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빈 이씨(安嬪 李氏) - 《제17대 효종의 빈(嬪)》
[생졸년] 1622(인조 즉위)~1693(숙종 19)
[아버지] 공조참의 이응헌(李應憲)의 딸 경주이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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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빈 경주이씨(安嬪 慶州李氏)는 1622년(광해군 14) 9월에 공조참의 응헌(應憲)의 딸로 태어나 효종의 후궁이 되었으며, 병자호란 후 1637년(인조 15) 봉림대군이 청나라의 심양(瀋陽)에 볼모로 끌려갈 때 배종(陪從)하여 갔다가 1645년(인조 23) 귀국하여 효종과의 사이에 숙녕 옹주(淑寧翁主, 1649~1668/朴弼成 妻)를 두었다. 숙녕옹주는 박필성(朴弼成)에게 시집 갔으나 나이 20세에 요절했다.
16661년(효종 2) 10월 20일(병인) 효종은 후궁 이씨를 숙의(淑義)로 삼았고, 1686년(숙종 12) 5월 27일(경술) 숙종(肅宗)은 안빈이씨(安嬪 慶州李氏)가 심양에서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 효종을 8년 시종하면서 충성을 다 바친 일로, 그를 귀인(貴人)에서 안빈(安嬪)으로 승격하였으며, 1693년(숙종 19) 10월 23일 72세로 서거 하자 조천(祧遷) 하지 말도록 명하고서, 이후로 왕실에서 계속 제사지냈다.
묘의 시설로는 봉분(封墳)․ 곡장(曲牆)․ 묘표(墓表).혼유석(魂遊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이 있고, 장명등 좌우에 키가 작은 동자석(童子石)이 있다. 묘표의 앞면에 「조선국 안빈 경주이씨 묘표(朝鮮國安嬪慶州李氏墓表)」라 새겨져 있고 후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자료문헌]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敦寧譜牒 ◇璿源系譜紀略
제17대 효종 가계도
효종 가계도>baobabstar.eqloos.com/109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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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빈 경주이씨 가계도
제16대 인조 공조참의 이응헌(李應憲)
∥ (경주이씨)
인렬왕후 한씨 ㅣ
부(父) : 서평부원군 한준겸 ㅣ
∥ ㅣ
∥-------제 17대 효종--------안빈이씨(安嬪 李氏)
∥ ㅣ
∥ 숙녕옹주(淑寧翁主)
↑안빈 경주이씨 묘(安嬪 慶州李氏 墓). ⓒ드미트리
조선 제17대 효종의 빈(嬪)이다.
◇사적 제366호(1991. 10월. 25)
◇면적 : 1,983㎡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471~1
↑안빈 경주이씨 묘 후경. ⓒ드미트리
↑안빈 경주이씨 묘표.
↑안빈 경주이씨 묘표 뒷면. ⓒ드미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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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빈의 첩지(安嬪 帖紙)
본관은 경주로이응헌(李應憲)의 딸로 태어났다. 효종이 대군이던 시절 첩이 되었는데 병자호란 이전에 첩이 되어 효종이 왕자시절 볼모로 청나라로 끌려 갈 때도 함께 가게 된다.
1649년 28살의 나이로 효종의 막내딸인 숙녕 옹주를 낳고, 한참 후에야 후궁의 작위를 받게 된다. 1661년 종2품 숙의가 되고 이후 종1품 귀인이 된다.
숙종시절인 1686년 정1품 빈이 되어 안빈에 봉해진다.
남편과의 사이에 효종의 유일한 서녀인 숙녕 옹주를 낳았다.
안빈이씨가 왕의 자녀를 낳고도 한참 후에야 후궁으로 책봉되자 이후 다른 왕들이 냅다 후궁을 봉하려고 하면, 신하들이 안빈 이씨의 예를 끌고 나온다.
안빈이씨가 무덤에서 벌떡 나올 것 같다. 안빈이씨는 딸을 낳고도 한 참 후에야...후궁 첩지를 받았다며...효종은 자신의 형인 소현세자와 조카들 강빈 까지 묘하게 뒤끝남기고 사망한 이후 내내 정통성에 매우 예민했다.
효종 스스로는 왕이 된 이후 책잡힐 일을 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후궁은 자녀를 낳은 이후 봉하라는 것 때문에 안빈이씨가 손해를 본 계기로 추정된다. 왕녀를 낳았지만 난 뒤늦게 후궁에 봉해 졌어 하는 안빈이씨의 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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