신의 일로 집에서 상소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기에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졸렬하게 엮어 보았습니다만 식견이 미치지 못하고 필력이 없어 여러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 후세에 전하기에 부족하니, 이것이 두렵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또한 이 일은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기에 여러 선생님께 두루 정정을 부탁드리지 않을 수 없어 이렇게 글을 보내 드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한 번 자세히 살펴보고 타당하지 않은 곳과 분명하지 않은 곳과 착오가 있는 곳과 첨삭해야 할 곳 등이 있으면 하나하나 상세하게 가르쳐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병오년(1666, 현종 7) 4월 4일-


말씀하신 뜻을 삼가 이미 받들었고 가르쳐 준 대로 고쳐서 유군(柳君) 편에 보내드리니 이는 다시 정정해 주는 가르침을 받들고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일은 다만 의리를 분별하여 바로잡고 거짓을 명확하게 밝히고 큰 줄거리를 들어 설명하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

 

한 터럭만큼이라도 비교할 생각을 한다면 그 비교하려는 자신이 욕될 뿐이기 때문에 악을 미워하는 뜻을 극렬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유생들이 올리는 상소는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여기시는지요?

 

이른바 ‘의논하는 자〔議者〕’는 허목(許穆)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이에 대한 설은 대개 세 부류가 있으니, 하나는 주소(註疏)에 대해 논의한 것이고, 하나는 잘못된 풍속에 근거한 것이고, 하나는 예설(禮說)을 빙자하여 멋대로 참소하고 해치는 것입니다. 비록 그 마음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지만, 의논에 대해서는 사실상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를 분별하여 논파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른바 ‘약간인(若干人)’이라는 말속에는 포함된 자가 많으니 꼭 누구누구라고 지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의자(議者)’ 두 글자를 첨가하지는 않더라도 그쪽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 들어갈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 외의 것은 모두 찌를 붙여 가르쳐주신 대로 고쳤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다시 상세히 살펴보고 직접 첨삭하여 유군에게 주셨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4월 6일-


근래 죽림서원(竹林書院) 유생들의 모임에서 선친을 위해 사당을 세우려고 발의했다고 하니, 이미 이 소식을 들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선친께서는 평소에 사도(師道)로써 자처하지 않으셨는데 이런 논의를 갑자기 시작하니 상중에 있는 저는 놀랍고 두려움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설령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서 이의를 가진 사람이 없다고 해도 선친께서는 선정(先正)이신 신재(愼齋)와 포저(浦渚) 선생 등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대해서 모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기다린 뒤에 추진하자고 주장하였지 수년 이내에 서둘러 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이번에 가벼이 발의한 것은 실로 평소 선친의 뜻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또 통문의 글도 생각 없이 쓴 것이니 기롱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일은 지극히 고민스럽습니다. 진사(進士) 유항(柳沆)이 실질적으로 이 일을 주관하였으며 글도 그가 손수 지은 것이라고 하니, 그의 생각 없음이 이러할 줄은 몰랐습니다.

 

삼가 문하께서는 선친의 평소 마음에 대하여 익히 알고 계실 것이니, 혹시 강론하실 때에 한 말씀 분명하게 해 주어 선친의 평소 뜻을 본받고 중대한 일을 신중하게 행하도록 하여 논의가 진정되어 잘못이 생기지 않게 하면 유명(幽明) 간에 모두 다행일 것입니다. 천만번 헤아려 주시기를 눈물 흘리며 바랍니다.

-기유년(1669, 현종 10)-


선친의 묘표(墓表)에 대해 말씀드리면 용서(龍西) 당숙이 저의 숙부와 함께 초안한 것입니다.

묘갈명(墓碣銘)은 우암(尤庵) 선생님께 청하고자 하나 묘비 뒷면에 기술하는 글은 묘갈명에 비해 부담이 적기 때문에 두 숙부가 함께 글을 지어서 슬픈 회포를 담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에 초고를 질정 받고자 하오니 삼가 헤아려 가르쳐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선친의 서찰이 혹 책상 밑에 남은 것이 있는지 시사(侍史)로 하여금 찾아 보내도록 해 주십시오.

바야흐로 유문(遺文)을 모으려고 하나, 몇 편의 긴 글 밖에는 남은 원고가 없어서 감히 이렇게 번거롭게 말씀드립니다만 슬프고 송구합니다. -경술년(1670, 현종 11)-


근래에 어지러이 떠도는 말에 대해 모두 들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처음에는 좌하(座下)를 한번 직접 찾아뵙고 한두 가지 호소하려 하였으나 이번에도 움직일 수 없어 답답하고 울적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에 감히 이렇게 편지로 대신 말씀드리니 삼가 바라건대 불쌍히 살피고 가르침을 주십시오.

당초에 우옹(尤翁)께서 인용한 문하의 말씀에 대해서 처음부터 감히 문하를 의심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옹께서 좌하가 평소에 일시적으로 한 한가로운 말을 이제 와서 들추어내어 오래 끌고 갈 논란거리의 구실로 삼으신 것이 매우 개탄스럽고, 선친의 묘갈명 내용으로 인하여 몇 번 편지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봄여름 사이에 두세 번 편지를 주고받았을 뿐이니, 그것 말고는 실로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근거 없는 말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어 심지어 문하께서 여기의 여러 젊은이들이 문하를 비판한 일로 인해 죄를 받았다고 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여기의 여러 젊은이들이 비록 지극히 무식하기는 하나 그래도 한집안의 부형들이 형제의 의리를 평생토록 돈독히 지키는 대상은 오직 여러 선생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유감이 있을지라도 어찌 비방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감히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차마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전하는 문하의 말씀이 또한 와전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말을 전해 들었기에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갑인년(1674, 현종 15)-


우옹께서 서행(西行)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곧바로 찾아가 문안을 여쭈려고 하였으나 병든 데다가 하인마저 없어서 아직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죄송한 나머지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삼가 갈산(葛山)에서 내려 주신 서신을 보고 비로소 문하께서도 앞으로 나아가 성상의 명을 기다리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당초 저의 생각은 두 선생님께서 마땅히 스스로의 뜻을 지키며 삼가고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면 의에 있어서 온당하지 못한 점이 있는지요?

 

이번 일이 실로 뜻밖에 이런 지경까지 이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하신 말씀 가운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자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맹자(孟子)가 진실로 하늘의 뜻임을 알기는 하였지만 어찌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장씨(臧氏)의 아들을 허물하지 않게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한 것은, 매우 시대를 근심하는 말씀이시니 몹시 개탄스럽습니다.

밝으신 성상의 시대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어 집에서 근심하며 밤이 깊도록 고민하고 있습니다.

편지 끝에 또 근심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왕래가 뜸한 가운데 질병과 날마다 짝하고 있어 찾아가 잠시라도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편에 부쳐 안부를 여쭈다 보니, 저의 생각을 다 쓰지는 못하였습니다.

-갑인년(1674, 현종 15) -


제 아우가 가르침을 받고 돌아온 즉시 감사와 공경의 뜻을 담은 글을 써서 갈산(葛山)으로 가는 인편에 부쳤는데, 이번에 내려 주신 글 중에 받았다는 말씀이 없으시니 아직도 편지가 도달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삼가 수양하시는 도체가 새해를 맞아 더욱 건승함을 알고는 구구하게 우러르는 마음 한이 없습니다.

 

조심스레 경외하는 성심을 보존하고 태연하게 사사로움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바로 옛사람들이 우환에 대처하던 도입니다. 편지 끝에 하신 말씀은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계산하여 행동하는 것에 관계되지는 않는지요?


불길이 날로 치성하니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데 하늘은 아직도 마음을 바꾸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새로 들려오는 소식마다 밤새도록 벽을 따라 돌며 근심하게 하고 있습니다. 마침 이러한 때에 저는 홀연히 성상의 부름을 받고 은혜를 거듭 입으니 움츠린 채 숨어 지내고는 사사로운 마음을 한 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오늘날 일을 저만 홀로 피할 수 없으니, 삼가 병오년(1666, 현종7)에 호서(湖西)에서 상소를 올린 일과 국상(國喪)에 나아가지 않은 일 등을 모두 갖추어 제 스스로를 탄핵하는 소를 올리고자 합니다. 황공하고 두려운 마음 두 배나 되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을묘년(1675, 숙종 1)-


얼마 전 돌아오는 인편에 보내 주신 서신을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깨우쳐 주시는 말씀이 마치 마주 대하고 듣는 것과 차이가 없는데, 별지에 하신 말씀은 더욱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기에 감격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선친께서 평소에 여러 선생님들께 정성을 다한 것이 저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가려지는 바가 있을까 늘 근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뜻이 여기까지 이르니 불초한 저로서는 감당할 수 없으나 유명(幽明) 간의 인정과 의리가 후세에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구구한 저의 감격스런 마음을 다 드러낼 말이 없습니다. 근래 차가운 봄 날씨에 조용히 기거하시는 도체가 늘 평안한지요? 우옹(尤翁)께서는 이미 고개를 넘어 유배지에 도착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김화(金化)를 지난 이후로는 안부를 듣지 못하여 북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만 할 뿐입니다. 문하께서 당하신 일은 우옹과 경중은 다르지만 사람들의 헐뜯음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으니 임금의 뜻이 마침내 어떠한지를 모르겠습니다.

 

근래에는 또 소식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옹이 남긴 글에 “시론이 장차 크게 일어날 것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앞으로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지경에 이른 지금으로서는 다만 저 푸른 하늘만 믿을 뿐 또 어찌하겠습니까.


저는 하찮은 병으로 아직 떨치고 일어날 기약을 할 수 없어서, 한 번 나아가 가르침을 받고 이런 근심과 걱정을 풀어 보고 싶지만 움직일 방법이 없습니다. 문을 닫아걸고 지내며 사람의 도리를 못 하고 있으니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을묘년(1675, 숙종1)-


저의 망녕된 행실에 대하여 이제 와서 말을 해 봐야 소용이 없게 되었으니, 부모님께 효성이 독실하지 못하였고 사문(師門)에도 정성을 다하지 못하여 끝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후세에 죄를 지었습니다. 중간에서 떠도는 말이 지금까지 끝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저 스스로 돌아보며 슬퍼하고 문을 닫아걸고서 죽기만을 기다리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제 생각을 갑자기 다 늘어놓을 수가 없으니 오직 조만간 한 번 직접 뵙고 가르침 받으며 저의 심정을 드러내게 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다만 사문과 거리가 너무 멀어 한 번 말씀드릴 길이 없으니 근심을 가슴속에 담아 두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번 생(甥) 등의 편에 부친 편지를 받고서 삼가 지난 19일에 그곳에 도달하셨으며 후덥지근한 장마철에 긴 여정임에도 평소처럼 별 탈 없으심을 알고는 구구한 마음 위로가 되며 멀리에서 사모하는 정성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때 친구인 박태로(朴台老)가 일신(日新)의 객사에 나아가 뵙고 돌아와 배소(配所)의 상황을 자못 상세하게 알고는 속으로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박태로가 말하기를, 그곳의 풍토가 심하게 나쁜 것은 아니며 그래도 서쪽 방면 중에서는 좋은 곳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들은 대로인지 모르겠습니다. 시론(時論)이 흉흉하여 나오는 논의마다 새로운 것들이라 모두들 극한까지 가야 멈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근래 열흘 동안에 다시 들리는 바가 없으니 아마도 우리 밝으신 성상께서 혹시 그 거짓됨을 굽어 살핀 것은 아닌지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축원하는 바는 다만 이것뿐입니다. 저는 지난번 종형을 장송하고 돌아와서는 피로함이 갑자기 심해져 일어날 수 없을 듯합니다.

 

뜻밖의 재앙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가운데 저만 홀로 요행히 모면하여 누추한 집에서 별 탈 없이 지내고 있었으니, 어쩌면 이수(二竪)가 이 점을 미워하여 일부러 찾아와 괴롭히며 떠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날마다 정신이 혼몽하여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듣자니 남의 잘못을 들추어 관에 고발하는 길이 열려 시골의 무지한 무리들이 다른 사람과 적대시 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주부(主簿)로 있는 영윤(令胤)이 사람들의 구설에 가장 많이 오른다고 하니 장차 다가올 액운 또한 알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언행을 조심하고 변론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옛사람이 비방을 받을 때 대처한 방법입니다.

하물며 지금 같은 시절에는 두려워하며 언행을 조심하고 살피는 것을 평소보다 열 배나 힘써야 될 것입니다.

 

이미 지난 일은 비록 어쩔 수 없으나 뒷일을 잘 수습하기 위한 방책에 더욱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답서에서 이 점에 대해 더욱 절실하게 주의를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인편을 빌어 인사를 차리면서 저의 생각을 참람되게 말씀드렸습니다. 이 외의 세세한 일은 편지에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을묘년(1675, 숙종 1)-


산천이 아득히 멀어 편지를 전할 인편이 거의 없는 까닭에 안부를 여쭙는 것을 때맞춰 할 수 없기에 다만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에 아침저녁으로 간절히 그리워할 뿐입니다. 홀연히 8월 18일에 보내 주신 편지를 받고 저도 모르게 놀라 일어나서 급히 읽으니 마치 얼굴을 마주 대한 듯하였습니다.

 

삼가 차가운 가을 날씨에 객지에서 기거하며 때에 맞게 존체를 보중하심을 알고는 지극한 위로와 다행스러운 마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세월이 점점 흘러 국련(國練)이 어느새 지났습니다.

 

근심하며 지내시는 중에 창오(蒼梧)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배나 더 간절할 텐데 더구나 시대의 근심과 변방의 시끄러움이 언제 그칠지 모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임금을 사모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비단 초나라 나그네가 가을을 슬퍼한 것보다 더하실 것입니다.

 

편지 말미에 쓴 영결의 말씀에 슬픔과 근심이 가득한데, 이러한 것들에 마음이 움직이셨기 때문이었습니까? 세 번 거듭 반복하여 읽고는 우두커니 서서 길게 탄식하였습니다. 저는 문을 닫아걸고 구차하게 죽음을 모면한 채 오직 질병을 짝으로 삼아 지내고 있습니다.

 

장기(長鬐)는 이곳에서 겨우 7, 8일 거리인데도 직접 찾아갈 수가 없는데 하물며 아득히 먼 서쪽 변방이야 어떠하겠습니까. 하루 종일 집안에서만 지내느라 의지와 기개가 다 사라졌습니다.

 

옛날 사우(師友)들과 함께 어울렸던 즐거움을 추억하면 멍하니 다른 세상일 같으니, 어찌 탄식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어느 때에나 한번 가르침을 받으며 가슴속의 품은 생각을 활짝 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을묘년(1675, 숙종 1)-

 

삼양(三陽)이 되어 새해가 시작되었으니 멀리서나마 늘 평소같이 새해를 맞아 만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봉산(蓬山)에서는 소식이 계속 이어져 기거하시는 정황을 자주 들을 수 있지만 유독 서쪽 변방은 아득히 멀어 마치 외따로 떨어진 지역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모하는 정성이야 어느 때인들 덜하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하면 새해는 바로 회옹(晦翁)이 벼슬에서 물러난 해입니다. 천둥을 동반한 큰비가 제때에 내리고 어른께서 무고하시어 옛 고향 사람들로 하여금 평복 입은 고사를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어찌 우리들의 지극한 바람이 아니겠습니까. 우러러 축원하는 나머지 탄식이 그치지 않습니다.

 

지난 연말에 홀연히 듣기를 춘옹(春翁)의 문인들이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성상의 비답이 더욱 엄하셨으며, 심지어는 앞뒤의 대계(臺啓) 중에 있는 말을 거론하시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에 놀랍고 두려우며,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이변이 거듭 나타나고 나라 안팎이 두려워 움츠리고 있으니 이러한 상황에서는 다만 푸른 하늘만을 우러러보며 믿을 뿐 어찌하겠습니까. 저는 병든 몸에 나이만 더해 문을 닫아걸고 구차하게 죽음을 모면한 채 지내고 있으니 화숙(和叔)이 ‘집 안에 안치된 자’라고 한 말도 빈 말이 아닙니다.

 

살고자 하는 뜻은 사라지고 모든 일이 어긋나 멀어졌으니 옛날에 어울렸던 일이 아득히 꿈만 같습니다.

한밤중에도 잠들지 못하고 온갖 감회가 교차하며 모이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여, 마지(馬池)로 가는 인편을 빌려 멀리서나마 문안을 여쭙습니다. -병진년(1676, 숙종 2)-

 

여름에 보내 주신 편지를 늦가을이 되어서야 받으니 이른바 다른 세상의 소식을 듣는 것 같다는 말이 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삼가 객지에 잘 적응하여 평소처럼 지내면서 체력이 강건하심을 알게 되었으니 구구하게 우러러 위로된다는 말 밖에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말씀하신 뜻을 세 번 반복해서 읽고서, 감동과 개탄스러움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편지를 보내 주신 후 또 여러 달이 지나 박괘(剝卦)가 다 지나고 곤괘(坤卦)가 되어 얼음이 어는 추위가 이미 이르렀으니 영변(寧邊)의 산에는 이미 눈이 쌓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가 때에 맞게 존체를 보중하고 더욱 굳건하게 정양(靜養)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운 마음이 어느 때인들 끝나겠습니까.

 

저는 앓던 병이 고질이 되어 동면(冬眠)하는 벌레처럼 오래도록 움츠리고 쓸쓸히 혼자 지내다 보니 마음과 몸은 쇠잔해지고 뜻과 기운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옛날 사우(師友)들과 함께 어울려 노닐던 즐거움은 아득하여 다시 잇기 어렵고, 평생 쉼 없이 노력하더라도 다시 더 나아갈 희망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밤중에 스스로를 어루만지며 염려해도 누구와 말을 나누겠습니까.

지난번 편지에서 ‘전해 들었다’고 하신 말씀은 예설에 관한 한 가지 일을 가리킨 것인지요?

 

지난번에 진사(進士)인 영질(令姪)을 만나 대략 말했기에 이미 말씀을 들으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른을 모시고 한자리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으니, 혀를 끌끌 차기만 할 뿐입니다.

 

멀리 보내는 편지에 어찌 이 구구한 저의 정성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기거하심에 존체를 더 보중하여 성상의 큰 은혜를 입으실 때까지 강녕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병진년(1676, 숙종2)-

 

현함(賢咸) 두 상사(上舍)가 찾아와 9월 22일에 보내 주신 편지를 전해 주고 그간의 생활을 자세하게 말해 주니 저의 위로되는 마음을 무슨 말로 다 드러내겠습니까. 다만 현함이 떠나올 때 이미 눈이 쌓였다고 하니 지금 매서운 추위를 생각하면 흘간산(紇干山) 꼭대기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비록 운명인 듯 편안히 여기며 그 생활에 대해 기쁨과 슬픔을 두지 않는다고 하시나 70세에 타향에서 지내면서 또 두 번의 겨울을 보냈으니 생활하는 모든 것들이 실로 고통을 견디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매번 생각이 이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근심과 개탄이 교차합니다.

 

춘옹(春翁)의 산소를 옮기는 날을 이달 18일로 정했으며, 명정과 운불삽 등 여러 기물은 모두 사(士)의 예에 따랐습니다. 돌아가신 뒤에 해 드리는 온갖 일이 떠난 분에게 무엇을 손상시키겠습니까만 평소 임금을 사랑하던 충정을 가졌으나 임금의 총애를 입지 못하였으니 측은하고 애통하게 여깁니다.

 

멀리에서 올리는 편지에 어찌 저의 감회를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존체를 더욱 보중하시어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에 위로가 되어 주기를 축원합니다.

 

어린 생질들은 서로 어울려 글을 배우고 있는데 재주와 바탕이 다른 사람에 뒤지지 않으니 장래 어떤 성취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병진년(1676, 숙종 2)-


지난번 뜻밖에 삼가 인일(人日)에 주신 편지를 받고, 기거하시는 것이 점점 전과 같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70의 연세에 변방의 객사에서 이미 4년이나 지내셨으니 마음은 비록 형통하다 해도 몸은 험한 데 있어 기혈이 어찌 손상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구하게 근심스런 생각이 진실로 멈추지 않습니다. 근래 날씨가 따뜻해지니 때에 따라 만복을 누리시기를 바라며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이 더욱 간절합니다. 영손(令孫)들을 맡긴다고 하신 말씀은 저를 하찮게 여기지 않는 성대한 뜻임을 매우 잘 알고 있으므로 감동과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자신을 돌아보면 아는 것이 없고 비루하여 다른 사람에게 미칠 만한 것이 없으니 장차 정성스런 뜻에 부응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참담한 감회는 아직도 진정되지 못하고, 날마다 병든 아우와 마주보며 탄식만 할 뿐입니다.

 

어찌 하늘이 이렇게 비색(否塞)한 운수를 내려서 병들어 궁벽한 골짜기에서 움츠리고 지내는 처지에 오히려 유유자적하게 생활한 죄로 뜻밖의 재앙을 만나 이러한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형제에게 각자 두 아이가 있지만 그 아이가 가장 장래성이 있어 노년의 기대가 매우 컸는데 갑자기 죽게 되니 골육 간에 사별하는 슬픔뿐만이 아닙니다.

 

문하께서 계신 곳을 바라보면 아득하기만 할 뿐 적막한 물가로 한번 찾아뵙고 제 가슴속에 쌓인 회포를 펼 길이 없습니다. 존체를 보중하시어 먼 곳에 있는 저의 정성에 위안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무오년(1678, 숙종 4)-


듣자니 가까운 곳의 유생 가운데 선생님 댁을 출입하는 자들이 많다고 하는데 장래를 기대할 수 있는 자들이 있는지요? 근래 실질적인 데 힘을 쏟지 않는 것이 학자의 큰 문제점임을 더욱 깨달았습니다. 모름지기 먼저 진실한 근본이 있은 후에 내실을 채워 나갈 수 있고, 또 재능의 고하에 따라 성취하는 바도 있을 것입니다.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기미년(1679, 숙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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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초려(草廬) : 이유태(李惟泰>1607(선조 40)~1684(숙종 10)의 호(號)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태

           지(泰之),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예학(禮學)에 이름이 높았다.

[주01]백첨(伯瞻) : 이유태의 아들인 이옹(李顒)의 자(字)이다.

[주02]선왕이……뜻 : 효종이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세웠던 북벌 정책을 말한다.

[주03]전장(銓長) :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04]헌장(憲長) : 대사헌(大司憲)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05]문종(文種)과……것 : 문종과 범려(范蠡)는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을 도와 패자(覇者)가 되게 한 충신들

            이다. 구천이 오나라와 전쟁을 벌이다가 패하여 회계(會稽)에서 포위당한 채 멸망할 위기에 처는데, 이들

            이 ‘강화(講和)해 주면 월나라는 재산을 모두 바치고 신하가 되겠다.’는 조건을 오나라에 제시하여 멸망의 위

           기를 넘겼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주06]탄옹(炭翁) : 권시(權諰 : 1604~1672)의 호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이며, 명재(明齋)의 장인

            이다.


[주07]두 송공(宋公) : 송시열과 송준길을 가리킨다.

[주08]비방지목(誹謗之木) : 백성들이 정치의 잘못을 비판하는 말을 써 놓도록 길에다 세워 놓은 나무이다.

           옛날 순(舜) 임금이 이를 통해 정치의 잘못을 반성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呂氏春秋 自知》

 

[주09]몇 해……하시므로 : 정개청(鄭介淸 : 1529~1590)은 자가 의백(義伯), 호가 곤재(困齋)로, 호남의 명(名

            儒)로 알려져 여러 차례 유일(遺逸)로 천거되었던 인물인데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 때 연되어 유

            지에서 죽었다.  그 뒤에 신원되어 1616년(광해군8)에 그를 제사하는 서원이 건립되었데,1657년(효종

             8)에 송준길의 청에 따라 훼철 되었다.

 

            이에 정개청의 손자가 신원하려고 상소하였으나 정원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윤선도(尹善道)가  원의

            처사가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정개청의 일은 정원에서 상소를 반려한 일을 가리키고, 권(權諰)의 말

            은 윤선도가 정당한 비판을 했다는 뜻이다.

         《孝宗實錄 8年 9月 25日, 9年 4月 6日ㆍ7日》

 

[주10]공문중(孔文仲)같이……하더라도 : 공문중은 송나라의 문신으로, 자는 경보(經父)이다.

            젊어서 정이(程頤) 등을 비난하였으나 후에 소인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피토하고

           죽었다. 《宋史紀事本末 卷10 洛蜀黨議》

 

[주11]세한(歲寒) : 군자의 변하지 않는 굳은 절의를 나타내는 말로,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12]남곤(南袞) : 1471~1527.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사화(士華), 호는 지정(止亭)으로,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를 일으켜 사림을 축출한 핵심 인물이다.

[주13]심정(沈貞) : 1471~153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으로, 기묘사화를 일으

           킨 핵심 인물이다.

[주14]유종룡(柳從龍) : 1485~1528. 종룡은 유운(柳雲)의 자이다. 호는 항재(恒齋)이고, 본관은 문화(文化),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기묘사화 뒤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광조(趙光祖) 등을 구원하다가 파직당 였다.

        《中宗實錄 14年 11月 7日ㆍ18日ㆍ25日》

[주15]이희순(李希醇) : 희순은 이계맹(李繼孟 : 1458~1523)의 자이다.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묵곡(墨谷)ㆍ묵암(墨巖).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기묘사화 뒤에 찬성(贊成)

           리에 올랐으나 사림들을 해치는 것은 불가하다고 주장하여 배척을 당하였다.

        《中宗實錄 18年 2月 28日》《燃藜室記述 卷8 乙卯黨籍》

 

[주16]사성(思誠) : 권시(權諰 : 1604~1672)의 자로,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탄옹(炭翁)이며, 명재(明齋)의 장인

           이다.

[주17]회옹(晦翁) :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朱熹 : 1130〜1200)의 호가 회암(晦庵)이기 때문에 이렇게 일컬은 것이

           다.

[주18]반우(反隅) : 유추한다는 뜻으로, 《논어》〈술이(述而)〉에 “한 귀퉁이를 들어주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은 세 귀퉁이를 알아내지 못하면 다시 더 일러주지 말아야 한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주19]춘옹(春翁) : 준길(宋浚吉 : 1606~1672)을 가리킨다. 본관은 은진, 자는 명보(明甫), 시호는 문정(文正)으

           로, 이이ㆍ김장생의 문인이다.

[주20]허목(許穆) : 1592~1682.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자는 문보(文父)ㆍ화보(和父), 호는 미수(眉叟)ㆍ대령노

           인(臺嶺老人)이다. 여기서는 기해복제(己亥服制)와 관련된 논란 등을 말하는 것인 듯하다.

[주21]죽림서원(竹林書院) : 1626년(인조4)에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

            기 위하여 건립한 황산사(黃山祠)를 1665년(현종6)에 죽림서원으로 사액하고 조광조(趙光祖)ㆍ황(李

            滉)을 더 모셨다.

[주22]신재(愼齋) : 김집(金集 : 1574~1656)의 호인 신독재(愼獨齋)를 줄여서 일컬은 말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강(士剛),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주23]포저(浦渚) : 조익(趙翼 : 1579~1655)의 호이다. 자는 비경(飛卿), 본관은 풍양(豐壤), 시호는 문효(文孝)이

           다.

[주24]용서(龍西) : 명재의 당숙인 윤원거(尹元擧)의 호이다.

[주25]시사(侍史) : 문서를 관장하는 사람을 뜻한다.

[주26]우옹께서 서행(西行)하셨다는 소식 : 갑인년(1674) 2월에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가 승하하

            였는데, 복상(服喪) 기간을 정하는 문제로 송시열이 수원(水原) 만의사(萬義寺)에 나가 대죄일을 말한다.

         《宋子大全附錄 卷7 年譜, 韓國文集叢刊 115輯》

[주27]갈산(葛山) : 충청도 전의(全義)를 가리킨다.

[주28]문하께서도……계심 : 갑인년(1674) 2월에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하였는데, 복상 기간을 정하는 문

            제로 이유태(李惟泰)가 충청도 전의(全義)에 있는 비암사(飛庵寺)에 나가 대죄한 일을 말한다.

         《草廬集 草廬先生年譜 卷4, 韓國文集叢刊 118輯》

[주29]장씨(臧氏)의 아들 : 노나라 폐인(嬖人) 장창(臧倉)을 가리킨다. 맹자가 노나라 평공(平公)을 만나려고

            때 장창이 평공을 만류하여 만나지 못하게 되자 맹자는 “내가 노나라 임금을 만나지 못함은 하늘의 뜻이다.

            장씨의 아들이 어찌 나로 하여금 만나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孟子梁惠王下》

 

[주30]병오년에……일 : 1666년 4월에 충청도 유생을 대신하여 예(禮)를 논하는 소를 지은 일을 말한다. 《顯

            宗實錄 7年 4月 19日》《明齋遺稿 卷31 代湖西儒生論禮疏, 韓國文集叢刊 136輯》

 

[주31]김화(金化) : 1675년(숙종1)에 송시열(宋時烈)이 함경도 덕원부(德源府)로 유배 갈 때 지났던 강원도

            인 김화현이다.

[주32]생(甥) : 사위인지 생질인지 알 수 없어 원문대로 옮겨 두었다.

[주33]그곳 : 1675년(숙종1) 5월에 이유태가 양사(兩司)의 논계를 받고 유배 간 평안도 영변(寧邊)을 가리

            킨다. 《肅宗實錄 1年 5月 26日》

[주34]이수(二竪) : 고칠 수 없는 질병을 뜻하는 말로,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10년에 “진 경공(晉景公)이

            병이 심하여 완(緩)이라는 의사를 맞이하여 치료하려고 하였는데, 전날 밤에 꿈을 꾸니 그 병이 두이〔二

           竪〕로 변하여 말하기를, ‘저 사람은 훌륭한 의사이니 우리를 해칠까 두렵다.

 

          어디로 숨을까?’ 하니 그중 한 아이가 말하길, ‘황(肓)의 위, 고(膏)의 아래에 있으면 우리를 어찌하는가?’라

         고 하였다.  의사가 이르러 ‘이 병은 고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라는 구절에서 온 말다.

 

[주35]국련(國練) : 국상(國喪)이 지난 지 1년 만에 지내는 소상을 말한다. 현종이 갑인년(1674) 8월 18일에 승하

           하였으므로 이해에 소상을 치른 것이다.

[주36]창오(蒼梧)를 그리워하는 마음 : 창오는 중국 순(舜) 임금이 승하한 곳으로, 여기서는 돌아가신 선왕을 그리

            워한다는 뜻이다.

[주37]초나라……것 : 초나라 나그네는 초나라 시인 송옥(宋玉)을 말한다. 그가 지은 《초사(楚辭)》〈구변(九

            辯)〉은 굴원(屈原)이 충신이면서 쫓겨난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내용인데, 그중에 “슬프도다, 가을의 기운

            이여. 처량하구나, 초목이 시들어 어짐이여.〔悲哉 秋之爲氣也 蕭瑟兮 草木摇落而變衰〕”라고 하다.

 

[주38]장기(長鬐) : 당시 송시열이 유배 간 곳이다. 송시열은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를 위해 자의대비(慈懿大

            妃)가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실각당하고 1675년 1월에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유배되

           었는데, 같은 해 5월에 청주(淸州) 유생 유필명(柳弼明)이 송시열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려 물의를 일으키자

          장기(瘴氣)가 있어 생활 여건이 더 열악한 경상도 웅천(熊川)으로 이배(移配) 뻔하다가 죽음을 면하게 해

          주라는 허적(許積)의 건의로 경상도 장기에 이배되었다.

        《肅宗實錄 1年 1月 13日, 閏5月 15日ㆍ17日》

 

[주39]삼양(三陽) : 주역》의 〈태괘(泰卦)〉에서 온 말로, 음력 정월을 뜻한다.

[주40]봉산(蓬山) : 1675년 6월 이후 송시열이 유배 가 있던 경상도 장기(長鬐)의 이칭이다.

[주41]서쪽 변방 : 이유태(李惟泰)가 유배 간 평안도 영변(寧邊)을 가리킨다.

 

[주42]새해는……해입니다 : 회옹(晦翁)은 송나라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주희가 사직을 청하여 체직된, 1196년

           의 간지가 이해와 같은 병진(丙辰)이므로 한 말이다. 《勉齋集 卷36 朝奉大夫……朱先生行狀》

 

[주43]천둥을……내리고 : 임금이 대오각성하여 사면(赦免)의 은전을 내린다는 뜻이다.


[주44]평복 입은 고사 : 송나라 주희가 관작에서 완전히 물러난 다음 날마다 생도들과 함께 죽림정사(竹林精舍)에

           서 강학한 일을 가리킨다. 《勉齋集 卷36 朝奉大夫……朱先生行狀》

 

[주45]대계(臺啓) : 사헌부, 사간원의 관리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계사(啓辭)를 뜻한다.

[주46]화숙(和叔) : 박세채(朴世采 : 1631~1695)의 자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현석(玄石)ㆍ남계(南溪), 시

            호는 문순(文純)이다.


[주47]마지(馬池) : 압록강을 마자(馬呰), 마자(馬訾), 마자하(馬呰呰), 마자수(馬訾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압록강을 가리키는 듯하다. 《국역연려실기술 별집 제19권 동국의 지방을 논하다》《국역신증동국여지승

            람 제53권 의주목》


[주48]박괘(剝卦)가……되어 : 두 《주역》의 괘 이름으로, 박괘는 1년 중 9월에 해당하고, 곤괘(坤卦)는 1년

            10월에 해당하므로, 9월이 가고 10월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49]현함(賢咸) : 남의 조카를 높여서 일컫는 말이다. 중국 진(晉)나라 때 죽림(竹林)에 모여 혼탁한 세상을 개탄

            하고 노장(老莊)을 숭상하며 술과 바둑으로 세월을 보낸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완함(阮咸)이 완적(阮

            籍)의 조카였으므로 생긴 말이다.

[주50]두 상사(上舍) : 상사는 조선 시대 성균관의 유생으로서 생원시(生員試)나 진사시(進仕試)에 합격한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초려 이유태의 두 조카를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주51]흘간산(紇干山) : 중국 산서성(山西省) 대동시(大同市)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 흘건산(紇乾山), 흘진산(紇

            眞山)이라고도 한다. 이 산 정상에는 여름에도 늘 눈이 쌓여 있을 정도로 춥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45 紇乾山》


[주52]운불삽 : 발인 때 상여의 앞뒤에 세우고 가는 운삽과 불삽이다. 원래는 깃으로 만들었으나 후세에 네모진 널

            판에 길이 다섯 자의 자루가 있고 깃털을 장식하였다.

 

[주53]인일(人日) : 정월 초이레를 일컫는 말이다.

 

[주54]병든 아우 : 윤추(尹推)를 가리킨다.

[주55]그 아이 : 윤추의 둘째 아들 윤가교(尹可敎)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