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병(李炳) - 국당공후 월성부원군공파

야촌(1) 2010. 8. 30. 02:13

■ 27世 이병(李炳)

 

   [생졸년] 1646년(인조 24)∼1694년(숙종 20).

  [생원진사시] 숙종(肅宗) 13년(168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55위/42歲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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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유생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문우(文雨).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란(鸞)의 현손으로, 정언(正言) 익(瀷)의 손자이며,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 인실(仁實)의 아들로 광주(廣州)에서 출생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난 뒤 이현령(李玄齡) 등의 상소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문묘에서 출향(黜享)되자 그해 3월에 진사로서 유봉휘(柳鳳輝)· 이사중(李師中) 등의 뒤를 이어, 경기유생 200여명을 이끌고 소두(疏頭)가 되어 대궐 앞에 엎드려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출향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숙종(肅宗)의 노여움을 사서 단천(端川)으로 정배되었다가 그해 가을에 대한(大旱 : 큰 가뭄)으로 인하여 사면되었다.

유배가 풀린 뒤로는 세상에 뜻이 없어 아우 정(烶)과 함께 가솔(家率)을 모두 데리고 충주의 선롱(先壟)으로 이거하여 자제들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단천에 유배되었을 때에 지은 《부춘당북천록 富春堂北遷錄》이 있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富春堂北遷錄 

 

◎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년 숙종 15)

 

조선 숙종(肅宗)의 계비(繼妃) 민씨(閔氏)가 왕비로 책립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후사를 낳지 못하자, 숙종은 후궁인 숙원 장씨(淑媛張氏)를 총애하게 되었다. 그러자 장씨의 오라비 장희재(張希載)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겼는데, 조정에서는 이 일을 중요시하여 궁중의 내사(內事)까지 논간(論諫)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차에 장씨가 왕자 윤(昀)을 낳았다. 숙종은 윤(昀)을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때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정비(正妃) 민씨가 아직 나이 젊으므로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嫡子)로써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 하여 원자책봉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숙종대로 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하여 남인을 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기 뜻대로 정하고 숙원을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은 상소를 올려 숙종의 처사를 잘못이라고 간하였다.

 

숙종은 원자정호와 희빈 책봉이 이미 끝났는데, 한 나라의 원로 정치인이 상소질을 하여 정국(政局)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분개하던 차에 남인 이현기(李玄紀) 등이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이를 기화로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약(賜藥)을 내렸다.

 

송시열의 사사(賜死)로 된 서리를 맞은 서인은 이어서 김수흥(金壽興) ·김수항(金壽恒) 등의 거물 정치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파직되고, 또는 유배되어 서인은 조정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권대운(權大運) ·김덕원(金德遠) ·목래선(睦來善) ·여성제(呂聖齊) 등의 남인이 득세하였다. 이 환국(換局)의 여파로 민비는 폐출(廢黜)되고, 장희빈은 정비가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