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월재공 이인걸 묘갈명 병서(月齋公李仁傑墓碣銘幷序)-청호공파

야촌(1) 2010. 8. 23. 20:18

  贈嘉善大夫 兵曹參判 宣武原從功臣 月齋公 墓碣銘 幷序

(증가선대부 병조참판 선무원종공신 월재공 묘갈명 병서)

 

念昔執徐之難 湖南義士趙文烈高忠烈 抗義死節 百世之下使人 凜凜有生氣 時則有若月齋李公亦 同其心迹者也

옛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호남의 의사 조문렬(趙文烈 : 趙憲), 고충렬(高忠烈 : 高敬命)께서 의(義)로 항거하고 절개 지키다가 돌아가신 일을 생각하니 백세의 뒷날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늠름한 생기를 내게 해주는데 그 당시에 월재(月齋) 이공과 같은 분도 역시 그 분들과 같은 마음과 행적을 지닌 분이었다

 

公諱仁傑字英叔月齋其號也 慶州人新羅開國元臣諱謁平之後也 麗初諱金書戶部郎中子孫世襲簪組至 諱翮號悅軒常書左僕射 麗季有文定公諱瑱號東菴官至政丞 子諱齊賢號益齋諡文忠德行文章名重一世

공의 이름은 인걸(仁傑), 자는 영숙으로 월재는 그 분의 호였다. 경주이씨 인데 신라 개국원신인 알평(謁平)의 후손이시다. 고려 초의 금서(金書)라는 분은 호부랑중(戶部郎中)을 지냈는데 자손들이 세습해서 높은 벼슬에 올랐다. 이름이 핵(翮)이라는 분에 이르러서는 호(號)가 열헌(悅軒)인데 상서좌복야(常書左僕射)라는 벼슬을 지냈다.

 

고려 말엽에 문정공(文定公) 진(瑱)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호(號)는 동암(東菴)으로 벼슬은 정승(政丞)에 이르렀다. 그 분의 아들 이름은 제현(齊賢) 호(號)는 익재(益齋)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인데 덕행과 문장으로 이름이 한 세상에 무거웠다.

 

入本朝諱擔官參判 子諱暿號淸湖入爲吏議出爲嶺伯直筆抗言不饒權貴 贈吏判兩舘大提學

이씨 조선에 들어와서는 담(擔)이라는 분이 참판(參判) 벼슬을 지냈고 그 분의 아들 희(暿)는 호(號)가 청호(淸湖)인데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냈으며 직필로 항거하는 말을 올리며 권세있고 귀한 분들에게 굽히지 않았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양관(兩舘 :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을 증직 받았다.

 

子諱文煥副提學於公五世也 是生諱詳官縣監 生諱友夏號樵隱 早有志行己卯後遂屛居不出 生諱頊 生諱磻琦號湖巖武科宣傳官 自高陽三遷湖南之靈巖 有子公其季也 妣淑夫人陽川許氏應瑞女

그분의 아들 문환(文煥)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는데 공(公)에게는 五대 할아버지가 되신다.

 

이분이 상(詳)이라는 분을 낳아 현감(국조 문과방목에는 副正:종3품)을 지냈고 현감께서 낳은 우하(友夏)라는 분은 호(號)를 초은(樵隱)이라 했는데 어려서부터 지행(志行)이 있었지만 기묘사화(己卯士禍) 뒤로 끝내 집에 묻혀 살며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이 분이 욱(頊) 호(號)가 송은(松隱)이라는 분을 낳았고 이 분이 반기(磻琦)라는 분을 낳았는데 호(號)는 호암(湖巖)이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며 고양(高陽)으로 부터 세번이나 이사하여 호남의 영암(靈巖)으로 옮겼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공(公)은 그 막내였다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양천 허씨(陽川許氏) 응서(應瑞)라는 분의 딸이었다.

 

公明宗辛亥九月八日生 幼與凡兒異 丁母憂執禮如成人 旣冠聞將有邊警投筆業武中 萬曆戊子科初仕爲守門將 俄陞訓鍊判官 逮倭兵渡海滔釜山蹂東萊 列邑瓦解 人皆鳥獸寫 公告湖巖公曰

공(公)께서 명종 신해년(1551년) 9월 8일에 태어나셨는데 어렸을 때 보통 아이들과 달랐었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집례 하는 일에 어른처럼 하였다. 스무 살이 넘자 앞으로 변경이 있으리라는 것을 듣고는 붓을 던지고 무(武)에 업하여 만력 무자년(1588 선조 21)의 무과에 합격하였다.

 

첫 벼슬로 수문장(守門將)이 되었고 오래 않아 훈련판관(訓鍊判官)으로 승진하였는데 왜병(倭兵)이 바다를 건너 부산을 함락하고 동래를 유린하자 여러 고을이 와해되고 모든 사람들이 새나 짐승처럼 달아남에 미쳐서는 공(公)이 아버지 호암공(湖巖公)에게 고하기를

 

目今京都失守大駕播遷 臣子不可草間求活 但親老在堂情勢兩難 湖巖公曰 損生赴難卽 吾斷斷志也 而老未能焉 汝須促赴義陳 以成老父志 且汝兄在無吾以也

"눈 앞에 서울을 잃게 되고 임금을 모신 수레가 파천하는데 신하로서 초간에 묻혀 삶만을 구해서는 안대겠습니다.

 

다만 늙으신 어버이께서 집에 계시니 정세가 양난(兩難) 이구료" 라고 하니 호암공께서 "목숨을 바쳐 난리에 달려가는 것은 나의 변함없는 뜻이다. 그렇지만 늙어서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너는 모름지기 서둘러 의병의 진으로 달려가 늙은 아비의 뜻을 이루도록 하라 그리고 또 너의 형(兄)이 있으니 내 걱정은 말아라" 라고 하셨다.

 

遂辭親訣兄 率家僮隸權元帥幕下 商議戰守之策 元帥壯之署爲參佐 使領軍救列邑 頗多斬獲 癸巳權公爲本道伯 與兵使宣居怡 右水使申汝樑 北兵使田鳳紀等 勤王至幸州山城 是戰爲當時一大捷也

마침내 어버이와 형님을 결별하고 가동(家僮 : 집안 심부름을 하는 사내아이 종을 이르던 말)들을 거느리고 권원수(權元帥 : 權慄將軍) 막하에 예속되어 싸워서 지킬 방책을 의논하였는데 원수께서 장하게 여기고 참모로 도움을 주도록 서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여러 고을들을 구하도록 해주자 아주 많은 적의 목을 베어 왔다.

 

계사년(1593년 선조 26)에 권공께서 본도의 도백(道伯)이 되어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 우수사(右水使) 신여량(申汝樑). 북병사(北兵使) 전봉기(田鳳紀) 등과 더불어 근왕병(勤王兵)으로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이르렀는데 이 전투는 그 당시의 대첩(大捷)중의 하나였다.

 

公挺身賈勇 且衝賊陳大呼格鬪 矢心必死顧謂家僮曰 吾王臣也 死當不避 汝可收屍也 遂與趙汝忠 蔡宗海 咸德立諸公同日死之 家僮於積骸中尋屍 不得矢復 葬于郡北望湖亭後 內洞辰坐原

공(公)께서는 앞장서서 용맹을 다하고 또한 적진으로 충돌해 들어가 크게 소리 지으며 격투하였는데, 화살이 가슴을 뚫어 죽게 되자 가동(家僮)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 나는 왕신(王臣)이다. 죽더라도 마땅히 피해서는 안대는 것이니 너는 나의 시체를 거두어야 옳다" 라고 하고는 조여충(趙汝忠). 채종해(蔡宗海). 함덕립(咸德立) 등 여러 분들과 더불어 같은 날에 돌아가셨다.

 

가동(家僮)이 쌓여 있는 시체중에서 시신(屍身)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하고, 부득이 화살만 가지고 돌아와 영암(靈巖)의 북쪽 망호정(望湖亭)뒤 내동(內洞)의 진좌향(辰坐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後錄宣武原從勳二等 贈兵曹參判 配貞夫人長興張氏女 一男希規號鹿隱 生柱南有學行號望湖 壽通政贈兵參

뒷날에 선무원종훈 2등(宣武原從勳二等)에 록(錄)하였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장흥장씨(長興張氏)로 모(某)의 딸인데 희규(希規)라는 분을 낳아 호(號)는 녹은(鹿隱)이었다. 이분이 주남(柱南)이라는 분을 낳아 학행이 있었고 호(號)는 망호(號望)였는데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에 올라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증직 받았다.

 

五男廷亮武科贈工議 廷弼宣傳官以孝給復命旌 廷蔓廷贇廷河 女全義李泰馨武僉正 餘不錄

이분께서 다섯 아들을 낳았으니 정량(廷亮)은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증직 받고, 정필(廷弼)은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며 효자로서 다시 정문(旌門)을 세우라는 명을 받았으며 정만(廷蔓), 정빈(廷贇), 정하(廷河)라는 분들이었다. 딸은 전의인(全義人) 이태형(李泰馨)의 아내였는데 태형이라는 분은 무과에 합격하여 첨정(僉正)을 지냈는데 나머지 후손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嗚呼人之大倫有五 君父爲大於 此焉盡其職則餘可推矣 公之名旣登國乘而播野史 固不待區區後人之撰述 其所以成就一箇是者實 由文忠之貽謨有自 而公又善繼之

오호(嗚呼) 사람에게는 대륜(大倫)이 다섯가지가 있는데 임금과 아버지에 대한 일이 크다. 이 일에다 그 직분을 다했다면 나머지는 미루어 알 수 있다. 공의 이름은 이미 나라의 역사책에 올라 있고 야사(野史)에도 전파되어 있어, 정말로 구구한 뒷 날 사람의 찬술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 분께서 한가지의 일을 성취할 수 있었던 까닭을 찾아 보면, 실로 문충공(文忠公 : 益齋公)께서 후손에게 내려주신 계책에서 저절로 나옴이 있었다 할 수 있고, 공(公)께서도 또 잘 계승하신 것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益驗君子之澤久愈不斬也 至若旌褒爵諡之尙闕係 是朝家欠曲於 公由何加損也 舊誌逸不傳 惟記蹈刄就義日月爭光數句云 銘曰

군자(君子)가 끼친 혜택이란 오래 될 수록 더하고 사라지지 않음을 더욱 징험할 수 있기도 하다. 정문(旌門)으로 포상해주고 시호(諡號)를 내림이 아직도 행해지지 않고 있는 것 같은 일이야 나라에서 해야할 일을 빠뜨린 것에 관계되는 일이지 공(公)에게 있어서야 무슨 상관이나 있겠는가. 옛 기록을 잃어 버려 전해지지 않고 있어서 오직 칼날을 밟으며 의로움에 나아간일이 일월과 쟁광하고 있다는 몇 구절만 기록하하였다. 명에 가로대

 

朱浚義殉 / 주준은 의에 순절하였고

張唐節死 / 장당은 절개에 죽었는데

俱是大賢 / 두 분 모두 대현이었다

後孫吾東 / 우리 동국에 후손이 있으니

益齋之裔 / 익재공의 후예로서

有一義士 / 충의로운 한 분 계시는데

可與此並 / 가히 그 분들과 견줄만 하다

論凡我彛 / 모든 우리가 떳떳한 도리를 칭송하며

哀疇不尻 / 누구라도 무덤을 보고 슬퍼하지 않으리오

高平此原 / 높은 이 언덕에 편안하게 모신다

 

通訓大夫前行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東學敎授 眞城 李晩煃 謹撰

통훈대부전행홍문관부교리지제교겸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동학교수 진성 이만규 근찬

 

임술계동(1922년) 박석무 삼가 옮김

 

 

 

 

 

 

 

 

 

 

 

 

 

사진 출처>영암 망호(https://cafe.daum.net/524-1

 

↑월재공 이인걸 묘(月齋公 李仁傑 墓)

 

↑월재공 이인걸 묘비(月齋公 李仁傑 墓碑)

 

◈산소 소재지 : 전남 영암군 영암읍 정동

묘(墓)는 행주대첩에서 전사후 시신을 찾지못해 부득이 화살만 가지고 돌아와 이곳에 예장(禮葬)했다.

 

◈세계도 : 17세 익재공 제현→18세 운와공 달존→19세 소부윤공 학림→20세 대언공 담→21세 청호공 희→22세 제학공 문환→23세 부정공(副正公) 상((詳)→24世 초은공(樵隱公) 우하(友夏)→25世 욱(頊)→26世 호암공(湖巖公) 반기(磻琦)→27世 월재공(月齋公) (仁傑).

 

◈공훈(功勳)

벼슬은 무과(武科)를 거쳐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에 이르고 임란(壬亂) 때에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휘하(麾下)에서 독전(督戰)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올랐고 뒤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서(追敍)되었다.

 

◈묘지명(墓誌銘)

 

묘지명(墓誌銘)은 좌의정을 지낸 화곡(華谷)의 3자 회화공(晦窩公) 이인엽(李寅燁)이 찬(撰)하고, 행장(行狀)은 화곡의 현손으로 공조와 예조판서를 지낸 파서(琶西) 집두(集斗)의 손자 형조판서(刑曹判書) 이규팽(李圭祊)이 지었으며, 비명(碑銘)은 진성인(眞城人) 이만규(李晩煃)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