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신라사(新羅史)

신라육부(六部)의 명칭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다[賜姓].서기 32년

야촌(1) 2010. 8. 10. 00:19

■ 육부(六部)의 명칭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다[賜姓].

     임진년 신라 유리왕 9년, 고구려 대무신왕 15년, 백제 다루왕 5년(한 광무 건무 8, A.D. 32)

 

  ◈봄사로가 육부(六部)의 명칭을 고치고 성을 내렸다[賜姓]. 

 

◇신라가 육부의 명칭을 모두 고쳤다.

◇양산부(楊山部)를 고쳐 급량(及梁)이라 하고 성(姓) 이(李)를 내렸으며,

◇고허부(高墟部)는 사량(沙梁)이라 하고 성은 최(崔),

◇대수부(大樹部)는 점량(漸梁) 일설에는 모량(牟梁) 이라 하고 성은 손(孫),

◇간진부(干珍部)는 본피(本彼)라 하고 성은 정(鄭),

◇가리부(加利部)는 한지(韓祗)라 하고 성은 배(裵),

◇명활부(明活部)는 습비(習比)라 하고 성은 설(薛)이라 하였다.

 

육부를 중분하여 둘로 만들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부내 여인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편을 갈라 7월 기망(旣望 16일)부터 매일 일찍 큰 부의 뜰에 모여서 삼베를 짜되 을야(乙夜 : 오후 10시)에 파하였다.

 

 8월 15일에 이르러 성적의 다소를 점고하여, 진 편에서는 주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고 가무와 백 가지 유희를 모두 하니, 이를 ‘한가위[嘉俳]’라고 하였다. 이때 가난한 집안의 한 여인이 일어나 춤을 추며 탄식하기를 ‘회소(會蘇) 회소’라 하니, 그 소리가 슬프고 우아하였다. 뒷사람이 그 소리를 인하여 노래를 짓고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하였다.

 

○사로가 관위(官位) 17등을 설치하였다.1은 이벌찬(伊伐飱) 혹은 이벌간(伊伐干), 혹은 간벌찬(干伐飱), 혹은

     각간(角干), 혹은 각찬(角粲), 혹은 서발한(舒發翰), 혹은 서불한(舒弗邯)이라 하였다.

 

2는 .이척찬(伊尺飱) 혹은 이찬(伊飱)이라 하였다.

 3은 잡찬(迊飱) 혹은 잡판(迊判), 혹은 소판(蘇判)이라 하였다.

4는 파진찬(波珍飱) 혹은 해간(海干) 혹은 파미간(波彌干)이라 하였다.

5는 대아찬(大阿飱)이니, 모두진골(眞骨)에게 제수되고 다른 종족에게는 주지 않았다.

       ‘진골’이란 왕족이니, 신라는 왕통 계승자를 ‘성골(聖骨)’이라 하고 왕족은 진골이 되었으며 또한 이를 제1골이

       라 하고, 귀족(貴族)은 제2골이라 하였다.

 

형제의 딸과 고모ㆍ이모ㆍ종자매를 모두 맞아 아내로 삼았으며, 따라서 처족은 모두 제1골이 되었다.

제2골에게는 장가들지 않으며, 비록 장가를 들어도 항상 첩[妾媵]으로 삼았다.

 

6은 아찬(阿飱) 혹은 아척간(阿尺干) 혹은 아찬(阿粲)이라 하였다.이로부터 이하는 제2골이 되었으며, 이 아래로

       중아찬(重阿飱) 으로부터 사중아찬(四重阿飱)까지 있다.

7은 일길찬(一吉飱) 혹은 을길간(乙吉干)이라 하였다.

8은 사찬(沙飱) 혹은 살찬(薩飡) 혹은 사돌간(沙咄干)이라 하였다.

9는 급벌찬(級伐飱) 혹은 급찬(級飡), 혹은 급복간(級伏干)이라 하였다.

 

10은 대나마(大奈麻) 혹은 나말(奈末)이라 하였다 이니, 이 아래로 중대나마(重大奈麻)로부터 구중(九重)까지 있

          다. 

11은 나마(奈麻)이니, 이 아래 중나마(重奈麻)로부터 칠중(七重)까지 있다.

12는 대사(大舍) 혹은 한사(韓舍)라 한다.

 

○우리 나라 속언에 ‘대(大)’를 칭하여 ‘한(韓)’이라 한다.

13은 사지(舍知) 혹은 소사(小舍)

14는 길사(吉士) 혹은 계지(稽知), 혹은 길차(吉次)라 하였다.

15는 대오(大烏) 혹은 대오지(大烏知)라 하였다.

16은 소오(小烏) 혹은 소오지(小烏知)라 하였다.

17은 조위(造位) 혹은 선저지(先沮知)라 하였다 이니,무릇 34급(級)이었다.

 

 

김씨는 말하기를,

“신라의 관호(官號)는 때에 따라 바뀌어 같지 않고, 또 모두 우리 방언이어서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당초 설치하여 실시함에는 반드시 관직에 상수(常守 항상 근무하는 직책)가 있고 관위에 정원이 있어, 존비를 분변하고 인재의 대소를 대우하는 것이겠는데, 문기(文記)가 없어져 고증할 수가 없다.

 

남해왕은 국사를 대신에게 위임하여 이를 대보(大輔)라 하였고, 유리왕은 관위 17등을 설치하니, 이로부터 명목이 번다하여졌다.”하였다.

 

3월 고구려가 남부의 사자(使者) 추발소(鄒勃素)를 비류부장(沸流部長)으로 삼았다.처음에는 대신 구도(仇都)ㆍ일구(逸苟)ㆍ분영(焚永) 등 세 사람이 비류부장이 되었었는데, 성품이 탐비(貪鄙)하여 남의 처첩과 재화를 빼앗는 등 하고 싶은 대로 자행하니,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고 분해 하였다. 왕은 이들이 시조의 옛 신하이므로 차마 법대로 하지 못하고, 폐하여 서인(庶人)을 만들고 발소로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발소가 따로 큰 거실을 만들어 거처하면서 구도 등 죄인들이 당상에 오르지 못하게 하니, 세 사람이 앞에 나아가 사죄하여 이르기를, “원컨대 공은 허물을 용서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게 하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하였다.

 

발소가 이들을 이끌어 함께 앉으며 말하기를,“사람이면 누군들 허물이 없겠는가? 허물이 있어도 능히 고치면 이보다 더 큰 착함이 없는 것이다.”하고 벗이 되기를 허락하니, 세 사람이 감복하고 부끄러워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발소가 위엄을 쓰지 않고도 능히 지혜로 악한 사람을 징계하니 가히 어질다고 하겠다.”하고, 대실씨(大室氏)라고 성을 내렸다.

 

●처음으로 고구려가 나라를 나누어 5부를 만들었다.

   1은 계루부(桂婁部)로 뒤에 내부(內部) 혹은 황부(黃部)라 칭하니 곧 비류부(沸流部)이고,

   2는 절노부(絶奴部)로 뒤에 북부(北部) 혹은 후부(後部)라 칭하였으며,

   3은 순노부(順奴部)로 뒤에 동부(東部) 혹은 좌부(左部)라 칭하고,

   4는 관노부(灌奴部)로 뒤에 남부(南部) 혹은 전부(前部)라 칭하니, 곧 관나부(貫那部)이고,

   5는 소노부(消奴部)로 뒤에 서부(西部) 혹은 우부(右部)라 칭하였으며, 각각 대신으로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두씨의《통전》ㆍ《신당서》에서 보충-

 

●하4월 고구려가 낙랑을 엄습하여 항복시켰다.이에 앞서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에 사냥을 나갔었는데, 낙랑왕

    낙랑은 중국의 군(郡)이니 어찌 왕을 칭하였을 리가 있겠는가?

 

    대개 삼국 사이에 끼어 그 세력이 왕과 같았으므로 우리 나라 사람이 그를 왕이라 호칭한 것이다 최리(崔理)가 나

   가 다니다가 보고 묻기를,

   “그대의 안색이 비상함을 보니 어찌 북국(北國 즉 고구려) 신왕(神王 대무신왕)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함께 돌

   아와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호동은 그 여인를 시켜 무고(武庫)에 들어가 병물(兵物 무기류)을 파괴하게 하고,

   왕을 권하여 낙랑을 엄습하게 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크게 몰려오니, 최리가 비록 싸우고자 하나 고각(鼓角)이 모두 파괴되었으므로, 드디어 딸을 죽이

   고 나와서 항복 하였다.

 

●동10월 고구려 왕이 아들 호동을 죽였다.

   고구려 왕의 원비가 아들 해우(解憂)를 낳으니, 그는 성품이 모질고 사나왔다.

 

   처음 왕이 갈사왕(曷思王)의 손녀를 맞아들여 차비(次妃)로 삼아서 호동을 낳으니, 얼굴이 미려하므로 왕이 사

   랑하여 호동이라 이름 하였다. 원비가 맏이[嫡]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왕에게 참소하기를, “호동이 첩에게 무례

   한 일을 하고자 합니다.” 하였으나, 왕이 믿지 않았다.

 

   원비는 장차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울며 고하기를,“대왕께서는 자세히 살펴보소서. 만약 사실이 아니면 첩이

   마땅히 복죄(伏罪)하겠습니다.” 하니, 이에 왕이 의심하여 장차 죄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이르기를, “어찌하여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하였다.

   호동이 말하기를, “이는 어머니의 잘못을 드러나게 하여 아버지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효도라고 할 수 있

   는가?”하고, 마침내 복검(伏劍)하여 죽었다.

 

   김씨는 이르기를,

   “왕이 참소를 믿고 인자하지 못했던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호동도 죄가 없을 수 없다. 순(舜)은 작은

   매질은 받고 큰 매질에는 달아나 아버지를 불의에 빠뜨리지 않게 하였는데, 호동은 이렇게 하지 않고 죽지 않

   을 자리에서 죽었으니, 작게 삼갈 것을 고집하여 큰 의리에 어두웠던 것이라 할 만하다. 그신생(申生)에게나

   비유할까?”하였다.

 

●12월고구려가 아들 해우를 태자로 세웠다.○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한(漢)에 입조(入朝)하니, 조서를 내려 왕

    호를 복귀시켰다. 왕망(王莽) 이후로부터, 고구려와 중국이 서로 국교가 단절되었더니 이에 이르러 왕이 아들을

    보내어 한에가서 조공하게 하므로, 제(帝)가 조서를 내려 그 왕호를 복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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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신생(申生) : 춘추 시대 진 헌공(晋獻公)의 태자. 헌공이 여희(驪姬)를 총애하여 그의 아들 해제(奚齊)를 세

             우고자 신생을 곡옥(曲沃)에 거처하게 하였더니, 마침내 여희의 참소로 자살하였다. 《左傳 莊公 28年 僖

             公 5年》 

 

[참고문헌]

◇동사강목 제1하