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신라 인물

신라 왕기(1)

야촌(1) 2010. 5. 28. 22:50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B.C 57~A.D4 

 

 ■ 박혁거세(朴赫居世)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 재위 B.C57~A.D4)의 성은 박씨(朴氏) 휘(諱)는 혁거세(赫居世). 왕호(王號)는 거서간(居西干) 비(妃)는 알영부인(閼英夫人) 삼국사기에 보면 일찍이 고조선(古朝鮮)의 유민(遺民)이 지금의 경상도 지방에 와서 산곡간(山谷間)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마을을 형성하였다.

 

양산촌장(楊山村長) 알평(謁平)이 양산(楊山) 아래 나정(羅井)에서 말이 알려준 큰 알을 얻었는데 깨어보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었다. 알이 매우 크 서 박과 같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는데 박혁거세는 박 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가 자라서 13세가 되었을 때, 매우 영특하다 하여 여섯 마을의 왕으로 삼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

B. C53년(혁거세 5)1월에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계집아이를 낳았는데 우물 이름을 따라서 알영이라 하였다. 알영은 자랄수록 덕기(德氣)가 있었으므로 혁거세가 그를 맞이하여 비(妃)로 삼아 알영부인(閼英夫人)이라 하였다.

 

B. C 37년(혁거세 21)서울에 성을 쌓아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하고 B. C 32년(혁거세 26)에 금성에 궁궐을 지었다. 61세로 혁거세가 죽자 사능(蛇陵)에 장사 지냈다.

 

 

↑신라 제2대왕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 ~ 24

 

■ 남해왕(南解王)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 : 재위 4-24)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맏아들로 키가 크고 성품이 심후하며 지락이 뛰어났다.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고 왕비(王妃)는 운제부인(雲帝夫人-경주이씨)이다.

 

박혁거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6년(남해왕 3)에 시조(始祖)의 능을 조영하였고 8년(남해왕 5)에 석탈해(昔脫解)가 뛰어난 인물임을 알고 그를 사위로 삼았으며 10년(남해왕 7)에 그를 대보(大輔)에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신라가 정식으로 왕(王)의 칭호를 쓰기 전에는 차차웅(次次雄). 거서간(居西干). 또는 이사금(泥師今). 마립간(麻立干)등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므로 남해왕을 남해 차차웅 또는 남해거서간 이라고 하였다. 능은 사릉원(蛇陵園)내에 있다.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   ? ~ 57

 

 ■ 유리왕(儒理王)

 

신라 제3대 유리왕(儒理王 : 재위 24-57)은 본래 유리이사금(儒理泥師今)이라 불렀다.

성은 박(朴). 남해왕(南解王)의 아들로 어머니는 운제부인(雲帝夫人-경주이씨). 비(妃)는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이다.

 

부왕이 죽자 덕망이 높은 매제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하다가 군신(君臣)들의 추대로 즉위 했다. 

이사금은 고유한 말인 치리(齒理)를 뜻하는 것으로 그 후 박. 석. 김. 3성이 치장(齒長 : 나이가 많다는 것)으로 즉위 하게 되었다

 

32년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으며 관계(官階)를 17등급으로 제정하는 등 국가 체제를 확립했다.

낙랑(樂浪)이 고구려에 망하여 그 유민들이 넘어오자 이를 받아들여 6부에 배치 살게 하였다. 

 

평화롭고 편안하여 도솔가를 지어니 이것은 가락(歌樂)의 시조가 되었으며 8월 5일에는 육부에 패를 나누어 길쌈을 짜게 하고 패한 편을 이긴 편에 술과 음식을 사례하며 패한 편의 여자가 탄식하며 부른 노래를 회소곡이라 한다.

 

37년(유리왕 14)낙랑이 고구려에게 망하고 낙랑사람 5.000여 명이 투항하여 오매, 이를 4부에 나누어 살게 했으며 유명(遺命)으로 탈해가 왕위를 잇게 했다 사릉원(蛇陵園)에 묻혔다.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   ? ~ 80

 

■ 탈해왕(脫解王)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 : 재위 57-80)은  탈해이사금(脫解泥師今)이라고도 부른다. 

성은 석(昔)씨 남해왕(南解王)의 사위로, 비(妃)는 아효부인(阿孝夫人)이다.

 

일명 토해(吐解) 탈해왕은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출생으로 그 나라는 일본의 동북 천리(千里)되는 곳에 있었던바 그곳 왕이 여인국(女人國)의 왕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임신한지 7년만에 큰 알을 하나 낳으니 왕이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버리게 했다.

 

왕녀는 비단에 싸서 궤짝에 넣어 물에 뛰 우매 이것이 진한(辰韓)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는데 한 노파가 건져보니 옥동자가 나와 데려다 길렀다. 키가 9척이나 되고 용모가 뛰어났고 유달리 지식이 출중하였다. 

 

성명을 알길 없어 궤짝을 건질 때, 까치가 울었다 하여 까치 작(鵲)에 한쪽을 떼어 석(昔)씨라 하고 알에서 나왔다하여 탈해(脫解)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남해왕(南解王)이 탈해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위로 삼았고 대보(大輔)벼슬을 주어 정사를 맡겼다.

 

유리왕이 죽을 때 선왕의 유언대로 연장자 되는 탈해에게 뒤를 잇게 하니 이가 석씨 왕조의 시조다.

58년(왕 2)표공(瓢公)을 대보(大輔)로 삼고 65년 시림(始林)에 한 남자 김알지(金閼智)을 얻었으며 시림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국호로 삼았다.

 

 

↑신라 제5대 파사왕(婆娑王)   ? ~ 112

 

 ■ 파사왕(婆娑王)

 

신라의 제5대 파사왕(婆娑王 : 재위 80-112)의 원래 칭호는 파사이사금(婆娑泥師今)이다. 

성은 朴씨로 유리왕(儒理王)의 둘째아들. 또는 유리왕의 아우인 내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전 한다.

 

비(妃)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사성부인(史省夫人)金씨 80년 9월에 제4대 탈해왕(脫解王)이 죽자 유리왕의 태자가 왕위를 계승하여야 했으나 현명하지 못하여 신하들이 파사왕을 옹립하였으며, 신하들은 유리왕의 태자인 일성(逸星)을 세우려 하다가 한 다른 신하가 일성(逸星)은 비록 맏아들이나 위엄과 현명함이 파사를 따르지 못한다 하여 드디어 파사를 왕으로 세웠다.

 

즉위함에 검소절약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현군 이었다 94년 가야(伽倻)가 마두성을 포위. 공략하자 이를 물리쳤고 101년에는 금성(金城)의 동남쪽에 월성(月城)을 새로이 쌓고 왕이 이거(移居)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음집벌국(音什伐國).실직국(悉直國). 압독국(押督國)등 세 나라를 합병하여 국력을 키웠으며, 108년 가야를 공격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등을 합병하는 등 현군으로서 추앙을 받았다 능은 사릉(蛇陵)이다. 

 

 

↑신라 제6대 지마왕(祗摩王) ? ~ 134

 

■ 지마왕(祗摩王)

 

신라 제6대 지마왕(祗摩王 : 재위 112-134)의 성은 박씨(朴氏)로 파사왕(婆娑王)의 장남으로, 지미왕(祗味王)이라고도 한다. 원래의 칭호는 지마이사금(祗摩泥師今)이었다. 

 

어머니는 사성부인(史省夫人) 김씨(金氏) 비(妃)는 김마제(金摩帝)의 딸 애례부인(愛禮夫人).115년 가야(伽倻)가 침범하여 황산(黃山)에서 싸웠는데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였으며 116년 재차 장군을 보내어 가야에 침입하게 하고 왕이 뒤를 이었으니 가야는 성(城)을 굳게 지키고 마침 비가 오래오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두 나라 사이에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121년에는 동변(東邊)에 왜구가 넘나들어 123년 왜국(倭國)과 수교 하였으며 125년 말갈족(靺葛族)의 침입을 받아 백제의 도움으로 격퇴하였다 왕이 승하하자 일성이사금(逸聖泥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신라 제7대 일성왕(逸聖王)   ? ~ 154

 

■ 일성왕(逸聖王)

 

신라 제7대 일성왕(逸聖王 : 재위 134-154)의 원래 칭호는 일성이사금(逸聖泥師今)이며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이다.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비(妃)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 박씨(朴氏)이다.

 

139년(일성왕 6) 말갈족(靺鞨族)이 침입하여 백성을 약탈하고 국력의 소모가 심하여 144년 (일성왕 11)에는 농사를 장려 하였다. 농(農)은 정사(政事)의 근본이요 식(食)은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것이니 재방을 수축하고 전야(田野)를 널리 개최하라 하였으며, 또 민간에 금은옥주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다.

 

봄여름에는 가뭄이 있어 수학을 못하여 백성이 주리니 곡식을 나누어 구제해 주었다. 

신하들에게 명하여 각각 지용(智勇)이 있어 능히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여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사들을 후련 시켰다. 146년(왕 13)에는 압량(押梁)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 ~ 184 

 

■ 아달라왕(阿達羅王)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의 원명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으로, 성은 박씨이다.

 

그는 일성왕(逸聖王)의 맏아들로 키가 7척이고 콧마루가 우뚝하고 용모가 기이하였다. 

어머니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 박씨이고, 비(妃)는 지마왕(祗摩王)의 딸 내례부인(內禮夫人) 박씨이다.

 

157년 처음으로 감물(甘勿). 마산(馬山)의 두 현(縣)을 두고 죽령(竹領)의 길을 열었다.

165년 아찬 길선(吉宣)이 모반 하였다가 백제로 달아나자 왕은 그의 송환을 요구 하였으나 백제에서 응하지 않아 두 나라의 사이가 나빠졌다.

 

167년 백제가 신라 서쪽의 두성을 격파하여 1.000여 명의 백성을 잡아가자 군사 2만과 왕 스스로 8.000기(騎)를 거느리고 나가니 백제는 포로들을 석방하고 화친을 청하였다.

 

 

↑신라 제9대 벌휴왕(伐休王)

 

■ 벌휴왕(伐休王)

 

신라 제9대 벌휴왕(伐休王 : 재위 184-196)은 벌휴이사금(伐休泥師今) 또는 발휘왕(發暉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석(昔)씨로 탈해왕(脫解王)의 손자 각간(角干) 구추(仇鄒)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내례부인(來禮夫人) 김씨 이고,  아달라(阿達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 주군에 명(明)하여 나무를 뽑아 농사를 짓는데 아무른 방해가 되지 않게 관리 하도록 하였다.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으로 쳐들어오니 구도(仇道)를 명하여 대항하게 하였다.

이어서 구도(仇道)는 싸워 이기어 백제군을 섬멸하였으나 재차 침범하는 백제군의 계략에 속아 싸움에 패하니 왕은 구도(仇道)의 벼슬을 좌천시켰다.

 

185년(벌휴왕 2)에 처음으로 좌우군주(左右軍主)의 군직(軍職)을 신설하고 이어서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하였다.

186년(벌휴왕 3)에는 주(州). 군(郡)을 순행하여 민정을 살폈으며 백제와 자주 충돌하여 국경분쟁을 일으켰다.

 

왕은 천기를 점쳐 미리 수재 한재 및 그해에 흉년. 풍년이 있을 것을 알고 또한 사람의 바르고 그른 것을 잘 아는 까닭에 사람들은 왕을 성인(聖人)이라 했다.

 

 

↑신라 제10대 내해왕(奈解王)

 

■ 내해왕(奈解王)

 

신라 제10대 내해왕(奈解王 : 재위 195-230)의 원래 칭호는 내해이사금(奈解泥師今)으로 벌휴왕(伐休王)의 손자이고, 이매(伊買)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내례부인(內禮夫人)이고, 왕비(王妃)는 조분왕(助賁王)의 누이동생인 석씨(昔氏)이다.

 

내해왕(奈解王)은 용모가 뛰어나고 재능이 있었는데 전휴왕(伐休王)의 태자(太子) 골정(骨正)과 제2왕자 이매(伊買)가 먼저죽고 대손(大孫)이 아직 어리므로 이매의 아들을 세우게 되니 이가 곧 내해이사금(奈解泥師今)이다.

  

벌휴왕의 뒤를 이어 195년에 즉위 백제. 말갈(靺鞨)의 침략을 받아 국내가 불안 하였으니 214년(내해왕 19)에 이벌찬(伊伐찬). 이음(伊音)을 시켜 백제의 사현성(沙峴城)을 공략하였으며 218년(내해왕 23)에는 장산성(獐山城)에 침입한 백제군을 내해왕 자신이 지휘하여 격퇴 하였다.

 

 224년(내해왕 29)에는 이벌찬 연진(連珍)에게 명하여 백제군을 무찌른 봉산(烽山)아래에 봉산성(烽山城)을 새로 쌓게 하였다. 내해왕 재위기간 초기에는 백제의 침략을 받아 국내가 불안 하였으나 후에는 백제군을 격파하여 신라의 국세를 떨쳤다.

 

 

↑신라 제11대 조분왕(助賁王)   ? ~ 247

 

■ 조분왕(助賁王)

 

신라 제11대 조분왕(助賁王 : 재위 230-247)의 원래 칭호는 조분이사금(助賁泥師今). 또는 제귀왕(諸貴王). 성은 석(昔)씨로,  벌휴왕(伐休王)의 손자 갈문왕(葛文王) 골정(骨正)의 아들 이다.

 

어머니는 갈문왕 김도구(金仇道)의 딸 옥모부인(玉帽夫人)이고. 비(妃)는 내해왕(奈解王)의 딸 아미(阿彌)부인이다. 

그는 선왕의 유언으로 사위 조분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키가 크고 용모와 풍채가 아름답고 매사를 명확하게 판단 처결 하였으므로 사람들의 공경을 받았다.

 

231년 이찬 우로(于老)를 시켜 감문국(甘文國)을 정복하여 군(郡)으로 만들고 233년 왜구가 침입하자 다시 우로를 시켜 격퇴 했으며 236년 골벌국(骨伐國)의 항복을 받았다.

 

240년(조분왕 11)백제가 침입하고 245년(조분왕 16)고구려가 침입하여 이찬 한노(汗老)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와 군사들을 위로하며 몸소 나무에 불을 살라 그들을 따뜻하게 하니 군중들이 감격하였다. 247년 승하하고 첨해왕(沾解王)이 즉위 하였다. 

 

 

↑신라 제12대 첨해왕(沾解王)  ? ~ 261

 

■ 첨해왕(沾解王)

 

일명 이해(理解), 점해(#참29解)라고도 한다. 조분이사금의 동모제(同母弟)로, 아버지는 골정(骨正)이고, 어머니는 옥모부인(玉帽夫人)이다.

 

즉위년(247)에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에 봉하였다. 따라서, 점해이사금의 즉위를 형제상속으로 보기도 하고, 골정계(骨正系)의 독립이라는 점에서 가계내의 계승으로 보기도 한다.

 

형인 조분왕(助賁王)이 후사(後嗣)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248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서로 화친(和親)하였으며 249년 사량벌국(沙梁伐國)을 공략하여 이를 신라에병합 하였으며 같은해에 왜국(倭國)의 침공을 받기도 하였다.  

 

255년 9월에 백제가 침입하자 일벌찬(一伐찬) 익종(翊宗)을 시켜 괴곡(槐谷)서쪽에서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도리어 익종이 전사하고 이해에 달벌성(達伐城)을 축조 하였다. 248년 고구려와 화의를 맺었고, 255년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지금의 榮州?)을 공격해왔으나 이를 빼앗기지 않았다. 

 

한편, 영토의 확장에 노력하여, 달벌성(達伐城:지금의 大邱)을 쌓았으며 사벌국(沙伐國:지금의 尙州)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이때에는 사로국(斯盧國)이 진한의 전 지역을 통일하였다. 261년 12월에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다.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   ? ~ 284

 

■ 미추왕(味鄒王)

 

신라 제13대 미추왕(味鄒王 : 재위 262-284)의 원래 칭호는 미추이사금(味鄒泥師今)이고 성은 金씨로 이름은 미조(未照). 혹은 미소(未召)라고도 한다. 구도(仇道)의 아들이며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6대손이다.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이칠(伊柒)의 딸 박씨(朴氏)이고 비(妃)는 조분왕(助賁王)의 딸 광명부인(光明夫人)이다.

 

신라 제12대 왕인 첨해왕(沾解王)이 후사 없이 죽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김씨 왕가의 시조가 되었다. 267년 백제가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습격하고 이어서 283년에도 괴곡성(槐谷城)을 공격하였으나 신라는 이를 모두 격퇴 하였다. 왕은 백제의  침입을 잘 막았을 뿐 아니라 한편 내치(內治)에도 힘을 써서 농업의 장려에 힘썼다.

 

농사철에 비가오지 아니하므로 왕이 남당에 군신을 모으고 친히 정세를 묻고 또 5인의 사자(使者)를 각지에 파견하여 백성의 고난을 살폈다. 왕의 능을 죽릉(竹陵). 또는 죽장릉(竹長陵)이라 부른다.

 

 

↑신라 제14대 유례왕(儒禮王)   ? ~ 298

 

■ 유례왕(儒禮王)

 

신라의 제14대 유례왕(儒禮王 : 재위 284-298)의 원래 칭호는 유례이사금(儒禮泥師今)이라 하는데 3대 유리왕(儒理王)과 혼돈되어 쓰이므로 어떤 것이 옮은 지는 아직 미상이다. 성은 석(昔)씨로, 조분왕(助賁王)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내음(奈音)의 딸 朴씨 이다.

 

어머니 朴씨가 어느때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속으로 들어가 이로서 아이를 배었는데 해산하던 밤에 이상한 향기가 집에 가득 하였다. 286년(유례왕 3) 백제와 수교했고 287년부터 왜인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배를 수리하고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였다.

 

297년(유례왕 14) 이서국(伊西國)이 금성(金城)에 침입하여 크게 군사를 막아도 능히 물리치지 못하자 홀연히 이상한 군대가 오는데 귀에 대나무 잎을 꽃 고 아군과 더 불어 함께 적을 물리쳤다.

 

그 후 그들의 간곳을 알지 못하니 누가 선친의 능에 죽엽 (竹葉)이 많이 쌓인 것을 보고 선왕이 싸움을 도와준 것이라 하였다. 

 

 

↑신라 제15대 기림왕(基臨王)    289 ~ 310 

 

■ 기림왕(基臨王)

 

신라 제15대 기림왕(基臨王 : 재위 298-310)의 본래 칭호는 기림이사금(基臨泥師今). 또는 기립왕(基立王)이라 한다. 

성은 석(昔)씨요. 이찬 걸숙(乞淑)의 아들이며 조분왕(助賁王)의 손자이다.

 

성품이 너그러워 사람들은 모두 그 덕을 칭찬 하였다. 300년 일본과 수교 하였으며 노령자와 변민들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며 노인(老人)과 빈자(貧者)와의 차이를 많이 두었다.  

 

국호를 307년(기림왕 7)에 신라(新羅)로 고쳤으니 이는 일신(日新)하고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라 한다. 지진이 있고 샘이 솟았으며 경도에서 지진으로 집이 무너져 죽은 사람도 있었다. 왕이 여러 날 앓아누워 내외의 죄인을 사면해 주었으며 몇 달 후에는 마침내 죽었다.    

  

 

↑신라 제16대 흘해왕(訖解王)    ? ~ 356

 

■ 신라 제16대 흘해왕(訖解王)

 

신라 제16대 흘해왕(訖解王 : 재위 310-356)은 원래 칭호를 흘해이사금(訖解泥師今)이라 했고, 성은 석(昔)씨로 내해왕(奈解王)의 손자인 각간(角干) 우로(于老)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조분왕(助賁王)의 딸 명원부인(命元夫人)이고, 기림왕(基臨王)이 후사(後嗣)없이 죽자 대신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우노(于老)는 일찍이 임금을 섬기어 공이 있는데, 그 아들 흘해의 용모가 수려하고 두뇌가 명민하여 행동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므로 우노(于老)가 제후에게 말하기를 나라를 바로 세울 사람은 반드시 흘해라 하였다.

 

이르러 기림이 죽고 아들이 없으매 군신이 모이어 의논하되 흘해는 어려서 부터 덕이 있다고 하여 그를 받들어 세운것이다. 

 

312년 일본과 수교하여 아찬 급리(急利)의 딸을 일본 왕자에게 출가케 했고, 330년 벽골제(碧骨堤)를 쌓아 농사를 장려했으며 344년 일본이 재차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으나 이를 거절 이에 격분한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고 346년 풍도(風島)에 침입 변방을 약탈하고 금성(金城)을 포위 하였으나 패퇴 하였다.

 

 

↑신라 제17대 내물왕(奈物王)    ? ~ 402

 

■ 내물왕(奈物王)

 

신라 제17대 내물왕(奈物王 : 재위 356-402)의 성은 金씨로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이다. 비(妃)는 보반부인(保反夫人)金씨이고, 미추왕에게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내물이 즉위 했다.

 

364년 4월에 왜병의 큰 무리가 쳐들어 왔으나 전멸시켰으며 373년에는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남녀 300명을 이끌고 투항하자 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6부에 분거(分居)하게 하고 이들을 돌려보내라는 백제왕의 요청을 일축 하였다.  

 

381년 위두(衛頭)를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에게 보내어 우의(友誼)를 맺은 후 중국 문물수입에 힘써 이때부터 고구려를 거쳐 중국문화가 들어왔고 한자(漢字)도 이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 된다.

 

392년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위력에 눌려 사신과 함께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다음해 왜적의 침입으로 서울을 포위당했으나 이를 물리쳤고 395년에는 말갈병(靺鞨兵)이 침입하자 이를 격파하는 등 내외로 많은 치적을 남겼다.

 

 

↑신라 제18대 실성왕(實聖王)    ? ~ 417

 

■ 실성왕(實聖王)

 

신라 제18대 실성왕(實聖王 : 재위 402-417)은 실주왕(實主王) 또는 실금왕(實金王)이라고도 한다.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로 키가 7척5촌이나 되고, 총명하여 모든 일에 통달하고 식견이 심원하였다.

 

어머니는 아간(阿干) 석등보(昔登保)의 딸 이리부인(伊利夫人)이고,  비(妃)는 미추왕(味鄒王)의 딸 아류부인(阿留夫人)이다. 392년(내물왕 37)에 귀국 내물왕이 죽고 태자가 어리므로 추대 받아 즉위 하였다.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일본에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보내 수호(修好)를 맺고 405년에 명활산성(明活山城)에 침입한 왜병(倭兵)을 물리쳤으며 408년에 쓰시마정벌을 계획하였다가 서불한(舒弗한) 미사품(未斯品)의 건의로 중지하였다.

 

417년 내물왕의 어린태자였던 눌지(訥祗)를 시기하여 고구려 사람을 시켜 죽이려다가 도리어 눌지에게 살해되었다.

 

 

↑신라 제19대 눌지왕(訥祗王)    ? ~ 458

 

■ 눌지왕(訥祗王)

 

신라의 제19대 눌지왕(訥祗王 : 재위 417-458)의 성은 金씨로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이라 불렀다. 아버지는 제17대 내물왕(奈物王)이며 제18대 실성왕(實聖王)의 딸을 비(妃)로 맞았다.

 

실성왕이 눌지를 죽이려하자 눌지가 이를 간파하고 실성왕을 제거 왕위에 올랐다. 418년(눌지왕 2)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그의 동생 복호(卜好)를 일본에 보내어 역시 불모로가 있던 다른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귀국시키는데 성공 하였다.

 

이에 박제상은 일본을 속이고 미사흔을 빼돌린 사실이 발각 일본에서 죽고 말았다. 431년(눌지왕 15)왜구의 침입이 있었으며 438년(눌지왕 39)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어 백제에 원병을 보냈다.

눌지왕 재위 기간에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신라에 들어와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료출처 : 대한민국5000년사 역대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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