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신라 인물

김생(金生) - 통일신라시대 필예가(筆藝家)

야촌(1) 2010. 8. 14. 19:19

■김생(金生)

 ◇711년(성덕왕 10)∼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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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의 서예가로,《삼국사기》 권48 열전 제8 김생조에 의하면, “김생은 부모가 한미(寒微)하여 가계를 알 수 없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는데 나이 80이 넘도록 글씨에 몰두하여 예서·행서·초서가 모두 입신(入神)의 경지였다. 

 

숙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간 홍관(洪灌)이 한림대조(翰林待詔)양구(楊球)와 이혁(李革)에게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폭을 내보이자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라고 하며 놀라워하였다.”고 한다.

그의 행적 또한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충주목(忠州牧) 불우조(佛宇條) 김생사항(金生寺項)에 “김생이 두타행(頭陀行)을 닦으며 이곳에 머물렀기에 김생사라 이름하였다.”는 기록과 그의 글씨로 전해지는 작품들이 모두 사찰 또는 불교와 관련된 점으로 보아 ‘호불불취(好佛不娶)’하였다는 그의 생을 짐작할 뿐이다.

그는 특히 고려시대 문인들에 의하여 해동제일(海東第一)의 서예가로 평가받아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에서는 그를 신품제일(神品第一)로 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미 그의 진적이 귀해져 이광사(李匡師)의 《원교서결 圓嶠書訣》에서 그의 진적은 절무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필적으로 현재 경복궁에 있는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 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가 있다. 이 비의 비문 글씨는 고려 954년(광종 5)에 승려 단목(端目)이 김생의 행서를 집자(集字)한 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왕희지·구양수류의 단정하고 미려한 글씨와 달리 활동적인 운필로 서가(書家)의 개성을 잘 표출시키고 있다.

또한, 짜임새나 획의 처리에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틀에 박힌 글씨에서 벗어나 운치를 살리고 있다. 

그의 유일한 서첩으로 《전유암산가서 田遊巖山家序》가 있으며, 《해동명적 海東名蹟》·《대동서법 大東書法》에 몇 점이 실려 있다.

특히, 〈여산폭포시 廬山瀑布詩〉는 자유분방하면서 힘이 넘치는 필적이다.

이밖에 〈창림사비 昌林寺碑〉가 있는데 현재 원비는 물론 탁본조차 전하지 않는다. 

 

단지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가 《동서당집고첩발 東書堂集古帖跋》에서 “창림사비는 신라김생의 글씨로 자획에 전형(典型)이 깊어 당인(唐人)의 명각(明刻)이라도 이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품평이 전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槿域書畵徵(吳世昌, 啓明俱樂部, 1928)
◇韓國書藝史(金基昇, 大成文化社, 1966)
◇韓國美術全集 11―書藝―(任昌淳, 同和出版公社, 1973)
◇中原京金生寺址(李在俊, 空間 184, 1982)

 

출처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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