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은사(奉恩寺)
위치 : 서울 강남구 삼성동 73번지 | TEL : 02) 511-6070
봉은사(奉恩寺)는 신라(新羅)의 고승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원성왕 10년 서기 794년에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創建)했다고 한다. 연회국사(緣會國師)에 관한 「삼국유사」기록에 의하면 신라 원성왕때의 고승으로서 영축산에 은거하며,「법화경」을 암송하며 보현행을 닦았던 승려였다고 한다.
또한 기록은 「삼국사기」권38<잡지(雜誌)> 제7에 봉은사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당시 성전사원에 해당하는 일곱 사찰 가운데 하나로 봉은사가 언급되고 있다. 그 일곱사찰은 사천왕사, 봉선사, 감은사, 봉덕사, 영모사, 영흥사 외 봉은사다.
성전은 왕실에서 건립한 사찰의 조성과 운영을 위해 설치한 일종의 관부로서. 일반 행정 관청과는 다른 특수 관청으로서 그 관원 조직도 일반적인 관직 이름과 다른 호칭의 관원들이 왕실 사원의 행정과 업무를 맡고 있었다.
당시의 성전이 설치된 사찰은 신라 사회에서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던 곳으로. 실제 봉은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신라의 왕인 진지왕의 추복을 위해 건립되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이를 위해 이미 혜공왕대로부터 사찰 조성을 시작하여 선덕왕을 거처 원성왕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는 점 등이 각종 자료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한다.
그리고 우리 역사상에 봉은사라는 이름을 가진 명찰이 세 곳이 등장 하는데, 각 각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불교사적으로나,국가적으로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찰들이엿던것임에 틀림없다.
먼저 신라 시대의 봉은사는 앞서 기술한바와 같이 혜공왕대에 시작하여 원성왕대에 완성한 성전사원이고, 고려시대의 봉은사는 수도 개성에 위치했던 사찰로 태조 이래 역대 왕실에서 매우 중시하였던 사찰이다.
왜냐면 이곳은 선종 계통의 유명 사찰로서 대대로 국사. 왕사의 책봉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던 곳이었던 것이다.
끝으로 조선 시대의 봉은사는 바로 문정왕후의 발원과 보우대사의 정진이 살아 숨쉬는 이곳 서울 봉은사를 말한다.
고려의 흔적은 사료적으로 찾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잔존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1344년(충혜왕 5)에 조성된 은입사향로에 관련한 내용은 봉은사의 고려의 숨결을 알 수 있는 자료로 남아 있다.
현재 보물 제31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향로는 최근까지 봉은사에 있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불교 사원을 대폭 축소하려는 정책에 따라 1406년(태종 6년)에는 국가 인정 사찰이 242개사로 줄었고, 1424년(세종 6년)에는 다시 전국의 사찰 중에서 선교 양종(禪敎兩宗)의 각 18개 사찰씩 36사만을 선정하여 3천 7백여명의 승려만 인정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선교 양종 제도 시행시에 서울의 중심 사찰은 선종사원 흥천사와 교종사원 흥덕사였다.
이밖에 인근에 승가사와 장의사가 36사에 들어 인정받았지만 봉은사나 그 전신인 이 안에 견성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연산군대에 흥천사와 흥덕사가 폐지되고 선교 양종 제도도 무너졌다.
이런 사원의 부침 속에서 여러 능침 추복 사찰 중의 하나였던 봉은사가 전국 수사찰의 위상으로 떠오른 것은 명종대 문정왕후와 보우의 활동에서부터이다.
이미 중종 때부터 봉은사는 중심 사찰로서 인식되고 있었다. 도성에서 선교 양종 도회소 역할을 하던 흥천사와 흥덕사가 폐지되었으니 도성 인근에서 규모와 위상이 큰 사찰로는 능침 사찰의 대표 격인 봉은사가 대신 부상하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중종 때인 1539년(중종 34년)에 대대적으로 사찰을 모두 철거하려는 정책을 추진하며 그 중심에 봉은사가 있으니 이들을 그냥 두고서는 다른 사찰을 철거하는 것은 승려를 근절시킬 수 없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상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중종에 이어 명종이 즉위하고 어린 명종을 대신해서 섭정을 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정책으로 조선 불교계는 일시 부활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봉은사도 이 떄 보우의 활동에 힘입어 수사찰의 지위를 확고하게 한다.
문정대비는 1550년(명종 5년)에 선교 양종을 부활하여 봉은사를 그 본산으로 하도록 하고, 연산 대 이후 실시하지 않다가 1507년(중종 2년)에 완전히 폐지했던 승려들의 과거 승과(僧科)를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다시 시행하도록 하였다.
선교 양종의 부활에 따라 양종 체제가 다시 기능을 되찾으면서 봉은사는 선종 수사찰(禪宗首寺刹)이 되어 교종의 수사찰인 봉선사와 함께 불교계를 이끌게 되었다. 이때부터 봉은사의 사격이 전국 으뜸을 자랑하게 된 것이다.
1551년(명종 6년)에 특명으로 보우를 판선종사 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봉은사 주지(奉恩寺住持)로 삼아 판교종사 도대사(判敎宗事都大師) 봉선사 주지(奉先寺住持)로 임명한 수진(守眞)과 더불어 명실 공히 선교 양종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정식 직함에 따라 보우의 활동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준 것이다.
이듬해인 1552년에는 승과가 실시되어 선종에서 400인의 예비합격자를 낸 끝에 최종적으로 33명의 급제자를 선발하고 도첩제가 다시 시행되었다. 선종 수사찰 봉은사에서는 보우가 주도하는 선종 승과가 시행되어 봉은사 앞 들판은 승과평(僧科坪)이 되었다.
비록 규정대로 양종 각 30인의 급제자를 선발하지는 못했으나 휴정을 비롯한 승과 합격자를 배출함으로써 조선 사회에서 명분을 얻어 활발하게 역량을 펼칠 인재들을 배출해낸 것이었다. 이에 대해 유신들은 한결같이 이런 시책들이 보우가 문정대비를 현혹하여 꾸민 일이라고 주장하며 보우를 그 원천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는 보우의 활동 곧 그 터전이었던 봉은사가 당시 불교계 운영의 중심에 있었음을 여실히 말해주는 것이다.
1555년(명종 10년)에 개최된 두 번째 승과를 주관하고 나서 보우는 봉은사 주지직과 선종판사를 그만 두고 청평사로 은퇴하였다.
보우는 이와 관련하여 자신의 심회를 시로 풀어냈는데, 수많은 시비 가운데 팔년 동안 한강변에 선교를 일으켰다는, 곧 봉은사에 선교 양종 체제를 재건하고 중흥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자부하며 때가 되면 오고 때가 되면 가는 것이 자신의 선의 이치이니 공연히 다른 생각 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신료들의 빗발치는 반대 속에서 과감하게 추진했던 불교 재건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그 대신 1552년에 승과에 급제했던 서산대사 휴정이 1555년 여름에 교종판사가 되었다가 가을에 선종판사가 되어 봉은사 주지를 맡았다. 그러나 1557년에 휴정은 봉은사 주지를 사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행에 전념하였다.
보우는 1560년(명종 15년)에 5년 동안의 청평사 은거를 마치고 다시 봉은사 주지직을 맡았다. 그리고 1562년에 주선하여 시행한 승과에서는 사명대사 유정이 합격하였다. 그런데 이해 1562년 7월 보우는 도대선사 직위를 박탈당했다가 12월에 다시 직첩을 받는다. 이즈음에 있던 변화가 봉은사의 이전 확장이다.
1562년(명종 17년) 9월에 선릉의 동쪽 기슭에 있던 옛 봉은사 터에 중종의 정릉(靖陵)이 천장되었다. 중종은 처음 돌아가고 나서 먼저 돌아간 왕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묻힌 희릉(禧陵)에 나란히 장례지냈다.
그런데 문정대비는 자신이 나중에 돌아가면 중종의 곁에 함께 묻히고 싶은 생각에서 중종의 능을 봉은사 터로 옮기도록 하여 정릉이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 천릉에 따라 봉은사는 수도산의 지금의 위치에 대규모로 확장 이건되었다. 왕릉 관련기록에서는 조정에서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당우와 요사를 창건하였기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웅장해져 경산제찰(京山諸刹)의 으뜸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가람의 전모는 삼존을 봉안한 대웅보전, 진여문, 식당, 12 위패를 봉안하던 어선루(御宣樓, 위패가 궁으로 옮겨간 다음에는 금속루金粟樓로 바꿔 부름), 천왕문, 해탈문, 명부전, 응향각(향로전), 나한전, 뒤에 1618년에 조성한 유초관(鍮哨罐)이 있던 심검당(승당), 운하당(선당), 강선전, 서산이 매화를 심었다는 매화당, 청심당, 수륙재 공양소인 향적전, 동별당 서행랑, 대남루, 병이 든 승려들의 입적소였던 열반당 등으로 이루어졌다.
1565년(명종 20년)에 문정왕후가 갑자기 돌아갔다. 그동안 회암사를 중창하고 무차대회를 진행하는 등 성대한 행사를 치르던 보우는 문정대비의 승하에 이어 탄핵을 받아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제주목사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이후 선교 양종과 승과가 차례로 폐지되었다. 보우와 문정대비의 노력으로 부활했던 조선 불교가 다시 조락의 시절로 접어든 것이다. 20년에 지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이를 통해 보우는 장차 조선 후기 불교계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배출하여 그 기반을 다진 중요한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보우의 활동과 함께 조선불교의 중심으로 부상하여 성세를 보였던 봉은사의 형세와 위상 또한 침체의 길로 접어들 수 밖에 없었다. 전통 불교의 명맥을 되살려 새로운 지향을 시도하면서 조선 불교계는 일제의 침략 기도를 뿌리쳐야 하는 과제도 안게 되었다.
1895년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 조치가 해제되고 지방 사원의 포교당이 서울에 늘어나면서 도심 포교도 새롭게 모습을 보였다. 도심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봉은사는 여러 차례의 불사를 통해 짜임새 있는 사원 형세를 정비해 나갔다.
1886년에 대형 괘불을 비롯하여 판전의 후불탱과 북극보전의 칠성탱 불사가 이루어졌고, 1892년에는 대웅전 삼불회도와 감로탱이 이루어졌으며 1895년에는 영산전의 후불탱과 신중탱, 16나한을 4폭에 나누어 그린 나한탱 등 일련의 영산전 불사가 이루어졌다.
이 불사를 맡았던 화사들은 경선응석(慶船應釋)을 비롯하여 영명천기(影明天機) 보운긍엽(寶雲亘葉) 한봉창엽(漢峰曄) 혜산축연(蕙山竺衍) 예운상규(禮云尙奎) 등 명가들이었는데, 단월로 상궁들이 많이 보이는 것이 특색이다.
일제에 의해 국권을 침탈당한 이후 일제는 1911년에 사찰령을 반포하여 30 본산제에 따라 조선불교를 일제의 장악 하에 두고자 했다. 이에 따라 봉은사는 경기도 선종 대본산이 되어 서울을 비롯한 광주 고양 양주 시흥 수원 여주 이천 양평 파주 등 8군 78개 말사를 관할하게 되었다.
봉은사는 30본산에서 첫 번째로 꼽힌 사찰이 되어 이름을 선종갑찰대본산봉은사(禪宗甲刹大本山奉恩寺)라고 내세우고 서산대사의 법손이 주지하도록 하는 봉은사본말사법을 인가받아 시행하였다. 이 인가 사승(寺乘)에서 봉은사는 실질적인 창건을 명종 대 보우의 활동에서 시작하여 서산-사명-벽암으로 계승되는 법맥을 강조하였다.
이때 봉은사의 당우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대향각 판전 선원 영산전 심검당 명부전 운하당 산신각 관응당 천왕전 강선전 독성각으로 이루어졌다. 제도가 바뀐 이후 1912년에 첫 주지로 취임한 나청호(羅晴湖學密, 1875-1934) 강백은 사원의 토지를 확보하고 포교와 사회봉사 활동에 앞장서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자 하였다.
본래 오대산에서 강학에 열중하던 청호화상은 일제 불교의 침투에 대응하여 전통 불교를 수호하려는 원종 종무원에 감사부장으로 참여하며 각황사에서 포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1912년에 봉은사 주지로 초빙된 청호화상은 세간에 나서는 실천행을 제창하여 절 부근의 황무지를 개간, 20만평에 이르는 막대한 토지를 확보하고 사원을 중영하여 30본산 갑찰의 형세를 가꾸었다.
특히 을축년(1925) 7월 한강을 덮친 대홍수 때 청호 화상의 활동은 빛났다.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홍수로 한강이 넘쳐 집과 논밭이 떠내려가고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강물에 떠내려갔다. 청호화상은 사중을 불러 모아 배를 띄우고 물에 뛰어들어 사람을 하나씩 건져냈다. 이렇게 구한 인명이 무려 708인이었다.
그리고는 사중의 재물을 모두 풀어 이재민을 구호하였다. 당시 봉은사의 조실은 뛰어난 선사 한암(漢巖重遠, 1876-1951)이었다. 출세간의 경지를 걸었던 조실의 상황에 적절하게 구사된 법력과 주지의 세간에 다가간 손길이 잘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낸 쾌거였다.
경향의 칭송을 한 몸에 모은 주지 청호 화상을 기려 도움을 받았던 광주와 고양의 선리 부리 잠실리 신장리 주민들의 주선으로 수해구제공덕비가 세워지고 당시의 지도층 인사들이 이를 기리는 시화를 모아 불괴비첩(不壞碑帖)을 만들어 이 장한 뜻을 기렸다. 가장 필요한 도움을 어려울 때 행동으로 보여준 진정한 보살행의 실천이었다.
서울 갑찰의 본산이었던 봉은사는 도심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22년의 마포 포교당을 시작으로 1924년에 안변, 1926년에 인천, 1932년에 서울 관동, 1933년에 서울 현저동, 1934년에 서울 옥천동 등 모두 6개의 포교당을 개설하여 적극적인 포교 활동에 나섰다.
도심에 가장 인접한 봉은사가 나가야 할 마땅한 방향이었다. 본사와 포교당 간의 원활한 교류를 통해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포교의 마당에 봉은사의 역량이 미친 것이다.
사원 운영에도 남달랐던 청호 화상은 퇴락한 전각들을 차례로 중수하여 절의 형세를 정비하였으나 1939년에 화재를 만나 판전을 제외한 건물들은 모두 전소되고 말았다. 그래서 현재 남은 당우는 1941년에 태욱(泰旭)이 중창한 것이다.
광복 후 봉은사는 조계종 총무원 직할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의 전란으로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전란이 끝나고 부분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지속적인 발전을 보였다. 그리고 1960년대 정화를 겪으면서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하고 봉은사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1964년에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의 수련도량으로 대학생 수도원이 봉은사에 건립되어 영명한 젊은이들이 이곳에 모여 정진을 거듭하였고, 이들은 다수가 현재 한국 불교계 또는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되어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72년에는 동국역경원이 설치되어 대장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전당이 되었다.
현재 대웅전을 비롯하여 선불당 영산전 명부전 영산전 북극보전 판전 충령각 운하당 선원 심검당 법왕루 보우당 진여문 등의 당우가 미륵대불과 함께 경역을 이루며 대중적 포교활동과 사회복지를 실현하는 도심속 대찰의 위상을 이어가고 있다.
[출처]봉은사(奉恩寺) | 작성자 김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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