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신라 인물

신라 왕기(∥)

야촌(1) 2010. 5. 30. 16:45

↑신라 제20대 자비왕(慈悲王)   ?~479

 

■ 자비왕(慈悲王)

 

신라 제20대 자비왕(慈悲王 : 재위 458-478)의 원래 칭호는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이다. 눌지왕(訥祗王)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아로부인(阿老夫人)으로 실성왕(實聖王)의 딸 金씨이고, 비(妃)는 미사흔(未斯欣)의 딸이다.

 

459년(자비왕 2) 왜인(倭人)이 병선 1백여 척으로 월성(月城)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이를 격퇴 하였다.

463년(자비왕 6) 2월 왜인이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梁山)땅의 삽량성(揷良城)에 침입하자 벌지(伐智). 덕지(德智)등에게 명하여 퇴각하는 왜적을 추격 대파(大破)시켰다.

 

한편 왜인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연해(沿海) 지방에 성을 쌓았고 같은 해 7월 대규모 열병식(閱兵式)을 거행하였다. 467년(자비왕 10)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전함(戰艦)을 수리하게 하였으며 474년(자비왕 17)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자 백제를 도와 백제와의 동맹이 성립되었다. 

 

475년(자비왕 18) 명활성(明活城)에 이거(移居)하였으며 이후 계속적인 왜병의 침입을 물리 쳤다.

 

 

↑신라 제21대 소지왕(炤知王)

 

■ 소지왕(炤知王)

 

신라 제21대 소지왕(炤知王 : 재위 479-500)은 일명이 조지(照知). 비처(毗處)이다.

그는 자비왕의 맏아들로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고 겸손 하였다고 전한다. 비(妃)는 선혜(善兮)부인이다. 

480년(소지왕 2)에 말갈이 신라의 북변을 침공하였고 481년에 고구려와 말갈이 연합하여 북변을 침공하여 호명(狐鳴)등 일곱 성(城)을 탈취해 갔으며 이듬해에 왜인이 해변을 침범하였다. 484년에는 고구려가 다시 침공해 왔으나 백제와 연합하여 이를 모산성(母山城)에서 격파 하였으며 486년에는 왜인이 재침이 있었다. 

 

이후 백제와는 화평을 유지하여 이벌찬(伊伐飡) 비지(比智)의 딸을 백제왕에게 보내었다. 487년에 신궁(紳宮)을 나을(奈乙)에 세웠고 또 각 지방에 우편 역을 설치하였고 이듬해에 왕이 월성(月城)으로 옮겼으며 490년에는 시장을 개설 하였다.

 

495년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포위 공격하자 원병을 보내 이를 구하였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듬해 고구려가 우산성(牛山城)을 침공하자 신라는 고구려 군을 이하(泥河)에서 진압 하였다.

 

 

↑신라 제22대 지증왕(智證王)    437 ~ 514

 

■ 지증왕(智證王)

 

신라 제22대 지증왕(智證王 : 재위 500-514)의 본래 칭호는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으로 성은 金씨이고, 이름은 지대로(智大路)이다.. 갈문왕(葛文王) 습보(習寶)의 아들로 체격이 크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머니는 눌지왕(訥祗王)의 딸 조생부인(鳥生夫人)김씨 인데, 소지왕이 후사(後嗣)없이 죽자 추대를 받아 즉위 하였다. 502년 순장법(殉葬法)을 폐지하고 농사를 장려 우경법(牛耕法)을 처음으로 시행 하였다.  

 

503년 국호(國號)를 (신라)로 개정하였고 왕을 뜻하는 마립간(麻立干)의 칭호를 폐지하고 정식으로 왕(王)이라고 칭 하게하는 등 국가의 체제를 정비 하였다. 504년 상복(喪服)제도를 정비 하였고 다음해에 주(州). 군(郡). 현(縣)을 정하고 실직주(悉直州)에는 군주(軍主)를 두었다.

 

 509년 서울에 동시(東市)를 두고 512년에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하였다. 죽은 후에 지증(智證)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시법(諡法)의 시초이다.

 

 

↑신라 제23대 법흥왕(法興王)

 

■ 법흥왕(法興王) 

 

신라 제23대  법흥왕(法興王 : 재위 514-540). 성은 金씨로 이름은 원종(原宗) 지증왕(智證王)의 아들로 키가 7척이나 되고 성품이 너그러우며 사람들을 좋아했다.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고 비(妃)는 보도부인(保刀夫人) 朴씨이다.

 

왕위에 오르자 시법(諡法)을 제정하고 517년(법흥왕 4)에는 병부(兵部)를 설치하였으며 520년에는 율령(律令)으로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521년 중국 양(梁)나라와 국교를 열었고 524년 왕은 남부지방을 순행(巡行)하고 황무지를 개척하여 군사당주(軍師幢主)를 두었다. 525년 사발주(沙拔州)에 군주(軍主)를 두도록 하였다.

 

527년에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공인(公認)하였으며 531년 국사(國事)를 총리하는 상대등(上大等)벼슬을 새로 두었다. 532년 금관국(金官國)을 병합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536년에는 건원(建元)이란 연호를 제정하였다.왕릉은 애공사(哀公寺) 북쪽의 산봉우리에 소재한다.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534 ~ 576

 

■ 진흥왕(眞興王)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 재위 540-576)의 성은 金씨요. 휘(諱)는 삼맥종. 일명 심맥부(深麥夫)로, 법호(法號)는 법운(法雲)이다. 그는 지증왕(智證王)의 손자로.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식도부인(息道夫人)이며. 비(妃)는 사도부인 박씨(朴氏)이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7세에 즉위할 때 태후(太后)인 법흥왕비(法興王妃)가 섭정 하였다.

553년(진흥왕 14)백제가 점령했던 한강유역의 요지를 공격 하였으며 554년 백제 성왕(聖王)의 군사를 격퇴 성왕을 피살했다.

 

561년 이사부의 공으로 대가야(大伽倻)를 평정하고, 이어서 주위의 침입에 대비 한강유역에 주군(州郡)과 강력한 군단을 설치하고 이곳의 새로이 개척한 땅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워 창녕(昌寧). 북한산(北漢山) 황초령(黃草嶺). 마운령(磨雲嶺)등의 비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565년(진흥왕 26)중국의 진(陳) 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중 명관(明觀)을 보냈으며 아울러 불교의 경론(經論) 1.700여 권을 보내왔다. 566년 기원(祇園). 실제(實際)의 두 절을 지었으며 같은 해에 황룡사(皇龍寺)도 준공 되었다. 진흥왕 때에는 신라가 군사적. 문화적으로 실력을 향상 삼국 중의 최강국(最强國)이 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신라 제25대 진지왕(眞智王)  ? ~ 579

 

■ 진지왕(眞智王)

 

신라 제25대 진지왕(眞智王 : 재위 576-579)의성은 金씨요. 이름은 사륜(舍輪). 금륜(金輪). 으로 진흥왕의 둘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도부인(思道夫人)이고 비(妃)는 오공(烏公)의 딸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백제와 불화하여 침공(侵攻)을 자주 받았으나 내리서성(內利西城)등을 쌓아 방비를 굳게 하였고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였다. 상대등(上大等) 거칠부(居漆夫)에게 국정(國政)을 맡겼으며 중국의 진(陳)나라와 수교하여 화친을 도모하였다. 능은 경주(慶州)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소재한다.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 ~ 632),

 

■ 진평왕(眞平王)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 재위 579-632)의 성은 김씨요. 휘(諱)는 백정(伯淨:白淨)이다.

진흥왕(眞興王)의 손자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로 나면서부터 기이한 용모를 가졌고 신체가 장대하며 의지와 식견이 심원하여 명철하였다.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김현종(金玄宗)의 딸 만호부인(萬呼夫人)이다.

 

즉위후 584년(진평왕 6)에 건복(建福)으로 개원(改元)하였으며 여러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侵攻)에 대항 수(隋)나라에게 공물을 바치며 수교(修交)하였다. 618년 수나라가 망하자 621년 당(唐)나라와 수교하여 고구려의 침공을 꾀했다.

 

대내적(對內的)으로는 여러 가지 문물제도를 개혁했으니 위화부(位和府). 선부서(船府署). 예부(禮部)따위의 관청을 신설하여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산성(南山城)을 신축. 각 성을 개축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원광(圓光). 담육(曇育) 등의 명승(名僧)을 중국에 보내어 수도하게 하는등 불교의 진흥과 왕실의 내실을 기하는데 주력했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 ~ 647

 

■ 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 재위 632-647)은 김씨로. 휘(諱)는 덕만(德曼)이고, 선덕은 시호(諡號)이다. 

그는 진평왕(眞平王)의 장녀(長女)로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김씨 이다. 진평왕이 후사 없이 죽자 백성들의 옹립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642년(선덕여왕 11)에는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겼고,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唐項城)을 빼앗아 나당(羅唐)의 통로를 끊어버리자 여왕은 이 사실을 당나라에 호소하였으며, 이어서 백제에게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자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 하였다. 

 

643년에 다시 고구려. 백제의 침입을 당나라에 호소하고 원군을 간청 하였으며 이듬해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647년에 비담(毗曇). 염종(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모반 하였으나 곧 진압했지만 이해에 여왕은 신병으로 죽어 유언에 이해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善政)을 배풀어 민생을 향상시키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 하였다. 

자장법사(慈藏法師)를 당나라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하였으며 첨성대(瞻星臺).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등을 건립하는 등 치적을 세웠다.

 

 

↑신라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 진덕여왕(眞德女王)

 

신라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 재위 647-654)의 휘(諱)는 승만(勝蔓)으로 진평왕(眞平王)의 모제(母弟)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로 용모와 자질이 아름답고 키가 칠측 이며 손이 무릅 밑까지 드리웠다고 한다.

 

어머니는 월명부인(月明夫人) 박씨(朴氏)로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연호를 태화(太和)라 하였다. 648년(진덕여왕 2)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보내어 백제 정벌의 원군(援軍)을 요청 하였으며 649년 당제(唐制)에 따라 복제(服制)를 개편 하였다.

 

650년 법민(法敏)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여왕이 친이 지은 태평송(太平頌)을 바치고 같은 해에 당나라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652년 김춘추의 둘째아들 인문(仁問)을 당나라에 보내서 친교(親交)를 더욱 돈독 하게 하였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명장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국력을 튼튼하게 하여 삼국통일(三國統一)의 과업을 위한 준비 작업에 힘을 쏟았다. 왕이 죽은 후 사량부(沙梁部 : 慶州)지역에 묻었는데 당나라의 고종(高宗)은 비단 300필과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추증했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신라의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재위 654-661)은 신라 중대(中代)의 첫 왕으로. 휘(諱)는 춘추(春秋) 진지왕자 이찬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진덕여왕이 죽은 뒤 신라왕실에 성골(聖骨)이 다하여 진골(眞骨)의 몸으로 즉위하여 이 후는 진골이 계승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은 즉위 전에 김유신(金庾信)과 같이 선덕. 진덕의 두 여왕을 보필하여 반도 통일의 대업을 도모하고 특히 당나라에 대하여서는 군사를 청하여 삼국통일(三國統一)을 꾀하였다. 왕은 즉위하자 원년(654)에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守)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상세히 살피게 하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조를 수정하게 하였으며 당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에 책봉 되었다.

 

660년(무열왕 7)에는 당나라가 백제 정벌에 나서자 왕자 법민(法敏)과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병 5만으로써 응원케 했다. 661년(무열왕 8)  5월에는 당이 고구려 정벌의 대군을 발하였으나 왕은 반도통일의 대업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김춘추는 미남이고 능변(能辨)이라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당나라에 가서도 그의 인품과 수완으로 외교의 성공을 보았다.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 ~ 681

 

■ 문무왕(文武王)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 재위 661-681)의 이름은 법민(法敏)으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왕후(文明王后) 김씨이고 비(妃)는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법민은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며 지략(智略)이 많은 사람으로 65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661년 무열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662년(문무왕 2)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쳤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였고 그 후 복신(福信). 도침(道琛)등의 백제 부흥 운동을 저지 하였다. 

 

668년(문무왕 8)에 재차 나. 당 연합군을 형성하여 고구려를 쳤는데 왕제(王弟) 인문(仁問)은 당나라의 이적(李勣)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677년(문무왕 17)그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大同江). 원산만(元山灣)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완수 하였다.

 

681년(문무왕 21)에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화장한 후 지금의 경상북도 월성군(月城郡)양북면(陽北面) 용당리(龍堂里) 감은사지(感恩寺址)앞 바다에 있는 동해 대왕암에 안장 하였다.

 

 

↑신라 제31대 신문왕(紳文王)  ? ~ 692

 

■ 신문왕(紳文王)

 

신라 제31대 신문왕(紳文王 : 재위 681-691)의 휘(諱)는 정명(政明). 명지(明之). 자(字)는 일초(日招). 문무왕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비(妃)는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딸 665년(신문왕 5)태자에 책봉 문무왕에 이어 즉위한 후 장인인 김흠돌이 모반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 김흠돌을 주살(誅殺)하고 비 김씨를 페위 시켰다.

 

682년 위화부령(位和府令) 2명을 두어 선거(選擧)사무를 맡게 하고 국학(國學)을 창설하여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683년(신문왕 3)에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또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을 소판으로 기용하여 金씨 성(姓)을 하사하였고, 이듬해 안승의 족자(族子)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모반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고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하여금 고구려 유민들을 분산 거주하게 하였다.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  643 ~ 702

 

■ 효소왕(孝昭王)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 : 재위 692-702)의 성은 金씨로. 이름은 이홍(理洪)이다.

제31대 신문왕과 일길찬(一吉飡) 흠운(欽運)의 딸인 신목왕후(紳穆王后)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691년(신문왕 11)에 태자로 책봉되고 즉위하자 당나라 측천무후(惻天武后)로 부터 신라 보국대장군(新羅補國大將軍). 행좌표도위대장군(行左豹韜尉大將軍). 계림주도독(鷄林州都督)에 봉해졌다. 모든 관제를 정비하고 당. 일본 등과 수교하였으며. 692년 좌. 우 이방부(左右理方府)를 좌. 우 의방부(左右議方府)로 고쳤다.

 

693년에는 처음으로 의학박사(醫學博士)를 두었으며 이듬해 송악(松嶽) 우잠(牛岑:黃海道金山)의 2성(城)을 축조하고 695년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설치하여 699년 창부(倉府)를 두었다.

 

앞서 695년(효소왕 4)음력 11월을 정월이라 정하였다가 700년(효소왕 9)다시 1월을 정월로 정하였고, 이찬 경영(慶永)의 모반을 평정했다. 능은 경주 방남리(芳南里)에 있다.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 ~ 737

 

■ 성덕왕(聖德王)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 재위 702-737)의 초명은 천중(天中). 휘(諱)는 융기(隆基). 후에 흥광(興光)으로 개휘(改諱)하였고, 효소왕(孝昭王)의 친동생이며 신문왕(紳文王)의 둘째아들이다. 비(妃)는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 성정왕후(成貞王后)이고 계비는 이찬 김순원(金順元)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제위 원년 9월에 죄인들을 사면하고 문무관에게 1급(級)씩 을 더하여주고 제주부(諸州部)의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아찬 원훈(元訓)으로 중시를 삼았다.  717년에 수충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孔子)와 10철(哲) 72현(賢)의 초상화를 대학(大學)에 두었고 이듬해에 처음으로 누각(漏刻)을 만들었으며 당나라와 문화수입에 힘써 사신 왕래가 빈번하였다.

 

732년에는 발해를 치고자 김사란(金思蘭)을 당나라에 보냈으나 눈으로 길이 막혀 중단 하였다.

이때 정식으로 패강(浿江:大同江) 이남의 땅을 판도로 하였다.

 

왕(王)이 돌아가니 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사사(移事寺)남쪽에 장사 하였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慶州市)동부 지곡리(只谷里)에 있다.

 

 

↑신라 제34대 효성왕(孝成王)  ? ~ 742

 

■효성왕(孝成王)

 

신라 제34대 효성왕(孝成王 : 재위 737-742)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승경(承慶)으로 성덕왕과 어머니 소덕왕후(炤德王后)의 2남으로 태어났다. 비(妃)는 이찬 순원(順元)의 딸 혜명부인(惠明夫人) 김씨이다.

 

당 현종은 성덕왕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신을 파견하여 조제(弔祭)하게 하고 고왕(故王)에게 태자태보(太子太保)의 직(職)을 내렸다.  사신이 출발하려 할 때 현종은 시서(詩序)를 적(賊)하여 보냈다.  

 

즉위 후 당(唐)현종으로 부터 개부의동삼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에 책봉되고 739년 동생 헌영(憲永)을 태자로 책립했다. 이듬해 후궁(後宮) 이왕비의 질투로 살해된 것에 분개한 후궁의 아버지인 파진찬(波珍飡) 영종(永宗)이 모반하자 이를 평정 했다.

 

사정승(司正丞)과 좌우의방부승(左右議方府丞)을 개정하여 좌(左)라 하고 이찬 정종(伊찬 貞宗)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아찬 이충(阿飡義忠)을 시중(侍中)으로 삼았으며 사신을 당에 파견 방물을 바치기도 했다. 죽은 뒤 유언에 따라 법류사(法流寺)남쪽에 화장 하였다.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 ~ 765

 

■ 경덕왕(景德王)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 재위 742-765)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헌영(憲英)으로 제33대 성덕왕(聖德王)과 어머니 소덕태후(炤德太后)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34대 효성왕(孝成王)의 아우이기도 하다. 비(妃)는 이찬(伊餐) 순정(順貞)의 딸 김씨(金氏)와 서불한(舒弗한) 의충(義忠)의 딸 만월부인(滿月夫人) 김씨(金氏)이다.

 

전왕인 효성왕(孝成王)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739년에 태자(太子)로 책봉되었고 742년에 왕위에 올랐다. 

모든 제도를 당(唐)나라에 준하여 개편하는 한편 당나라와 교역(交易)을 활발히 하여 산업발전에 힘써서 신라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제도(制度). 지명(地名). 관직(官職)등을 당식(唐式)으로 개편하였으며 국학(國學)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외 조교(助敎)를 두고 천문박사(天文博士). 누각박사(漏刻博士)를 설치하였다. 

 

또한 불교의 중흥에도 노력하여 754년 황룡사대종(皇龍寺大鐘)을 주조하고 석굴암(石窟庵)의 축조를 비롯하여 불국사(佛國寺). 굴불사(掘佛寺)등의 창건을 시작하였고 각사찰의 수축(修築)과 탑(塔). 불상(佛像)의 제작에 힘썼다. 능은 경상북도 월성군 내남면 조지리에 있다.

 

 

↑신라 제36대 혜공왕(惠恭王)  756 ~ 780

 

■ 혜공왕(惠恭王)

 

신라 제36대 혜공왕(惠恭王 : 재위 765-780)의 성은 김씨로 이름은 건운(乾運). 경덕왕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서불한(舒弗瀚) 의충(義忠)의 딸 만월부인(滿月夫人) 김씨이다. 8세에 즉위하여 한때 태후(太后)가 섭정을 하였고, 당(唐) 나라와 친교를 맺고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768년 (혜공왕 4) 당나라 대종(代宗)으로 부터 신라왕에 책봉 되었다.

 

재위 중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자주 일어나고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였는데도 사치와 음탕한 생활을 일삼아 궁중의 기강이 문란해 졌다.  768년 일길찬(一吉餐) 대공(大恭)의 모반(謀叛)을 비롯하여 770년 대아찬(大阿餐) 김융(金融)이 모반을 일으켰으며 775년 이찬 김은거(金隱居)가 모반을 일으켰다.

 

또 780년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케 하였으나 난군(亂軍)에 의해 피살 되었다.

 

 

↑신라 제37대 선덕왕(宣德王)

 

■ 선덕왕(宣德王)

 

신라 제37대 선덕왕(宣德王 : 재위 780-785)은 17대 내물왕(奈勿王)의 10대손으로 성은 金이요, 휘(諱)는 양상(良相)으로 성덕왕(聖德王)의 딸인 사소부인(四炤夫人) 김씨 소생으로 해찬(海餐) 효방(孝芳)의 아들이다. 비(妃)는 각간 양품(良品)의 딸 구족부인(具足夫人)이다. 

 

왕위 등극 후 아버지를 추봉하여 개성대왕(開聖大王)으로 어머니 김씨(金氏)를 높이어 정의태후(貞懿太后)라 하고 처(妻)를 왕비(王妃)로 하였다. 이찬 김경신(金敬信)을 봉하여 상대등을 삼고 아찬 의공으로 시중을 삼았다.

 

780년에 혜공왕(蕙恭王)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상대등(上大等)으로 있던 양상이 김지정을 멸하고 난을 진압 하였다.  

 

이 난중에 혜공왕이 죽자 양상이 즉위하였다.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당의 덕종(德宗)이 검교대위계림주자사영해군사신라왕(檢校大尉鷄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의 봉작을 주었다. 죽은 후 유언대로 불법에 따라 화장하고 뼈는 동해에 뿌려 졌다.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 ~ 798

 

■ 원성왕(元聖王)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 재위 785-798)의 성은 金씨요. 이름은 경신(敬信)이다.

비(妃)각간(角干) 김신술(金紳述)의 딸 연화부인(蓮花夫人:淑貞夫人) 김씨(金氏)이다.

 

780년(혜공왕 16) 이찬(伊餐)때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의 난을 평정. 그 공로로 선덕왕 즉위 후에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을 계승. 왕위에 추대된 왕의 족자(族子) 주원(周元)이 홍수로 알천(閼川)을 건너오지 못하자 이를 하늘의 뜻으로 믿은 대신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즉위하자 고조(高祖)이하를 왕에 추봉하고 786년 당나라에 조공(朝貢)을 하고 신라왕의 책봉을 청했으며 788년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 : 讀書三品科)를 두어 인재를 등용했다. 790년 벽골제(碧骨堤 : 金堤)를 중축하여 농사를 장려했고 죽은 후 유언에 따라 화장 돠어 봉덕사(奉德寺) 남쪽에 장사지냈다.

 

 

↑신라 제39대 소성왕(昭聖王)    ? ~ 800

 

■ 소성왕(昭聖王)

 

신라의 제39대 소성왕(昭聖王 : 재위 789-800)의 휘(諱)는 준옹(俊邕)으로 원성왕(元聖王)의 태자인 인겸(人謙)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성목왕후(聖穆王后) 김씨이고, 비(妃)는 대아찬(大阿餐) 숙명(淑明)의 딸인 계화부인(桂花夫人) 김씨이다.

 

원성대왕(元聖大王) 원년에 아들 인겸(仁謙)을 봉하여 태자(太子)를 삼았던바 7년(七年)에 죽자 원성(元聖)이 그의 아들을 궁중(宮中)에서 길렀다.  준옹을 당에 봉사(奉使)하고 대아찬의 위(位)를 받고 6년에는 병부령 11년에는 태자(太子)가 되었다가 원성왕이 돌아가자 그 위를 승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위1년 7개월 만에 승하하였으니 이후부터 신라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과열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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