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집두(李集斗)/익재공후 화곡공파

야촌(1) 2010. 9. 1. 13:54

■ 34世 이집두(李集斗)

 

   [생졸년] 1744년(영조 20) 3월 23일생 ∼ 1820년(순조 20) 12월 30일졸

   [문과] 영조(英祖) 51년(1775) 을미(乙未) 정시2(庭試) 병과(丙科) 5위.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50년(177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32위/100명

-------------------------------------------------------------------------------------------------------------------------------------

조선 후기의 문관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중휘(仲輝), 호(號)는 파서(琶西) 또는 구학(臞鶴). 좌의정(左議政) 경억(慶億)의 현손으로, 서사 감역(筮仕監役) 진원(進源)의 아들이다.

 

1774년(영조 50)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그 뒤 이조좌랑(吏曹佐郞-正六品)·장령(掌令)· 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 대사성(大司成 : 正三品)· 승지(承旨-正三品)를 거쳐, 강릉현감(江陵縣監-從六品)이 되었을 때는 상소하여 해폐(海弊)· 군폐(軍弊)· 세폐(稅弊)· 삼폐(蔘弊) 등 네가지 읍폐(邑弊)를 들고 그 시정을 건의하였다.

 

이어대사간(大司諫 : 正三品) · 대사헌(大司憲 : 從二品) 과 외직으로 안동부사, 1798년(정조 22)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從二品)가 되어 변방의 야인을 잘 다스렸고, 1800년(정조 24, 순조 즉위)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순조가 즉위하자 한성판윤(漢城判尹-正二品), 공조판서(工曹判書 : 正二品)· 예조판서(禮曹判書 : 正二品)가 되고, 1810년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 從一品)로 치사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당대 글씨로 유명했다. 경주이씨 시조 탄강 유허비(始祖 誕降 遺墟碑) 및 구강서원 강당기(龜岡書院 講堂記)도 선생의 글씨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慶州李氏金石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