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신라 인물

신라 왕기(III)

야촌(1) 2010. 6. 7. 01:08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788 ~ 809

 

■ 애장왕(哀莊王)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 재위 800-809)의 휘(諱)는 청명(淸明)으로 소성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계화부인(桂花夫人) 김씨 이고, 13세에 즉위 하였으나 숙부 김언승(金彦昇)이 섭정 하였다.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의 2묘(二廟)를 세우고 시조대왕(始祖大王)과 왕(王)의 아들 고조(高祖)를 명덕대왕(明德大王) 왕의 증조(曾祖)를 원성대왕(元聖大王) 황조(皇祖)를 혜충대왕(惠忠大王) 황고(皇考)를 소성대왕(昭聖大王)으로 봉하고  5묘로 삼았다. 

 

일본과 우호를 증진하고 807년에는 공식(公式) 20여 조를 반포 하였다. 809년 섭정에서 실권을 장악 하였으나 숙부(叔父) 김언승(金彦昇)이 그 아우 이찬(伊餐) 제옹(悌邕)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대내(大內)에 들어와 난(亂)을 일으키고 왕(王)을 살해하자 왕제(王弟) 체명(體明)도 왕(王)을 시위(侍衛)하다가 살해 당 하였다. 왕(王)을 추시(追諡)하여 애장(哀莊)이라 했다.

 

 

↑신라 제41대헌덕왕(憲德王)

 

■ 헌덕왕(憲德王)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 : 재위 809-826)의 성은 金씨로 이름은 언승(彦昇)이다.

제39대 소성왕(昭聖王)의 동생이며 비(妃)는 각간(角干) 예영(禮英)의 딸 귀승부인(貴勝夫人)이다. 790년(원성왕 6) 당나라에 다녀와 대아찬(大阿餐)이 되고 794년(원성왕 10) 시중(侍中)을 거쳐 이듬해 이찬으로서 재상(宰相)에 올랐다. 

애장왕(哀莊王)이 즉위하자 섭정(攝政)을 하였으며 801년(애장왕 2)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809년 난을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한 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왕으로 책봉을 받았으며 왕자 헌장(憲章)을 당나라에 보내어 금. 은으로 만든 불상(佛像)과 불경을 바치는 등 친당정책(親唐政策)에 힘썼다.

 

819년(헌덕왕 11)당나라 헌종(憲宗)의 청으로 운주(運州:山東省)에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위해 군사 3만 명을 파견 하였으며 822년에는 웅주도독(熊州都督) 김헌창(金憲昌)의 반란을 평정하고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의 모반(謨叛)을 진압 하였다.

 

이듬해에는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수(白水)에게 명하여 한산(漢山) 북쪽의 군민(郡民) 1만 명을 동원하여 패강(浿江:大同江)에 3백리에 달하는 장성(長城)을 쌓게 하였다. 능은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있다.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 흥덕왕(興德王)

 

신라 제 42대 흥덕왕(興德王 : 재위 826-836)은 김(金)씨로 휘(諱)는 경휘(景徽), 초명은 수종(秀宗). 수승(秀昇)이라 했다. 원성왕의 손자이며 헌덕왕의 동생으로 비는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章和夫人)김씨 이다.

 

819년(헌덕왕 11) 이찬(伊餐)으로 상대등(上大等)이 되었으며 822년(헌덕왕 14) 부군(副君)이 되어 월지궁(月池宮)에 들어갔다 즉위하자 당(唐)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 문종(文宗)으로 부터 신라왕에 책봉되고 828년(흥덕왕 3) 대아찬(大阿餐) 김우징(金祐徵)을 시중(侍中)에 임명하여 정사를 맡기는 한편 장보고(張保皐)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삼아 해적의 침입을 막게 하였다.  

 

이 해 대렴(大廉)이 당나라로부터 차(茶)의 종자를 가져와서 재배 이때부터 차의 재배가 전국적으로 성행하였다. 

834년(흥덕왕 9)복색제도(服色制度)를 고치고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도록 하였다 유언에 따라 안강현(安康縣) 북쪽에 묻혔다. 

 

     

↑신라 제43대 희강왕(僖康王)

 

■ 희강왕(僖康王)

 

신라 제43대 희강왕(僖康王 : 재위 836-838)은 김(金)씨로 이름은 제륭(悌隆). 제옹(悌擁)이다. 원성왕의 손자이며 이찬(伊餐) 김헌정(金憲貞)과 어머니는 포도부인(包道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비(妃)는 대아찬(大阿餐) 충공(忠恭)의 딸 문목부인(文穆夫人)이다.

 

흥덕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삼촌 균정(均貞)과 조카 제륭(悌隆)이 모두 왕이 되고자 하였다. 

이때 시중 김명(金明)과 아찬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우징(祐徵)은 질(姪)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으로 더불어 그 부친 균정을 받들므로 한때는 궁내로 들어가서 서로 싸웠는데 김양은 화살에 맞고 우징등은 도망하고 균정은 해를 입어 제륭이 즉위하게 되었다. 

 

당(唐)의 문종(文宗)이 숙위중(宿衛中)의 왕자(王子) 김의종(金義琮)을 돌려보냈다. 

즉위 3년 상대등 김명(金明)과 시중(侍中) 이홍(利弘)등이 흥병작난(興兵作亂)하여 왕(王)의 좌우(左右)를 살해하니 왕은 온전치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궁중에서 목메어 자살하였다. 추시(追諡)를 희강(僖康)이라 하고 소산(蘇山)에 장사하였다.

 

 

↑신라 제44대 민애왕(閔哀王)

 

■ 민애왕(閔哀王)

 

신라 제44대 민애왕(閔哀王 : 재위 838-839)의 성은 김(金)이요. 휘(諱)는 명(明)으로 원성왕(元聖王)의 증손으로 대아찬(大阿餐) 충공(忠恭)의 아들이다. 835년(흥덕왕 10)에 대아찬으로서 시중(侍中)이 되었고 836년에 제륭(悌隆)과 균정(均貞)이 왕위 다툼을 할 때 제륭을 도와 왕(僖康王)이 되게 하고 자신은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838년에 시중 이홍(利弘)과 함께 희강왕을 협박 자살하게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아버지 충공(忠恭)을 선강대왕(宣康大王). 어머니 귀보부인(貴寶夫人) 박씨를 선의태후(宣懿太后)라 추시(追諡)하고 처 김씨는 윤용왕후(允容王后)라 하였다.

김양군(金陽軍)의 닥침을 듣고 이찬(伊餐). 대흔(大昕)등을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막게 하였으나 패하여 왕군(王軍)은 절반이 죽었다. 이때 왕은 대수하(大樹下)에 있던바 좌우(左右) 근신(近臣)이 다 달아나므로 혼자 어찌할 바 모르다가 이궁(離宮)으로 달려 들어오니 김양(金陽)의 병사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군신들이 고왕(故王)을 예(禮)로 장사하고 시(諡)를 민애(閔哀)라 하였다.

 

   

↑신라 제45대  신무왕(紳武王)

 

■ 신무왕(紳武王)

 

신라 제45대 신무왕(紳武王)은 김(金)씨로 휘(諱)는 우징(祐徵)이고, 원성왕(元聖王)의 증손이며. 희강왕(僖康王)의 종제(從弟)이다. 어머니는 진교부인(鎭矯夫人). 박(朴)씨이고 비(妃)는 진종부인(眞從夫人)이다. 828년(흥덕왕 3) 대아찬으로 시중(侍中)이 되었다가 831년(흥덕왕 6)면직되고 834년(흥덕왕 9) 다시 시중이 되었으나 이듬해 아버지 균정이 상대등이 되자 사임했다,

 

836년(희강왕 1) 흥덕왕이 죽어 희강왕(僖康王:金悌隆)이 왕위를 탐내자 아버지를 왕으로 추대하여 싸웠으나 패배 다음해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에게로 가서 은신했다, 839년(민애왕 2)4월 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대군을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해 7월에 병사 하였다. 능(陵)은 경주 제형산(弟兄山)에 있다.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 문성왕(文聖王)

 

신라 제 46대 문성왕(文聖王 : 재위 839-857)의 이름은 경응(慶膺)으로 신무왕(紳武王)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정계부인(貞繼夫人)이다, 비(妃)는 위흔(魏昕)의 딸이다. 문성왕의 등극시기는 신라의 쇠퇴기로서 귀족들 간의 왕위 쟁탈전이 성행할 때였다.

 

그르므로 문성왕의 재위 연간에도 많은 반란이 있었는데 841년(문성왕 3)에는 일길찬(一吉餐) 홍필(弘弼)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846년(문성왕 8년)에는 청해진대사(靑海鎭大使) 장궁복(張弓福)이 그 전해에 자기 딸을 왕비로 삼게 하려다가 실패한데 대한 보복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또 847년(문성왕 9)에는 양순(良順). 흥종(興宗)등이 모반하였으며 849년(문성왕 11)에는 이찬(伊餐). 김식(金式). 대흔(大昕)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문성왕의 재위기간 동안 혼란한 시국이 계속 되었으나 청해진대사 장보고(張保皐)가 남해 일대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 해적을 소탕하고 무역을 흥하게 하였으므로 대당관계가 원만 하였다.

능은 경주 공작지(孔雀址)에 있다.

 

 

↑신라 제47대헌안왕(憲安王)

 

■ 헌안왕(憲安王)

 

신라 제 47대 헌안왕(憲安王 : 재위 857-860)의 성은 김(金)씨로 이름은 의정(誼靖). 우정(祐靖)이다. 

그는 신무왕의 이복동생으로 어머니는 조명부인(照明夫人) 김씨(金氏)이다. 859년(헌안왕 3) 전국에 흉년이 들자 백성들의 구원에 힘썼고 제방을 쌓아 농사를 장려하였다. 후사(後嗣)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景文王)을 맏사위로 삼아 그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병환 중에 왕이 말하길 「과인(寡人)은 불행히 아들이 없고 딸만 있으니 우리나라 고사(故事)에 비록 선덕(善德). 진덕(眞德)두 여왕(女王)의 예가 있으나 부인(婦人)이 외사(外思)에 참여하는 것이 본받을 일이 되지못하며 사위 응렴(膺廉)은 나이 비록 적으나 효성이 지극하고 덕이 있으니 이를 세워 섬기면 반드시 국치(國治)에 부족함이 없으리니 과인(寡人)은 죽어도 썩지 않겠다」고 하였다. 시(諡)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능은 경주 공작지(孔雀趾)이다.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

 

■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 : 재위 861∼875)의 성은 김(金)씨로 이름은 응렴(膺廉:凝廉). 아버지는 아찬(阿飡) 계명(啓明), 어머니는 신무왕(神武王)의 딸 광화부인(光和夫人), 할아버지는 희강왕(僖康王)이다. 비는 헌안왕(憲安王)의 큰 딸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다.

 

아들은 황(晃: 정강왕) ·정(晸: 헌강왕) ·윤(胤), 딸은 만(曼: 진성여왕)이다. 헌안왕에게 아들이 없었고, 여왕 선덕(善德) ·진덕(眞德)의 예를 따르지 않게 됨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위한 뒤 아버지 계명을 의공대왕(懿恭大王),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로, 왕비를 문의왕후(文懿王后)로 책봉하고 왕자 정을 태자로 봉했다.

 

신라의 쇠퇴기를 당하여 빈번히 일어나는 중앙귀족의 모반과 지방의 반란을 평정하기에 힘썼다. 

한편 사신을 당(唐)나라에 파견하여 긴밀한 유대를 맺었고, 황룡사탑(皇龍寺塔)을 수축하는 등의 업적도 남겼으나, 재위 중에 천재지변(天災地變)이 많아 백성이 곤궁하였다.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 헌강왕(憲康王)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 재위 875-886)은 성은 김(金)씨로 휘(諱)는 정(晸), 경문왕의 맏아들로 매우 총명하고 민첩하며 독서를 즐겼는데 눈으로 한번 본 것은 모두 암송하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즉위하자 문치(文治)에 힘썼으며 876년(헌강왕 2) 황룡사(皇龍寺)에 백고좌(百高座:큰 법회)를 베풀어 불경을 강(講)하게 하였다.

 

878년 당나라에 조공(朝貢)하여 희종(僖宗)에 의해 신라왕에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반란을 도모한 일길찬(一吉餐) 신홍(信弘)을 처형하였다. 880년 처용무(處容舞)가 크게 유행 하였으며 서울의 민가(民家)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 등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는 신라의 쇠퇴기로 나아가는 시기였다.

 

유학 같던 최치원이 돌아왔으며 헌강왕12년에는 왕이 병환에 눕자 국내에 죄인들을 사면하고 또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고 경(經)을 강설(講說)케 하였다. 같은 해에 왕이 승하하니 시(諡)를 헌강(憲康)이라 하고 보리사(菩裏寺) 동남(東南)에 장사하였는데,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55번지이다.

 

 

↑신라 제50대정강왕(定康王) 

 

■ 정강왕(定康王)

 

신라 제50대 정강왕(定康王 : 재위 886-887)의 휘(諱)는 황(晃)이다,

형(兄)인 경문왕(景文王)의 둘째아들 헌강왕(憲康王)이 후사(後嗣)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887년(정강왕 2) 백고좌(百高座)를 황룡사에 베풀고 왕이 친히 나와서 경청 하였으며 한주(漢州)의 이찬(伊餐) 김요(金堯)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군사들을 보내어 진압하였다.

 

887년 7월 재위 2년 만에 죽을 때 왕이 병환에 처하여 누이동생 만(曼)은 명민하고 풍채가 여리지 않고 장부와 같아 선왕(先王) 선덕여왕(善德女王)이나 진덕여왕(眞德女王)의 고사(古事)를 의방(依倣)하여 세우는 것이 좋다하여 신하들은 진성여왕(眞聖女王)을 즉위케 하였다.

 

 

↑신라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 진성여왕(眞聖女王)

 

신라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 재위 887-897)은 김(金)씨로, 휘(諱)는 만(曼), 원(垣)으로, 경문왕(景文王)의 딸이다, 남동생 정강왕이 후사(後嗣)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888년(진성여왕 2)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명하여 향가집(鄕歌集) 삼대목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아깝게도 이 책은 지금 전해되지 않는다. 

 

그 후 여왕은 위 홍과 사통(私通)하고 궁중에 미소년(美少年)들을 끌어들여 음행을 일삼았으며 뇌물을 받는 등 궁중의 풍기를 문란케 하였다. 891년 지방에서는 조세(租稅)가 걷히지 않고 병제(兵制)가 법대로 시행되지 않아 나라 안이 소란해지고 지방 각지에 군응(群應)이 할거(割據)하기에 이르렀다. 

 

이틈을 타서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梁吉)의 부하 궁예(弓裔)가 침범하고 견훤(甄萱)이 모반하여 후백제를 세워 다시 삼국(三國)이 맞서게 되었다. 헌강왕(憲康王)의 서자 요(嶢)를 태자로 봉했으나 왕위를 감당치 못하고 양위하고 말았다.

 

 

↑신라 제52대효공왕(孝恭王)

 

■ 효공왕(孝恭王)

 

신라 제52대 효공왕(孝恭王 : 재위 897-912)은 김씨(金氏)로 이름은 요(嶢). 정강왕(定康王)의 서자로. 어머니는 의명태후(義明太后) 김씨 이다. 비(妃)는 이찬(伊餐) 우겸(又謙)의 딸 김씨이고. 893년(진성여왕 9)에 태자로 책봉되고 897년 진성여왕이 죽자 즉위하였는데, 898년 궁예에게 패서도(浿西道). 한산주(漢山州) 관내의 30여성을 빼앗기고 900년 북쪽의 땅을 또 궁예에게 빼앗겼다. 

 

이렇듯 영토의 축소일로기에 접어든 효공왕은 907년에 일선군(一善郡) 이남의 10여성을 견훤에게 빼앗기고도 환락의 세월을 보냈다. 궁예가 군사를 거느려 진도부(珍島部:지금의 전남진도)를 쳐들어오자 항복하였고 911(효공14)에 견훤이 몸소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3천을 이끌고 나주성(羅州城)을 공격하여 9일이 지나도록 철수하지 않자 궁예가 이에 견훤 군대를 습격하니 견훤이 드디어 철수 하였다.

 

왕이 환란의 세월을 보내고 정사(政事)를 돌보지 아니하므로 대신 은영(殷影)이 간하였으나 이를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후삼국을 탄생 시켰다. 왕이 죽자 시(諡)를 효공(孝恭)이라 하였다.

 

 

↑신라 제53대 신덕왕(紳德王)

 

■ 신덕왕(紳德王)

 

신라 제53대 신덕왕(紳德王 : 재위 912-917)은. 박(朴)씨로, 휘(諱)는 경휘(景暉), 아달라왕(阿達羅王)의 원손(遠孫), 대아찬(大阿餐) 예겸(乂兼)의 아들. 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이다. 비(妃)는 헌강왕(憲康王)의 딸 의성왕후(義成王后) 김(金)씨이다.

 

효공왕(孝恭王)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하였다. 즉위원년(元年) 5月에 부(父)를 추대하여 선성대왕(宣聖大王)이라 하고 모(母)를 정화태후(貞和太后), 비(妃)를 의성왕후(義成王)라 하고 아들 승영(昇英)을 세워 왕태자(王太子)로 삼고 계강(繼康)을 상대등으로 승급 하였다.

 

한편 궁예는 수덕만세(水德萬歲)를 정개(政開) 원년(元年)이라 하였고 신덕왕5년에는 후백제왕(後百濟王)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치다가 실패하였다. 마침내 같은 해에 왕(王)이 죽으니 시(諡)를 신덕(紳德)이라 하고 경주(慶州) 죽성(竹城)에 능(陵)이 있다.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

 

■ 경명왕(景明王)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 : 재위 917-924)의 이름은 승영(昇英)으로 신덕왕의 태자이며 모후는 의성왕후(義城王后)이다. 후삼국(後三國)이 정립(鼎立)하여 패권을 다투던 때에 왕위에 올라 기울어가는 국운을 건지려고 후당(後唐)에 조공을 바쳐가며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했다.

 

견훤(甄萱)이 보병과 기병 일만 명을 그 느리고 공격해 와서 대야성(大耶城)을 빼앗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까지 진격 시키자 경명왕(景明王)도 아찬 김율(金律)을 고려에 보내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 하였다. 태조는 군사를 출사(出師)하여 신라를 구하게 하였다. 이에 소문을 들은 견훤은 즉각 군대를 철수하였다. 

 

또한 말갈족이 북변으로 쳐들어오니 태조의 장수 견권(堅權)이 삭주(朔州)에 기병을 이끌고 출전하여 말갈족의 말 한필도 보내지 아니 하였다. 이에 왕은 기뻐하여 사신과 편지를 고려 태조에게 보내어 사례하였다. 그러나 끝내 국세를 떨치지 못하고 죽었는데, 시(諡)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고려 태조는 사신을 보내 조제(弔祭)하였다. 경주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

 

■ 경애왕(景哀王)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의 이름은 위응(魏膺)으로. 경명왕(景明王)의 아우 신덕왕(紳德王)의 아들로 어머니는 의성왕후(義城王后)이다. 917년(경명왕1) 이찬(伊餐)으로서 상대등(上大等)이 된 뒤, 신라 말의 혼란기에 즉위 하였는데 왕건(王建) 견훤(甄萱)등의 강대한 세력에 눌려 국왕다운 위엄을 떨치지 못했다.

 

즉위4년 견훤이 공격해오자 왕(王)이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고려 태조는 정병(精兵) 일만(一萬)을 출동케 하였다. 견훤은 고려의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자 그 틈을 타 왕경(王京)에 쳐들어갔다. 마침 왕은 비빈(妃嬪), 종척(宗戚)들과 더불어 포석정에서 잔치하며 놀던 때라 적병이 닥침을 알지못하여 도망 하였다.

 

견훤은 군사들을 풀어 공사(公私)의 재물을 노략케 하고 대궐에 거처하며 왕을 찾아내게 하였다. 후궁(後宮)에 숨어있던 왕은 마침내 군중(軍中)으로 잡혀 갖는데,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케 하고 왕의 족제(族第)를 세워 국사(國事)를 맡게 하였다.

 

 

↑신라 제56대 경순왕(敬順王)

 

■ 경순왕(敬順王)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敬順王 : 재위927~935)은 김(金)씨로, 이름은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으로. 이찬(伊餐) 효종(孝宗)의 아들이며 모친은 헌강왕(憲康王)의 딸 계아태후(桂我太后)이다.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재위에는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 거(割據)하여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後百濟)의 침공과 약탈로 국력이 쇠퇴해졌고 민심이 신흥고려로 기울어 졌다. 그리하여 군신회의(群臣會議)를 소집 고려(高麗)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太祖)에게 항복 하였다.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받았으며 왕건(王建)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政丞)에 봉해졌으며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의 시초가 되었다. 능은 장단(長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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