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국당공 후,월성부원군 란(鸞)의 증손자
[생졸년] 이인실『李仁實, 1607년(선조 40) ~ 1675년(숙종 1)』
■ 司禦 李公 墓表(사어 이공 묘표)/26世
명재 윤증 찬(明齋 尹拯 撰)
경주이공(慶州李公)은 휘(諱)가 인실(仁實)이요 자(字)는 효사(孝思)이고, 나의 선친과는 진사시에 동방입격(同榜入格)하여 친분이 아주 두텁다. 게다가 공의 아들 정(烶)이 선친에게 학문을 배웠고, 선친의 초상(初喪)때에 공(公)이 제문을 지어 와서 제사를 올리고 갔다.
선친을 여의고 남은 목숨을 병으로 누워 지내다 공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찾아가 곡을 하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 있었는데, 아들 정(烶)이 번거롭게도 상복 차림으로 먼 길을 찾아와 공의 묘표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니, 글재주가 없다 하여 어찌 차마 거절할 수 있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세보(世譜)는 신라에서 시작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 휘(諱) 알평(謁平)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 고관대작이 대대로 배출되어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고조 휘(諱) 자침(自琛)은 성균관 생원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諱) 란(鸞)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諱) 유일(惟一)은 판관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諱) 익(瀷)은 호(號)가 간옹(艮翁)으로 깨끗한 명망과 곧은 절개로 광해군의 혼란한 시대에 이름이 났으며, 마지막 관직은 장령이고, 전한(典翰)에 추증되었다. 모친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현감 길원(吉元)의 따님이다.
공(公)은 만력 1607년(선조 40)에 태어났고. 나이 열두 살 때 부친 간옹을 따라 제주(濟州)의 유배지로 갔으며, 겨우 성동(成童)의 나이에 경사(經史)를 다 배웠다. 돌아와서는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문하에 들어가니 문장이 더욱 발전하여 동료들이 모두 공과 교유하기를 선망하였다.
18세에 간옹의 상을 당하였는데, 여묘 살 이를 하며 예법을 다하였다.
계유 1633년(인조 11)에 비로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을 만나자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더는 관직에 진출하려는 뜻을 두지 않았다.
효종 임진 1652년(효종 3)에 경전에 밝고 행실이 훌륭한 인물로 천거를 받아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에 제수되었고, 사옹원 봉사와 종묘서 직장을 거쳐 의금부 도사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신창현감(新昌縣監)으로 나갔는데, 토호(土豪)들을 억누르고 빈민들을 구휼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정사를 펼쳤다.
그러나 결국 이 때문에 체차되고 말았다. 다시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다가 한성부 판관, 의빈부 도사, 귀후서 별좌(歸厚署別坐), 사재감 주부, 장례원 사평을 역임하였고, 서너 차례나 세 아문의 낭관에 의망되었다.
공은 관직 생활을 하면서 명성을 얻기 위해 매달리지 않았고 오직 처한 상황에 따라 맡은 직분을 다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거처가 썰렁하여 가난으로 자주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날마다 새와 물고기들과 함께 어울리며 세월을 보냈다. 산 한쪽에다 별도로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소나무와 매화를 심어 놓고 산속을 거닐며 생활하였는데, 늙음을 한탄하거나 처지가 낮은 것을 비관하는 기색을 비친 적이 없었다.
만년에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에 제수되었으나 익위사가 혁파됨에 따라 곧바로 옛집으로 돌아왔다. 시국이 변하여 당화(黨禍)가 크게 일어나자 두문불출(杜門不出)한 채 누워서 수시로 천장을 바라보며 남몰래 탄식만 하다가 을묘년(1675, 숙종1) 5월에 6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충주(忠州) 시곡(柿谷)의 선영 옆 오향(午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방정하고 의리를 좋아하며 화려함이 없이 간결하였다. 일찌감치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옛 성현의 책을 읽기 좋아하였으며 이에 따라 관직 생활을 하고 가정을 꾸려 갔다. 조금이라도 옛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이 있거나 시세를 좇아 이익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비루하게 여겨 배척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소인배라면 아주 질색하였으므로 속류(俗流)들로부터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일찍이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마음속으로 바랐던 것은 하는 일 없이 녹만 받아먹는 그런 따위의 관직 생활이 아니었는데, 나의 운명이 시대 상황과 서로 어긋나 결국 아무런 성취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벼슬을 한 것은 단지 가난을 면하려는 것일 뿐이었다. 만약 풍요하게 살고자 벼슬하려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졌다면 너희에게 무엇을 남겨 줄 수 있겠느냐.” 하였는데, 여기에서 공이 무슨 마음을 기른 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벗을 사귈 때는 반드시 진실한 마음으로 접하였고 겉모양으로 사귀지 아니하였으니, 승지 이석(李晳), 봉사 조국로(趙國老)와는 옛 성현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교제를 하였다. 부인은 김씨(金氏)로 또한 본관이 경주(慶州)인데, 엄격하고 법도가 있으며 각종 전적에도 조금씩 통하였다.
부친 원량(元亮)은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오르고 포의(布衣)에서 곧장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적신(賊臣) 김자점(金自點)의 모함에 빠져 아무런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인물로, 부인이 평생토록 이를 슬퍼하였다. 공보다 먼저 별세하여 나중에 부장(祔葬)되었다.
아들 다섯에 딸 둘을 낳았다. 장남 정(炡)은 공의 초상을 다 치르지 못하고 죽었다. 아들 하나가 있었으나 몹쓸 병에 걸려 죽었으므로 공의 유언에 따라 아우의 아들 모(某)를 후사로 삼았다.
둘째 아들 형(炯)은 진사이고 딸 둘을 두었으며, 셋째 아들 성(煋)은 공보다 먼저 죽었는데 아들과 딸을 각각 하나씩 두었으며, 넷째 아들 병(炳) 또한 아들딸 하나씩 두었고, 막내아들은 앞에서 말한 정(烶)으로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들 손자들은 모두 어리다.
장녀는 군수 이지웅(李志雄)에게 시집갔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세황(世璜), 세구(世球), 세관(世瓘), 세환(世瑍)이고, 딸 둘을 두었는데, 윤 규(尹 揆)와 윤 소(尹 熽)에게 시집갔다. 둘째 딸은 사인(舍人) 조일기(曺一夔)에게 시집갔다.
아, 공은 명망 있는 부친의 아들로 태어나 굳은 지조와 훌륭한 행실을 쌓았고 외적인 화려함과 내적인 질박함을 동시에 갖추었다. 따라서 높은 자리를 얻고 뜻을 펼쳐서 세상에 이름을 날렸어야 마땅하거늘 보잘것없는 관직을 전전하면서 궁핍하게 세상을 마쳤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분수에 만족하고 자신의 지조를 지켜서 외부에서 부여된 관직에 따라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남들은 공의 불운을 한탄하였으나 자신은 그러한 상황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니, 공은 타고난 복은 박하지만 쌓은 덕은 후한 사람이라 하겠다. 공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고 가문을 계승하여 공이 받지 못한 복을 받을 사람은 아마도 후손들이 될 것이다. 아마도 후손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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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慶州李公。諱仁實。字孝思。與拯先君子。爲同榜進士。契義甚厚。公子烶。又學于先君子。先君子之喪。公操文來奠而去。孤露餘喘。抱病跧伏。聞公之歿。恨不能一哭。烶累然縗絰。遠來窮谷。以公墓表之記爲託。顧不能文。辭其何忍。謹按。公世譜始於新羅。以開國功臣謁平爲鼻祖。冠冕奕世。爲我東大姓。高祖諱自琛。成均生員贈左贊成。曾祖諱鸞。贈領議政。祖諱惟一。判官贈左贊成。考諱瀷。號艮翕。淸名直節。著光海昏朝。卒官掌令。贈典翰。妣平山申氏。縣監吉元之女。公以萬曆丁未生。年十二。從艮翁謫濟州。甫成童。盡受讀經史。及還。從李東岳安訥遊。詞藝益振。儕流皆慕與之交。十八。丁艮翁憂。廬墓盡制。癸酉。始登上庠。未幾。遭丙子之亂。挈家歸鄕。無復進取意。至孝宗壬辰。有以經明行修薦者。授南別殿參奉。由司饔院奉事。宗廟署直長。陞義禁府都事。除新昌縣監。其政務抑豪右而恤貧弱。竟坐是遞。復敍禁府都事。歷漢城府判官,儀賓府都事,歸厚著別坐,司宰監主簿,掌隷院司評。擬三曹郞者數四。公爲官不務聲名。唯隨遇盡職。官罷則輒歸鄕。所居蕭然。庚癸屢急。而日以魚鳥自娛。別搆小室於山阿。植松與梅。杖屨徜徉。未嘗作歎老嗟卑之色。晩爲翊衛司司禦。衛司罷。卽歸舊棲。而時事一變。黨禍大起。則杜門燕居。唯時仰屋竊歎而已。乙卯五月卒。壽六十有九。葬于忠州杮谷先塋側午向之原。公爲人方峻好義。簡質無華。早受庭訓。喜讀古人書。以此其守官居家。尠有不合於古法者。見人趨勢嗜利者。必鄙斥之。尤惡佞給小人。故爲俗流所忌嫌。嘗謂諸子曰。吾所自期者。誠不在苟祿。而命與時舛。卒無成就。然吾之仕。爲貧而已。若少有希冀豐約之計。則其何以遺汝等乎。卽此而公之所養者。可知矣。取友必以誠。不以外貌。與李承旨晳,趙奉事國老。有古人之交義焉。配金氏。亦籍慶州。莊而有法。略通書傳。其考曰元亮。佐仁祖靖社。以布衣。直拜持平。爲賊臣自點所陷。枉死非罪。夫人銜恤終身。先公卒而祔葬焉。生五男二女。男長曰炡。不勝公喪。有一子廢疾。以公遺命。立弟子某爲嗣。次曰炯。進士。有二女。次曰煋。先公夭。有男女各一。次曰炳。亦有男女。季卽烶。有一男皆幼。女長適郡守李志雄。有四子。世璜,世球,世瓘,世瑍。二女尹揆,尹熽。次適士人曹一夔。噫。公以名父子。植志行具文質。宜得位展布。以顯其世。而乃浮沈宂散。窮約以終。豈非命也。然安分守身。不以自外至者。爲忻戚。人歎其屈。自樂其適。蓋薄於祿。而厚於德者也。服訓勉學。嗣立公門。以承公未食之報者其在後人歟。其在後人歟。
출전 : 명재유고(明齋遺稿) > 明齋先生遺稿卷之三十五 > 墓表
↑26世 사어 이인보 묘(司禦 李仁寶 墓)/국당공파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강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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