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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옛지명(金海舊地名)

야촌(1) 2010. 8. 16. 11:51

■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용재 성현 저[慵齊 成俔 著 (1439(세종 21~1504(태종 5)]

 

동쪽으로 양산군(梁山郡) 경계까지 42리이고 남쪽으로 웅천현(熊川縣) 경계까지 40리이며, 서쪽으로 창원부(昌原府) 경계까지 44리이고 북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44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4리이다.


[건치연혁]

 

가락국(駕洛國)이다. 혹 가야(伽倻)라 하기도 하였는데 뒤에 금관국(金官國)이라 고쳤다. 시조(始祖) 김수로왕(金首露王)으로부터 구해왕(仇亥王)까지 무릇 10대, 4백 91년을 왕국으로 내려왔다. 구해왕이 신라에게 항복하니 법흥왕(法興王)이 객으로 예대(禮待)하고 그 나라를 읍으로 만들어서 금관군(金官郡)이라 불렀다.

 

문무왕(文武王)이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그대로 소경(小京)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는 부로 강등시켰고 그 뒤에 또 임해현(臨海縣)으로 강등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서 군으로 승격시켰다. 성종(成宗)이 금주 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라 고쳤고 현종(顯宗)은 방어사(防禦使)로 강등시켰다.

 

원종(元宗)은 방어사 김훤(金晅)이 밀성(密城)의 반란을 평정하고 또 삼별초(三別草)를 막아낸 공이 있다는 이유로 금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김훤을 발탁하여 도호로 삼아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2년에는 안렴사(按廉使) 유호(劉顥)를 죽였기 때문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뒤에 다시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을 가려내면서 다시 김해부로 만들었으며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태종조(太宗祖)에 도호부라 고쳤고, 세조조(世祖朝)에서 진(鎭)을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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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 성(城)이 있다.

 

가락국(駕洛國)이니 혹은 가야(伽倻)라고도 일컬었다.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신라 때에 금관군을 두었으며 뒤에 소경을 두었고, 다시 김해라 고쳤다.

 

고려 태조 때 낮추어 부로 하였다가 뒤에 낮추어 임해현(臨海縣)으로 하였다. 

군으로 올렸다가 금주(金州)로 고쳤고 금녕부(金寧府)ㆍ금주목(金州牧)으로 올렸는데 다시 김해부로 하였다.

 

◈분성(盆城)이라고도 한다.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4리이다.

 

[참고문헌]

세종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김해 도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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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도호부(金海都護府)


본디 가락국(駕洛國)인데, 후한(後漢) 광무 황제(光武皇帝) 건무(建武) 18년 임인에 가락(駕洛)의 장(長)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 등 아홉 사람이 그 백성을 거느리고 계음(禊飮: 유둣날에 액운을 떨어 버리기 위하여 물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먹고 마시고 노는 일)하다가 구지봉(龜旨峯)을 바라보니, 이상한 성기(聲氣)가 있기에 가서 보았더니, 금합(金榼)이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 속에 둥글기가 일륜(日輪)과 같은 금빛 알[金色卵]이 있었다.

 

아홉 사람이 절을 하고 신령스럽게 여겨 아도간의 집에 봉치(奉置)하고 이튿날 아홉 사람이 함께 모여서 합(榼)을 열고보니, 한 아이가 껍데기를 벗고 나왔는데 나이는 열 다섯 살 가량 될 만하고, 용모가 매우 잘 났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모두 배하(拜賀)의 예(禮)를 다하였다.

 

아이가 날마다 크고 뛰어나서 10여일이 지나매 신장(身長)이 9척이었다. 그달 보름날에 아홉 사람이 마침내 받들어서 임금을 삼으니,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나라 이름을 가락(駕洛), 또는 가야(伽倻)로 일컫다가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 황산강(黃山江)에 이르고, 동북쪽으로 가야산(伽倻山)에 이르며, 서남쪽은 큰 바다에 닿았고, 서북쪽은 지리산을 경계로 하였다. 

 

즉위(卽位)한 지 1백 58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 기묘에 죽고, 9대손 구해왕(仇亥王)에 이르러, 양 무제(梁武帝) 대통(大通) 4년 임자에 국탕(國帑)과 보물(寶物)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수로왕으로부터 구충(仇衝)이 나라를 두기까지 무릇 4백 91년이다.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이미 구해(仇亥)의 항복을 받아 객례(客禮)로써 대접하고, 그 나라를 식읍(食邑)으로 삼고, 이름을 금관군(金官郡)으로 하였는데, 문무왕(文武王)이 비로소 금관 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고, 경덕왕(景德王)이 김해 소경(金海小京)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 23년 경자에 김해부(金海府)로 고쳤다.

 

뒤에 낮추어서 임해현(臨海縣)으로 하였다가 또 올려서 군(郡)으로 하였고,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금주 안동 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로 고치고, 현종(顯宗) 3년 임자에 낮추어서 금주 방어사(金州防禦使)로 삼았다.

 

원종(元宗) 11년 경오에 방어사(防禦使) 김훤(金晅)이 밀성(密城)의 난(亂)을 평정하고, 또 삼별초(三別抄)를 막아 공(功)이 있는 까닭으로, 올려서 금녕 도호부(金寧都護府)로 하고, 인해 김훤을 발탁하여 도호(都護)로 삼아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 금주목(金州牧)으로 올렸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에 여러 목(牧)을 없앰에 따라 다시 김해부(金海府)로 하였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속현(屬縣)이 2니, 웅신현(熊神縣)은 본디 웅지현(熊只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가, 〈고려〉 현종 무오년에 금주(金州) 임내로 붙였다.

 

완포현(莞浦縣)은 본디 고려의 완포향(莞浦鄕)인데, 뒤에 현(縣)으로 고쳤다. 

부곡(部曲)이 2이니, 대산(大山)과 천읍(川邑)이다. 분산(盆山)은 부(府) 북쪽에 있고,  「부(府)의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삼고 있다.」 신어산(神魚山)은 부(府) 동쪽에 있다. 대천(大川)은 뇌진(磊津)이다.

 

「낙동강 하류인데, 부(府) 북쪽 지경으로 들어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지금의 이름은 해양강(海陽江)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양산(梁山)에 이르기 32리, 서쪽으로 창원(昌原)에 이르기 58리,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6리, 북쪽으로 밀양(密陽)에 이르기 32리이다.

 

[참고문헌]

용재총화(慵齊叢話) 제8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