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夫人李氏碣銘
[세계] 21世 청호공 희(淸湖公 暿)의 둘째딸
[배우자] 이증(李增 : 固城李氏)
용재 이행 찬(容齋 李荇 撰)
*1478(성종 9)~1534(중종 29)
계림이씨(鷄林李氏)는 고려 제현(齊賢)으로부터 현달하기 시작하였으니, 삼중대광(三重大匡)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이었다.
그의 아들 달존(達尊)은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이었고, 이분이 소부윤(少府尹) 휘 학림(學林)을 낳았다. 소부윤은 승정원 우부대언(承政院右副代言) 휘 담(擔)을 낳았고, 우부대언은 경상도 관찰출척사(慶尙道觀察黜陟使) 휘 희(暿)를 낳았다.
관찰출척사는 죽산안씨(竹山安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형조 판서 안등(安騰)의 따님으로, 이분이 부인을 낳아 이공(李公)에게 출가시켰다. 철성 이씨(鐵城李氏)는 고려 존비(尊庇)로부터 현달하기 시작하였으니, 판밀직사사 세자원빈(判密直司事世子元賓)이었다.
그의 아들 우(瑀)는 철성군(鐵城君)이고, 철성군이 문하시중(門下侍中) 휘 아무개를 낳았고, 문하시중은 집현전 제학 휘 강(岡)을 낳았고, 제학은 의정부 우의정 휘 원(原)을 낳았다.
우의정은 모현(某縣) 최씨(崔氏)를 아내로 맞았으니 군부총랑(軍簿摠郞) 최정지(崔丁智)의 따님으로, 이분이 이공[증(增)]을 낳아 부인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이러고 보면 대대로 명망이 있는 두 큰 집안끼리 서로 혼인한 것이니, 나라에서 망족(望族)을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이 두 집안을 꼽는다.
부인은 아기 적부터 유순하고 단아(端雅)하였으며 자라서는 예의가 발랐다. 어릴 때 조모 남씨(南氏)의 손에 길러졌는데 조모의 뜻을 받들어 색양(色養)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부친인 관찰사 부군이 기뻐서 “내가 일 때문에 혼정신성(昏定晨省)을 어기면 무릇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바치는 일을 내 딸이 든든히 맡아서 한다.” 하였다.
관찰사 부군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조모를 더욱 지성껏 봉양하여 조모 남씨가 부인을 좋은 아들처럼 의지하였고, 종족과 향당(鄕黨)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더욱 정숙하고 종들을 부림에 법도가 있었으며, 의방(義方)에 따라 움직여 터럭만 한 어긋남도 없었다.
공이 일찍이 진해(鎭海)와 영산(靈山) 두 고을의 현감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부인은 늘 “대저 관직에 있으면서 더러운 이름을 얻는 것은 모두 부인(婦人) 때문이었다. 내 어찌 나의 지아비께 누를 끼치리요.” 하고, 이로써 더욱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였다.
그리하여 집안의 말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 밖의 말은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으니, 두 고을의 백성들이 공의 청렴하고 공평함에 탄복하고 아울러 부인의 덕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공이 병으로 사직하고 안동(安東)의 별서(別墅)에 살면서 날마다 향리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낙(樂)을 삼고 집안 형편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의 뜻을 미리 알아서 잘 받들고 힘써 손님상을 잘 차려내어 집안에 자주 양식이 궁핍했어도 공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늘 마음이 편안하고 부인은 남편의 뜻을 어김이 없었으니, 향리에서 그 덕을 칭찬하였다.
공이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남은 자식들을 잘 교육시켜 선대의 유업을 실추하지 않도록 하여, 자손들이 명성과 지위가 현달하였고 이씨(李氏)의 가문이 이로써 더욱 커졌다.
공의 휘(諱)는 증(增)인데 조정이 공의 차자(次子) 아무개의 작위(爵位)가 이품(二品)이라 하여 공을 이조 참판에 추증하였다. 지금 상국(相國)인 진천(晉川) 강공 혼(姜公渾)이 공의 묘갈명을 썼다.
부인은 과부로 30년을 살다가 정덕(正德) 기사년 2월 모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88세이다. 이해 12월 정해(丁亥)에 남편인 참판공의 묘소 우측 묘좌 경향(卯坐庚向)의 기슭에 안장하였다. 이 고을은 임하현(臨河縣)이고 산은 수다산(水多山-지금 안동의 臥龍山 )이다.
부인은 4남 2녀를 낳았고, 내외손(內外孫)은 모두 약간 명이니,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상국의 글에 실려 있다. 장남 여(膂)는 경오년의 과거에 장원으로 뽑혀 지금 홍문관 수찬으로 있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이씨(李氏) 집안의 여경(餘慶)이 끝없이 뻗어갈 것임을 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어느 집안이 덕문인고 / 孰爲德門。
이씨의 선조로다. / 李氏之先。
그 향기를 퍼뜨려서 / 載播厥芬。
더욱 드러나서 이어졌어라. / 益顯以延。
어찌 그 뿌리가 두터우면서 / 孰厚其根。
열매가 많이 맺지 않으리요. / 而實不蕃。
이 부인으로 말하자면 / 至于夫人。
여덕이 더욱 새로웠나니 / 女德彌新。
좋은 배필을 얻으매 / 配得其良。
마치 한 쌍의 봉황이 우는 듯. / 鳳凰鏘鏘。
혁혁히 높은 벼슬이 / 象笏朱軒。
자손들에까지 미치었으니. / 曁子若孫。
가도가 융성하매 / 家道之肥。
문벌이 이로써 빛났도다. / 門閥以煇。
장수하고 강녕하시어 / 壽考康寧。
그 영화를 다 누리셨어라. / 以盡其榮。
내 글로써 명을 지어 / 我文以銘。
이 비석에 새기노니. / 維石之貞。
이 글에 부끄러움 없기에 / 不愧于辭。
이로써 보여 무너뜨리지 않게 하노라 / 用示無隳。
[주01]색양(色養) : 온화한 얼굴빛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부모의 얼굴빛을 보고 그 뜻을 잘 받드는 것이라고 한다. 자하(子夏)가 효(孝)를 묻자, 공자가 “얼굴빛을 온화하게 가짐이 어렵다.[色難]” 하였다. 《論語 爲政》
[참고문헌]
용재집(容齋集) > 容齋先生集卷之十 > 散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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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鷄林之李。其顯自高麗齊賢始。三重大匡府院君。有子曰達尊。寶文閣提學。生少府尹諱學林。府尹生承政院右副代言諱擔。代言生慶尙道觀察黜陟使諱暿。觀察使娶某縣安氏。刑曹判書騰之女。寔生夫人。以歸李公。鐵城之李。其顯自高麗尊庇始。判密直事世子元賓。有子曰瑀。鐵城君。鐵城君生門下侍中諱某。侍中生集賢殿提學諱岡。提學生議政府右議政諱原。議政娶某縣崔氏。軍簿摠郞丁智之女。寔生李公。以配夫人。奕世名德。兩大相偶。國之稱望族者。必歸焉。夫人孩而柔。幼而端。長而禮。少育於王母南氏。奉順色養之者。無所不至。觀察府君喜曰。吾以事有違定省。凡甘旨之供。唯吾女是保。觀察府君卒。夫人奉養尤謹。南氏倚夫人爲良子。宗黨稱其孝焉。治家整肅。馭婢僕有法。動以義方。無纖毫之差。公嘗出監鎭海,靈山二縣。夫人常曰。大抵居官得汚穢名者。莫不由諸婦人。吾寧累吾夫子耶。以此益自敬飭。內言不出。外言不入。二縣之民。服公廉平。而竝道夫人之德不已。公謝病。居安東之墅。日與鄕曲。杯酒爲樂。不問有無。夫人先意承順。務盛賓筵。家雖屢空。不令公知之。公常怡然。而夫人亦無違。鄕閭稱其德焉。公不幸棄代。夫人敎育遺孤。以不隳先緖。若子若孫。名位竝顯。李氏之門益以大。公諱某。朝廷以公次子某位二品。追贈公吏曹參判。今相國晉川姜公渾銘其碣。夫人寡居三十年。以正德己巳二月某甲卒。壽八十八。是年十二月丁亥。葬于參判公塋之右卯坐庚向之原。縣曰臨河。山曰水多。夫人生四男二女。內外諸孫。摠若干人。事俱載相國之文。其長曰膂。擢庚午科壯元。今爲弘文館修撰。人以是知李氏之慶方進而未艾也。銘曰。
孰爲德門。李氏之先。載䊩厥芬。益顯以延。孰厚其根。而實不蕃。至于夫人。女德彌新。配得其良。鳳凰鏘鏘。象笏朱軒。曁子若孫。家道之肥。門閥以輝。壽考康寧。以盡其榮。我文以銘。維石之貞。不愧于辭。用示無隳。
[참고문헌]
용재집(容齋集)>容齋先生集卷之十>散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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