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世 이반기(李磻琦)
[생졸년] 1510년(중종 5) ~ 1597년(선조 30)
[세계] 익재공후 청호공의 5대손.
절충장군호암공묘갈명
(折衝將軍湖巖公墓碣銘)
장흥(長興) 고광선(高光善) 근찬(謹撰)
제통(예기 제통편)에 선조가 아름다운 점이 없는데도 이것을 찬양하는 것은 속이는 것이요.
선행이 있는데도 알아주지 못함은 밝지 못한 것이요. 알고도 전하지 않는 것은 불인이다.
이 세가지 것은 군자의 부끄러워할 바인데 호암 이공의 후손과 같은 분들은 아마 잘못에서 벗어남이리라.
이씨 장노들이 그들의 선조 호암공(湖巖公)의 네 자 높이의 무덤에다가 요즈음 비석을 세우기로 하여 공의 11세손 종림으로 하여금 광선(光善)에게 찾아와 비명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광선이 여러 댓수에 걸치는 인척의 후손으로 공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삼가 살펴보니 공(公)의 휘(諱)는 반기(磻琦), 자(字)는 치신(致信), 호(號)는 호암(湖巖)이니 경주이씨(慶州李氏)였다. 신라(新羅)의 개국원공(開國元功) 양산대인(楊山大人) 휘(諱) 알평(謁平)이 상조(上祖)가 된다. 휘(諱) 금서(金書)는 고려 호부낭중(戶部郞中)으로 신라와 고려를 거치는 동안 높은 벼슬을 지냈다.
휘(諱) 핵(翮)은 호(號)가 열헌(悅軒)으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였으며, 이 분이 휘(諱) 진(瑱)을 낳아 시호(諡號)는 문정(文定이며, 호(號)는 동암(東菴)으로 벼슬은 정승(政丞)이었다.
이분이 휘(諱) 제현(齊賢)을 낳았으니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으로 호(號)는 익재(益齋)이니 네번이나 상부(相府)에 올라 계림군(鷄林君)에 봉(封)해지니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세상에서 우러러 보았다.
삼대를 내려와 휘(諱) 담(擔)은 이조에 벼슬하여 참판(參判)이었고 휘(諱) 희(暿)는 호(號)가 청호(淸湖)로 이조참의(吏曹參議)였으며 외직으로 나가서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냈는데 직필(直筆)로 항언하고 권귀(權貴)에 굽히지 않았다. 이조판서(吏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에 증직(贈職)되었다.
휘(諱) 문환(文煥)은 부제학(副提學)이니 바로 공의 고조(高祖)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상(詳)으로 현감(縣監)을 역임하고 조(祖)의 휘(諱)는 우(友)하니 호(號)는 초은(樵隱)으로 숙부(叔父)인 취수헌(醉睡軒)공에게 수학하였다. 기묘(己卯)년에 종형(從兄) 눌헌공(訥軒公 : 李思均)이 화(禍)를 당함에 미쳐 문을 닫고 자취를 숨겼다.
아버지 휘(諱) 욱(頊)은 은덕(隱德)이 있었고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범(範)의 딸이다.
중종(中宗) 경오(1510년) 어느날에 공(公)이 태어났다.
공(公)은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 8세(歲)에 아버지를 여의였으나 슬퍼함이 어른과 같았다. 종조(從祖) 눌헌(訥軒)선생께서 수업(修業)하여 깊이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고 종숙(從叔) 송음공(松陰公 : 珀)과 더불어 강학(講學)하기를 쉬지 않았다.
당대의 동료들로서 따라갈 사람이 없었으며 기절(氣節)이 탁이(卓異)하여 무과(武科)출신으로 명종(明宗) 때에 특별히 추천되어 벼슬이 선전관(宣傳官)이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때에 남의 배척을 받아 고양(高陽 : 오늘날 고양시)으로 부터 난리를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세 곳이나 거쳐서 영암(靈巖)의 녹문산(鹿門山 : 영암읍 회문리 녹암) 가운데에 임시로 살면서 거문고와 서책으로 자오(自娛)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임금의 수레가 평안도(平安道)로 행차하자 온 나라가 흉흉(洶洶)하니 아들 첨정공(僉正公)이 공에게 여쭙기를 "불초는 일찌기 충과 효가 일치한다는 의리를 알았습니다.
이제 임금이 난리를 피해가는데 호종(扈從)하여 호위((護衛)하지 못하고 자기만 초야((草野)에 있다면 결단코 신하의 직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버이 나이가 너무 많아 날 보내기가 아까운 사정이 있으니 떠나기도 또한 안타깝습니다. 충(忠)과 효(孝)를 두 가지 모두 오롯하게 하지 못함이 무척 한스럽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 나는 이제 늙었다. 난리에 호종(扈從)하지 못하는 것도 지통(至痛)한 일이다. 너는 이미 출신(무과에나감)한 사람이니 군신(群臣)의 의리도 중한 건데 어찌하여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로 임금을 섬기는 큰 절차를 폐한단 말이냐.
오늘이야 말로 네가 정녕 은혜(恩惠)를 갚도록 도모해야 할 때이다. 급히 의(義)를 위하여 나아갈 것을 꾀하여 늙은 아비가 이루지 못한 뜻을 이루어 준다면 어찌 나의 효성스러운 아들이 아니랴! " 라고 하였다.
첨정공(僉正公)이 마침내 재배하고 물러나와 백씨(伯氏)에게 인사하면서 말하기를 " 형님은 이제 집에 계셔 어버이를 봉양하오니 아우는 마땅히 나라의 일에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하고는 가동(家僮)들을 거느리고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적진으로 달려가니 여러 적을 무찌르고 마침내 행주(幸州)싸움에서 순절(殉節)하였으니 이거야말로 진정코 공(公)이 자손들에게 끼쳐준 충의(忠義)가 붉게 빛났던 거였다.
선조(宣祖) 정유(1597년)년 11월 1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8세(歲)였다.
망호정(望湖亭) 뒷산 함정동(咸井洞)선의 방향을 등진 언덕에 장사(葬事)지냈다,
초배(初配)는 숙부인(淑夫人) 당악김씨(棠岳金氏) 모(某)의 딸이며 묘소는 공의 묘소 백호등(白虎嶝)에 있으며, 재위(再娶) 숙부인(淑夫人) 양천허씨(陽川許氏)는 응서(應瑞)의 딸로 묘(墓)는 공의 묘소와 쌍폄(雙窆)이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큰 아들은 인수(仁壽), 둘째는 인걸(仁傑)이니 호(號)는 월재(月齋)로 바로 첨정공(僉正公)이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록(錄)되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오호라 공(公)의 실적(實蹟)은 명산(名山)에 보관되어 있으니 결코 오늘의 찬술(撰述)을 기다리지 않겠지만 만약 공(公)으로 하여금 지하에서 오늘날 나라를 그르친 무리들은 만날수 있게 한다면 어찌 자기들의 죽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리오. 명에 이르기를
문충공의 후손 있어 / 文忠有孫。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을 수 있네 / 克趾先美。
대대로 충의에 돈독하여 / 世篤忠義。
명성은 사라지지 않네 / 名聲不死。
봄의 이슬과 가을의 서리에 / 春露秋霜。
군자들이 밟는 곳이라 / 君子所履。
저 송백을 바라노라면 / 瞻彼松栢。
이 천년이고 백년이고 제사지내리 / 於千百禩。
己未年(1919년) 9월 하순
장흥(長興) 고광선(高光善) 근찬(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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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祭統曰 先祖無美而稱之是誣也 有善而不知不明也 知而不傳不仁也 此三者君子之所恥如 湖巖李公遺仍庶乎免夫李氏長老於其先祖湖巖公 四尺之封謀伐石使 公十一世孫鐘霖來命牲石銘于光善者以光善累世姻戚之後如悉於公也謹按公諱磻琦字致信號湖巖 李氏慶州人也 新羅開國元功 沙梁大人諱謁平爲上祖 有諱金書高麗戶部郞中歷羅麗甚爀有諱翮號悅軒尙書左僕射 是生諱瑱諡文定號東菴官政丞 是生諱齊賢諡文忠號益齋 四登相府封鷄林君 道德文章爲世服仰三傳諱擔仕本朝參判 生諱暿號淸湖 吏議出爲嶺伯 直筆抗言不饒權貴 贈吏判大提學 生諱文煥副提學 寔公高祖考也 曾祖諱詳縣監 祖諱友夏號樵隱 受學于叔父醉睡軒逮 己卯以從兄訥軒之遭禍杜門屛跡考諱頊有隱德 妣安東權氏父範以 中廟庚午某甲生公 公禀質超倫 八歲丁憂哀毁如成人 受業于從祖訥軒先生 深究性理 與從叔松陰公講學不輟 當世儕友岡能跂及 氣節卓異竟以 靺韋出身明廟朝 以別薦官宣傳 乙巳禍爲人所擠 自高陽避禍 南下三傳僑居 于靈巖鹿門山中 琴書自娛及壬辰燹大駕西幸擧 國忷懼子僉正公禀于公 曰不肖早識忠孝一致之義當 今君父蒙塵不得扈衛自存草野決非臣子分職 然而親年極邵愛日情私離違亦悶 忠孝不可兩全甚恨公曰 吾旣老矣 不得赴難敵慨爲至痛汝 旣出身君臣義重惡 可以父在之故廢事君之大節乎 今日正汝圖報之秋 速圖就義以逐汝 老爺未逐之志 則豈非吾孝子乎僉正公逐再拜而退與伯氏訣曰 兄旣在家養親 弟當戮力王事 率家僮募義旅 赴敵陣多有捷竟 殉于幸州役 此誠公貽厥忠義炳然如丹以宣廟丁酉十一月十七日均享年八十八 葬于望湖亭後麓咸井洞枕巽之原 配淑夫人棠岳金氏某女 墓在公墓白虎嶝 配淑夫人陽川許氏應瑞女 公墓雙窆擧二男 長仁壽 次仁傑號月齋卽僉正公也 錄宣武原從勳 贈兵參嗚呼公之實蹟藏在名山 不必待今日撰述而若使公九原可作以今誤國之時輩 寧不愧死哉 銘曰。
文忠有孫。克趾先美。世篤忠義。名聲不死。春露秋霜。君子所履。瞻彼松栢。於千百禩。
己未年(1919년) 菊花月 下旬
長興 高光善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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